소설리스트

#2. (22/65)

 #2.

 곽우량은 심하게 일그러진 눈으로, 자신이 일하는 전출소(錢出所)의 책상에

 앉아 하나의 쪽지를 쳐다보고 있었다. 쪽지의 내용은 간단했다.

 '실패(失敗)'

 특이한 점이라고는 쪽지 옆에 20만금이라는 거금이 놓여있다는 것 뿐이었다.

 어찌 보면 그로서는 어디선가 나타난 거금이 횡재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의 심정은 결코 편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20만금이란 돈이

 자신이 고용한 암살자에게 착수금으로 준 돈이란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곽우량의 안면근육이 떨리기 시작했다. 이내 쾅! 소리가 터져 나오며 책상 위의

 문갑이며 필통이 들썩거렸다.

 "빌어먹을!!!"

 "……나으리…."

 곽우량은 고개를 돌렸다. 자신이 이처럼 불같이 화를 낼 때 자신에게 다가올 수

 있는 사람은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세 번째 첩, 타라 뿐이었다. 그녀는 신비해

 보이는 바다빛 눈동자를 빛내며, 그의 어깨에 부드럽게 손을 올려 주물러주기

 시작했다. 타라는 곽우량이 서융에서 사온 노예였던 것이다.

 곽우량은 얼굴을 펴며 등뒤에 서있는 그녀의 가슴팍에 고개를 기대었다.

 풋풋한 살내음이 전해져 왔다. 그대로 눈을 감으며 곽우량은 입을 열었다.

 "내가 소리지르는 통에 놀랐나 보구나…."

 "무언가 안되는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안색이 영 편치 않으십니다."

 타라는 나긋나긋하게 허리를 움직여 곽우량의 등에 몸을 부벼대며 걱정어린

 어조로 말했고, 곽우량은 별 것 아니라는 듯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별 일 아니다. 후훗, 내가 성격이 급해 너에게까지 걱정을 시키게 만들었구나."

 "별 말씀을 다 하십니다, 나으리."

 타라의 뺨에 홍조가 감돈다. 아직 솜털도 채 가시지 않은 하얀 목덜미가

 곽우량의 눈에 들어왔다. 곽우량은 서서히 손을 들어 그녀의 뺨을 쓰다듬어

 보았다. 손밑으로 잔잔하게 떨리는 이국의 향취가 느껴졌다. 이내 곽우량의

 억센 손이 그녀의 뒷덜미를 잡아끌었다. 

 타라는 이미 그의 의도를 알아차렸는지 한손으로는 자신의 옷을, 다른 한손으론

 곽우량의 옷을 벗기며 사내의 무릎 위로 올라탔다. 눈이라고 해도 믿어질 만큼

 흰 피부가 곽우량의 눈앞에 나타났다. 

 사내의 손이 부드러운 등의 곡선을 따라 내려갔다. 이미 여인의 아랫도리는

 성급한 손길에 발치로 내려간지 오래였다. 섬세한 손길이 사내의 아랫배를

 어루만지며 허리춤 안으로 들어갔다. 

 곽우량은 잠시 후면 다가올 황홀한 감각을 예상하며, 잔뜩 몸을 뒤로 재끼면서

 두 손으로 타라의 엉덩이를 끌어당겼다.

 "허억-!"

 그의 입에서 헛바람 삼키는 소리가 나왔다. 황홀한 느낌? 아니, 그것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벼락이 한줄기 머리에서 발치까지 뚫고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곽우량은 병든 개마냥 헉헉 거리며 십자로 갈려져 내장을 쏟아내고 있는 자신의

 아랫배를 바라보고 있었다.

 경악을 담은 사내의 시선이 자신을 향했으나, 여인은 상대도 하지 않고 발치로

 내려간 자신의 옷가지들을 쳐매 입으며 중얼거렸다.

 "이로써 두 번째 의뢰는 성공한 셈이군…."

  

 ※     ※     ※

 휘이익-! 한줄기 바람이 자신의 곁을 스쳐가자, 보초병 하나가 몸을 부르르

 떨며 조그만 소리로 투덜댔다. 얼굴엔 수염도 안난 것이 아직 스물이 안 넘었을

 나이다. 잠시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있던 보초병은, 자기 앞에 나타난 몇 개의

 그림자를 보고 힘있게 창을 땅 위에 굴리며 목청을 뽑아 대답했다. 

 "중원의 황제께선 만수무강 하시옵소서! 이상 없습니다!"

 "음, 좋다."

 일단의 무리들은 잔뜩 얼어붙은 보초병에게 아무 관심도 두지 않으며

 그가 서있는 집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들 뒤로 방금 보초병을 한바퀴

 휘감았던 수상쩍은 바람도 따라 들어갔다. 그들이 들어간 집의 문패는 이러했다.

 '청난성 치안청장 번문호. 전둔(展芚) 번가(繁家) 십일대 손.'

 집안에는 이미 몇 명의 무복을 입은 이들이 원을 그리고 서있었다. 무언가를

 둘러싸고 한참을 살펴보던 그들은 등뒤에서 들려온 발자국 소리에 몸을 돌려

 들어온 이들에게 예를 표했다.

 안으로 막 들어온 이들 중 한 사람이 안에 들어와 있던 이들에게 입을 열었다.

 흰 수염을 가슴팍까지 기르고, 눈꼬리가 매섭게 올라간 중노인이었다.

 "뭔가 알아낸 사실이 있는가?"

 "여러가지 재미있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승상 각하."

 무복을 입은 이들 중 수염이 듬성듬성 난 중년 사내가 곧 대답했다.

 "우선 번청장은 평상시 자신이 잘 알던 여자의 모습으로 변장한 자객에게

 당하셨다는 점입니다."

 "정액을 질펀하게 싸놓고 죽은 걸 보면 누구라도 알 수 있지. 게다가 번가 놈의

 여자 밝힘증은 청난성 내에선 모르는 사람이 없어. 또 다른 것은?"

 중년 사내는 약간 무안해졌는지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말을 이었다.

 "또 한가지 사실은 흉수는 엄청나게 몸이 재빠르다는 것입니다. 번청장은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죽으셨습니다."

 "번가 놈처럼 둔한 놈이라면 눈치 못챈 것도 당연해. 다른 것은 없나?"

 중년 사내가 계속되는 승상 각하의 질타에 당하는 것이 안쓰러웠는지,

 옆에 있던 젊은 청년이 그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귓속말로 뭐라 소근거렸다.

 그러자 그 즉시 중년 사내의 얼굴은 환해졌다. 아마도 이번 얘기는 좀 다를

 것입니다, 승상 나으리.

 "이건 정말 흥미있는 사실입니다. 흉수는 아마도 니더우드 출신일 거라는

 겁니다."

 "그런가…. 이유는?"

 돌아온 짧은 대답에 적지 않은 실망을 한 중년 사내는 입 속으로 뭐라

 중얼거린 후, 승상의 질문에 대답했다.

 "니더우드 특유의 사형 방식으로 죽어있기 때문입니다. 그 뭐라더라?

 아, 그래, 테페. 나도 알고 있었다, 그러니 함부로 말막지 마.

 테페란 꼬챙이를 사람의 항문에 끼운 후, 하늘을 향하게 세워

 천천히 죽이는 사형 방식입니다. 대개 극악 범죄를 저지른 자나

 반역자인 경우 그 형벌에 처하죠."

 "그런데 그 니더우드의 우습지도 않은 형벌과 번청장의 죽음과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이지?"

 "그것은…아, 저…알고 있어! 그러니 나서지 말라고 했다! 죄송합니다.

 니더우드는 예전부터 퀘타라스와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수차례 싸워왔습니다.

 그 때 전쟁터에서 포로로 잡은 퀘타라스 병사들을 모조리 테페에 처해서

 퀘타라스 군이 쳐들어오는 길목에 세워 놓은 적이 있지요. 한마디로 자신들에게

 도전하는 이들에 대한 경고라고 보면 될 것입니다. 아니면 그 반대인

 도전장이던가."

 승상이란 불린 노인의 고개가 끄덕였다. 수긍의 빛이 역력했다. 노인의 눈이

 한사람 건너 서있는 고리눈의 사내에게로 향하자, 그 사내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노인이 생각하고 있는 바를 말했다.

 "그래서 곽우량 역시 그런 식으로 죽었군요, 승상 각하."

 "그래…좋은 도전이로군, 그래…."

 노인의 회색빛 눈동자가 번뜩이며 괴광을 토해냈다. 중년 사내는 그런 승상

 각하의 심중을 몰라 불안스럽게 서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들 주위에는 아까의

 수상스런 바람이 맴돌고 있었다.

 ※     ※     ※

 헌은 타타르 특유의 알싸한 '마오츠'를 마시며, 완전히 노랫소리에 빠져든

 시리아스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발갛게 달아오른 볼, 꿈꾸는 듯 반쯤 감긴

 눈동자, 그리고 수금(手琴)의 음률에 따라 식탁 위를 춤추는 손가락. 

 이것들은 모두 그와는 거리가 먼 것들이었다. 게다가 노래를 부르고 있는

 사내의 모습은 노래 가락처럼 우아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의 차림새는

 하는 일없이 돌아다니는 건달의 모습, 바로 그것이었다.

 깎다 만 듯한 수염으로 뒤덮인 턱, 아무렇게나 잘라 목덜미를 덮고 있는

 머리칼은 이마를 가려 눈을 찌르지는 않을지 의심을 불러왔으며, 입고 있는

 옷도 헌옷 가게에서 훔쳐온 듯한 인상을 주고 있었다. 특히 그렇지 않아도

 허름한 옷을 대강 둘러 허리춤에 꽂은 모습은 더욱 그런 인상을 배가시켜 주었다.

 그러나 헌은 사내의 반쯤 잠긴 눈을 놓치지 않았다. 깊고 고요한 눈이었다.

 그리고 때로는 매처럼 사나운 빛을 내뿜고 있었다. 이런 종류의 눈을 가진

 이들은 흔치 않다. 아마도 눈빛에 나타난 만큼, 또는 그 이상의 실력을 갖춘

 무사일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음유시인, 이쪽 테이블로도 와줘요."

 막 노래를 끝내고 박수 갈채를 받으며 자신의 모자를 돌리고 있는 음유시인을

 향해, 헌은 손을 크게 휘저어 그를 불렀다. 시리아스는 그 소리에 놀라 그런

 헌의 눈동자를 유심히 살펴보았으나, 유감스럽게도 그녀가 바라는 종류의

 눈빛은 찾아볼 수 없었다.

 시리아스의 소리없는 한숨과는 상관없이, 큰 걸음으로 성큼 다가온 음유시인은

 헌이 권하는 의자에 앉으며 인사를 해보이고 있었다.

 "솔리아드 레넬이 이 몸을 불러주신 여러분께 올림푸스의 아폴론과 수메루의

 사라스와티와, 마지막으로 텡구르의 마야스 할라의 축복이 내리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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