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사내의 손이 부드럽게 수금의 현을 휘감았다.
그와 동시에 음색이 차차 잦아들며 노래가 마무리되었다.
분명히 음이 끝났음에도 아직까지 사내의 목소리는
'파라(가운데 화덕이 있는 타타르 특유의 주점. 작가주)' 안을 맴돌고 있었다.
헌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 노래 가락에
말려 든 것이다.
수련이 부족한 것일까. 헌은 스스로에게 물음을 던져보며,
자신의 옆에 앉아있을 시리아스에게 눈을 돌렸다.
그녀의 경우는 정도가 심했다. 완전히 사내의 노래에 동화되어 아직까지
눈동자가 젖어 있었다. 파라 안의 다른 이들도 사내의 노래 가락에 빠져들어
있기는 했지만, 시리아스만큼 심하지는 않았다. 아마도 그건 그녀가 엘프이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자연과의 조화를 중요시하는 숲의 종족 엘프. 그것은 고귀한 고대의 종
하이엘프에서부터, 시간의 금기를 어긴 쉐도우 엘프에 이르기까지 공통된
특징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리고 비록 자신이 태어난 숲을 태워버린
블러드 엘프라 하더라도 '조화'라는 그들 종족의 특징은 변함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저건 조화(造化)가 아니라 동화(同化)라고 해야 맞을 것 같군.'
헌은 한 손을 들어 시리아스의 어깨에 올려놓음으로 해서 그녀를 돌아오게
한 후, 안광을 갈무리하면서 자기 앞에 앉아 웃음을 지어 보이고 있는
음유시인을 쳐다보았다.
천천히 헌의 입이 미소를 띄어갔다.
"정말 노래를 잘 하시는군요. 아, 일단 사례는 해야죠?"
"별 말씀을. 어이구, 이렇게나 많이 주시는 겁니까? 감사합니다."
사내는 허리를 굽혀 감사를 표한 후, 헌이 내밀은 금 한냥을 받아 자신의
허리춤에 매달린 주머니에 챙겨 넣었다. 그때 헌의 손이 주머니의 입구를
묶고 있는 사내의 손위에 살짝 닿았다.
이내 손바닥이 뒤집히며 자신의 손아귀를 장악한 헌의 손가락을 밀어내고
있었다. 전혀 군더더기가 없는 깔끔한 동작이다.
헌은 한번 더 시험해보기로 했다. 즉 손을 거두어들이는 대신 자신의 발을
들어 사내의 낭심을 겨누어 본 것이다. 확실한 살수였다.
사내의 눈이 빛나더니 약간 어색하게 수금의 현을 하나 퉁겼다.
띵∼! 순간 헌은 자신의 무릎으로 서늘한 기운이 짖쳐 들어오는 것을
느끼며 공격을 거두어 들여야 했다.
다시 원상태로 되돌아간 둘은 아무 말도 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사내는 미소를 띈 채로, 헌은 아무 표정도 없는 채로. 잠시나마 흐른
어색한 침묵을 깬 것은 붉은 머리카락의 시리아스였다.
"정말 아름다운 노래였어요, 솔리아드."
"불의 세례를 받은 아가씨에게서 그런 칭찬을 들으니 몸이 떨려오는군요."
사내, 솔리아드는 한번밖에 말하지 않은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
블러드 엘프에게 감탄을 표하며 수금을 갈무리해 상자에 넣었다.
확실히 자신을 부른 저들은 괴이한 커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 감정도 없는 보라빛 눈으로 자신에게 살수를 두 번이나 펼친
소년에게선 피냄새가 짙게 풍기고 있었고, 그 옆에 있는 붉은 머리칼의 엘프는
반대로 완전히 자신의 노래에 빠져들어 자아를 잃어버리는 경지까지 이르렀다.
그렇게 그들에 대한 나름대로의 평가를 내린 솔리아드는, 자신에게 매서운
질문을 던지는 소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음공을 익히셨군요, 솔리아드 씨. 오랜 여행을 하셨나본데요?"
"좋을도록 생각하시오. 그런데 그쪽 분들의 이름은 어떻게 되십니까?"
헌은 씨익 웃었다. 역시 중년의 연륜이 보이는 화법이다.
저런 식으로 부드럽게 상대의 말을 받아넘기는 것은 아직 나이 어린
자신으로서는 흉내낼 수 없는 것이다. 헌은 한 손을 들어 눈앞에 늘어진
보라빛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입을 열었다.
"제 이름은 선우 헌, 선우 헌입니다. 그리고 이쪽은 시리아스 뮤프넬,
말씀하셨듯이 불의 세례를 받은 엘프죠."
※ ※ ※
쿠리안과 퀘타라스의 접경 지역인 에페르타 산맥. 그곳의 험한 산줄기를
로브를 걸치고 걷고 있는 이가 있었다. 갑자기 한줄기 바람이 불어오더니
그의 머리 주위를 한바퀴 휘감았다. 순간적으로 로브의 한쪽 끝이 펄럭이더니
은색의 머리칼과 검은 피부가 드러났다. 뾰족한 귀로 보아 쉐도우 엘프일 것이다.
쉐도우 엘프는 손을 쳐들어 로브를 다시 고쳐 쓴 다음, 자신의 귓가를 맴도는
바람에 신경을 기울였다. 한참을 그렇게 서있던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의 걸음은 산맥 중턱을 향하고 있었다.
실프를 이용하는지 굉장히 빠른 걸음으로 올라가는 그의 앞에,
어둑하니 입을 벌리고 있는 동굴이 나타났다. 길에서 약간 벗어난
절벽 한쪽에 자리잡은 동굴이었다. 동굴 앞은 퀘타라스에서 제일 큰
기사 수련원이 두세개 들어가도 남을 정도로 컸다.
동굴 입구도 만만치 않았다. 오우거 네 마리가 탑을 쌓고 들어가도
이마를 부딪히지 않고 통과할 수 있을 정도의 넓이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웬만한 이라면 이같은 무지막지한 크기에 질려버리겠지만, 1500년의 긴 수명을
가진 쉐도우 엘프답게 그는 성큼 발을 동굴 안으로 들여놓았다. 동시에 묵직한
소리가 동굴 안에서 흘러나왔다.
"키란이군. 부탁한 일은?"
"잘 되었습니다."
쉐도우 엘프 키란은 로브를 벗어 팔에 걸치며 아까 자신의 머리 주위를 휘감던
바람을 다시 불러내었다. 웅웅 거리는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이내 식별할 수
있는 말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승상 어른.'
'자네 생각은 어떤가.'
'제 생각엔 이건 니더우드의 솜씨가 아닙니다. 비록 니더우드의 히샤신 흉내를
내려고 애썼지만, 군데군데 발끝으로 찍어 찬 상처가 시체에 남아있었습니다.'
'그래, 그건 아마 퀘타라스의 수도 노엘에서 기사들에게 가르치는
격투기술일테지.'
'맞습니다. 사바테라고 하더군요.'
'그건 중요한 것이 아니야. 어찌되었건 간에 흉수는 니더우드의 히샤신을
가장한 퀘타라스 암살자란 얘기가 되는군.'
'확실히 근래 들어서 퀘타라스와 니더우드 사이의 관계가 다시 악화되긴
했습니다만.'
'전쟁은 어떤 식으로든 이익과 손해를 같이 안겨다 주는 법이지.'
키란은 살짝 손짓을 해서 아까부터 자신의 곁에 묶어두고 있던 실프를
보내 주고는 동굴 안쪽을 응시했다. 황금빛이 찬란하게 빛난다 싶더니만,
동굴 안으로부터 남루한 옷차림의 사내가 걸어왔다. 여기저기 먼지가 묻어있는
로브와 손에 들고 있는 지팡이로 보아 수련 중인 은둔자일 가능성이 컸다.
탁-! 키란의 앞에서 걸음을 멈춘 사내는 손을 내밀어 키란에게 무엇인가를
건네주었고, 키란은 그것이 하나의 반지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것이 요마의 반지 기네킨…. 확실히 전해져 오는 요기의 차원이 다르군요."
"그럴 것이다. 그런데 쉐도우 엘프 키란, 이 반지를 무엇에 쓰려 하는거지?
수명이 천오백년인 너희로써는 그 반지가 없어도 500년만 기다리면 충분한
요력을 얻을 수 있을텐데."
키란은 쓴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앞에 서있는 사내를 쳐다보았다.
역시 저들은 자신들을 모르고 있다. 어찌 보면 둘 다 마족이라 할 수 있겠지만….
이것이 신에 버금가는 힘을 지닌 존재와 시간의 금기를 어긴 존재의 차이일까.
그리고 키란은 자신의 손가락에 끼어진 반지를 보았다. 뿔달린 눈셋의 해골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로드께서는 알 수 없을 겁니다, 저희들이 어떤 삶을 살아가는지.
그 끔찍한 형벌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전 이 반지를 이용할 생각입니다."
"그런가. 성공하길 비네."
그 말을 끝으로 사내는 다시 동굴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확실히 휴면기로군. 행동도 느린데다 오래 동안 저 모습으로 있을 수도 없겠지.
키란은 피식 웃으며 동굴을 빠져 나왔다. 눈앞으로 쿠리안에 뿌리내린 에페르타
산맥의 허리가 보였다.
+ + +
이번 장을 쓸 때 읽었던 책이 바로 이인화 씨의 '초원의 향기'였습니다.
고구려 멸망 후 발해의 건국에 이르기 까지 이어지는 해동의 혼이
실재 불려지는 유목민들의 노래와 더불어 훈훈하게 다가오던 작품이었죠.
북녘을 다스리는 검은 물의 가라한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