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그랬군. 그래서 이 타타르로 들어왔다라…. 참으로 오랜만에 쓸만한 노래
소재를 건졌는걸?"
헌은 예의 공허한 눈동자로 자신의 앞에 앉아 어느새 말을 트고는,
킬킬대며 마오츠를 들이키고 있는 사내의 수염을 바라보았다.
아니, 정확하게는 사내의 수염 주위에 묻어나는 방울의 수를 세어보고 있었다.
저렇게 대강 깎은 수염은 아무리 조심해서 음식을 먹거나 마신다 해도 뭐가
묻어나기 마련이다. 특히 술같은 액체의 경우는 그 정도가 심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내의 수염에 묻어있는 방울의 수는 모두 합해 10개를
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헌은 섣불리 캐묻는 대신, 멋적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솔리아드의
장난끼 섞인 말에 답했다.
"그렇게 떠벌리고 다닐 만한 일은 못됩니다. 노래로 만든다니 그런…."
"음? 그게 진심일까? 인간은 모두 다 자신이 중요하게 여겨지길 바라지.
직접 자신이 중요한 존재라고 떠벌리는 것이, 남의 눈에 안 좋게 보일 것
같으니까, 아니, 그보다는 그런 식으로 떠벌리다가 몰매 맞을까봐 그걸
은근슬쩍 뒤로 돌려 표현하곤 하지."
솔리아드는 입술을 양옆으로 한껏 잡아당기며 어울리지 않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게 어떤 인간한테든 해당되는 공통점이라네, 인간같지 않은 소년."
"그건 무슨 뜻이죠, 솔리아드?"
헌은 약간 눈썹을 치켜올려 화가 났음을 표시해 보이며 몸을 뒤로 기울였다.
늑대 가죽 뒤로 딱딱한 나무판이 느껴졌다. 그러나 솔리아드의 다음 말은
헌의 맞은 편에 앉아 아까부터 둘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시리아스의
몸을 떨게 하기에 충분했다.
"자네는 나처럼 인간이면서도 인간이 아닌 존재, 감정의 동물인 인간이면서
감정을 갖고 있지 않는 존재이지. 어쩌면 감정이란 놈이 깊숙한 곳 어디론가
숨어버려 찾아낼 수 없게 되어버렸던가. 하지만 계속 그렇게 지내다간 언젠간
무너진다는 사실을 기억해둬. 자네는 나처럼 영원히 시간의 바퀴를 굴리는 자가
아니니까."
※ ※ ※
파오 안은 조용해진지 오래였다. 주인 역시 자러 들어가 버리고, 중심의 화덕
또한 졸려하며 꺼져가려 하고 있었다. 헌은 그 화덕 안에 잔가지 몇 개를 던져
넣었고, 그러자 졸던 불길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 때를 놓치지 않고 소년은 파오 한 구석의 땔감 더미를 끌러 불을 한층
돋구었다. 사내, 솔리아드는 그 불가에 앉아 조용조용한 음조를 흥얼거리고
있었고, 시리아스는 불길의 정 가운데를 바라보며 불의 정령력으로 호흡하기
시작했다.
헌의 눈은 그들 중에서도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는 사내에게 향해있었다.
사내는 방금 자신의 나이를 500년이 넘게 살아왔다 라는 말로 대신 소개했다.
자신도 어느 정도 예측은 하고 있었지만, 실재하는 것을 보기는 처음이다.
인간과 완전히 똑같은 형체를 지녔으나, 생식 능력이 없으며 결코 늙어 죽는
법이 없는 불노불사의 종족, 하이랜더. 솔리아드는 자신이 하이랜더의
종족이라고 소개했다. 그것도 아무렇지도 않다는 얼굴로 직접 초신술
(신을 불러 자신의 몸에 강림시켜 신능을 발휘하는 마법. 엄청난 생명력이
요구된다. 작가주)까지 펼쳐 보이면서 말이다.
헌은 다시 한번 그 사내의 얼굴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그 어디서도 세월의
고통을 짊어지고 온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것은 그 옆에서 턱을 괴고
사내의 노래가락에 빠져들은 블러드 엘프에게서도 마찬가지였다.
사랑으로 인한 괴로움은 볼 수 있었지만, 그 어디서도 긴 세월의 무게에 억눌린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영원까지는 아니더라도 일단 300년의 수명을 보장받은
숲의 종족….
'나같이 수명이 정해진 자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것이겠지. 그와 같은 상태가
되지 않으면 절대 알 수 없는…….'
거기까지 생각하던 헌은 피식 웃었다. 그런 감상적인 생각은 자신에게는 결코
어울리지 않는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결코 감정에 휘말리지 말 것.
그것은 자신이 세 살 되던 해에 망나니가 되어버린 아버지가,
그 망가진 인생으로 보여준 단 하나의 교훈이었다.
다시금 냉랭한 표정으로 돌아간 헌은 결코 끝나지 않을 솔리아드 레넬의 노래에
귀를 기울였다. 가끔은, 아주 가끔은 휴식을 취해 긴장을 풀어주는 것도 도움이
되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소년은 눈을 감고 벽에 등을 기대었다.
얼굴도, 이름도 생각나지 않는 어머니의 품이 떠올랐으나, 소년은 급히 고개를
가로저어 그것을 부정하고는, 손가락으로 바닥을 가볍게 두드리며 음유 시인의
음공에 대항해보기 시작했다.
※ ※ ※
시리아스는 자신의 귓가로 부드럽게 늘어진 머리칼을 만져보며,
그 사이로 춤추듯 헤집고 들어오는 음유시인 솔리아드 레넬의 노래를
음미해보았다.
들으면 들을수록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노래, 그렇게 시리아스는 잠정적으로
결론을 내렸다. 명랑한 어조를 띄면서도 그 안쪽 깊숙한 곳에 반복된 사랑과
이별의 아픔이 잔잔하게 깔려있었다.
확실히 다르다. 자신의 앞에 앉은 사람은 자신보다도 더 오래 살았으며,
자신이 죽은 뒤에도 계속해서 이 세상 끝날 때까지 살아갈 존재.
그런 존재의 내부에 숨겨진 상처는 어떤 것일까.
과연 내가 감당할만한 크기일까.
약간 몽롱해진 붉은 색 눈동자를 감으며, 시리아스는 사내의 음률 깊숙한 곳에
담겨져 있는 애조어린 곡조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그의 아픔에 자신의
고통을 '조화'시켜보기 시작했다.
막 두 개의 파장이 일치가 되려는 순간이었다. 어디선가 불청객이 찾아들었다.
미미한 소리였기는 했지만, 분명 솔리아드의 음률 틈새를 파고드는 소리였다.
시리아스의 고통은 결국 사내의 아픔과 조화를 이루지 못한 채 그녀의 현실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그녀는 눈을 떴다. 손가락으로 책상을 가볍게 두들기는 것으로
솔리아드의 음률의 헤집어 놓은 자는 바로 그녀 앞에 앉아 약간 애조 띈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확실히 저 얼굴에는 변화가 없었다. 심지어는 아무 것도 담고 있지 않은
그 눈동자까지도 말이다. 그 눈동자가 시리아스에게는 가장 걸리는 부분이었다.
해동에서 만났던 아사라는 소녀도, 그리고 지금 만난 저 음유 시인도 같은
말을 했다.
'아무 것도 담고 있지 않기 때문에 언젠간 무너지고 말 것이다…라고 말했지.
그 때가 당장이라도 찾아올까 나는 두려워…….'
여인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 걱정스러운 얼굴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며 불을 돋구는 헌을 향해 애써 미소를 지어 보내주었다.
※ ※ ※
솔리아드는 목을 한껏 뒤로 젖혀서는 잔 속에 남은 술을 남김없이 들이켰다.
꿀꺽 하는 긴 소리와 함께 술은 그의 목구멍을 타고 내려갔다. 미끈한 액체가
목구멍을 타고 내려감과 동시에 그의 목줄기는 부르르 떨렸다.
'바보같이……. 아직도 미련을 못버린 것인가, 벌써 500년이 넘게 살아왔음에도?
아니, 난 내 힘이 사악한 동족에게 돌아갈 것이 두려운 거다….'
사내는 멋적은 미소를 얼굴에 떠올리며 목의 힘을 천천히 빼었다.
이 목 또한 그가 몇백년에 걸쳐 단련시켜놓은 것이었다.
하이랜더의 유일한 약점이라 말할 수 있는 목. 보통의 하이랜더들은 심장과
목이 분리되면 죽는다. 그리고 죽인 자가 같은 동족일 경우 죽은 자의 힘과
기술은 죽인 자에게 흡수되고, 그럼 그 자는 새로운 힘과 기술을 익혀
또 있을 동족들간의 전투에서 우세를 점할 수 있는 것이다.
솔리아드의 입에서 새어나오는 곡조가 갑자기 구슬픈 음조를 확실히 띄기
시작했다. 그런 식으로까지 싸워가면서 우리들은 살아가야 하는가. 누구도
사랑할 수 없고, 누구한테도 사랑받을 수 없는 종족 하이랜더. 왜 신은
자기네들을 만들었는가.
솔리아드는 가볍게 손가락 끝을 퉁겼다. 다시 곡조는 유쾌한 빛을 띄어갔다.
바다에서 뛰노는 돌고래 마냥, 음들이 겉으로 뛰어올랐다가 다시 가라앉고를
반복했다.
그의 거친 턱이 조심스레 움직이며 희미한 미소를 만들어내었다. 이제 멀지않아
그는 자신의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존재에게 한층 가까이 다가서게 되리라.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지금 자신 앞에 앉아 대조적인 행동을 보여주고 있는
두 남녀들을 도와주어야 할 것이다. 신은 마음이 착한 자에게 후한 인심을
베푸는 법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