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달의 의자가 치올의 머리를 노렸다. 발이 잽싼 치올은 금새 달로부터 벗어나더니
오히려 몽구르의 머리를 향하고 있었다. 이러다간 몽구르의 활이 치올의 옷깃을
꿰매기 전에 치올의 단도가 먼저 몽구르의 목을 딸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곧 스텐('서녘 하늘', '서쪽'이란 뜻의 타타르 어. 작가 주)에서 반격이
왔다. 최강의 전사라 할 수 있는 푸른 늑대를 하얀 사슴 옆에 배치함으로써
몽구르의 위치를 보강함과 동시에 치올의 등을 빼앗은 것이다.
듕텐('동녘 하늘', '동쪽'이란 뜻의 타타르 어. 작가 주)이 잠시 머뭇거리더니
투르긴이 사슴 옆으로 다가섰다. 상당한 무리수다.
투르긴은 우물이다. 우물은 한번에 먼 장소로 이동할 순 있지만,
짧은 거리를 자주 이동할 수는 없다.(거센 모래 바람이 부는 이곳이라면
바람에 의해 우물이 옮겨지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그런데도 듕텐을 잡고 있는 소년은 굳이 투르긴을 움직여 푸른 늑대의 갈 길을
봉쇄해 버렸다. 한번 움직이면 세번은 못 움직이는 투르긴을 움직여서 말이다.
솔리아드는 한참 생각을 하고 나서 가장 위력이 없는 양을 움직여 늑대의
옆구리를 보강했다. 별로 의미가 없어 보이는 수 같지만, 듕텐은 지금 사냥꾼도,
도적도, 그리고 늑대도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솔리아드는 씨익- 웃었다. 아니, 웃으려 했다. 그러나 듕텐에서
난데없이 말이 달려나오더니 도적의 머리를 뛰어넘어 사냥꾼을 밟아버리고는
늑대와 양 사이에 끼어 들었다. 자칫하다가는 우물에 늑대고 양이고 다 빠져버릴
것이다.
솔리아드는 눈썹을 찌푸리며 판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스텐의 사냥꾼은
이미 듕텐의 말에게 짓밟혀 죽었고, 늑대와 양은 우물 주변에서만 맴돌게
되었다. 그리고 달의 뒤로 돌아와 있는 듕텐의 하얀 사슴….
스텐에서 해가 움직였으나, 평상시의 위력을 발휘하지 못한 채 결국 달과
늑대를 내주고 말았다. 그 여세를 몰아 듕텐의 하얀 사슴이 그 멋들어진 뿔로
달의 심장을 꿰뚫었다. 볼 것도 없는 새벽의 승리다.
예정대로 달은 휘두르에서 물러나고, 새벽이 비어버린 달의 의자에 앉게 된다.
태초부터 그래왔던 것처럼 말이다. 결국에는 모든 것은 예정대로…….
솔리아드는 툴툴거리며 자신의 앞에 앉아있는 스텐의 소년을 바라보았다.
정말이지 볼 때마다 이상하게 생각될 정도로 공허한 눈동자다. 보라빛 안광이
파라 안의 불빛을 받아 괴기하게 빛나고 있었다.
다음 순간 음유시인은 어깨를 으쓱이며 졌다는 투의 몸짓을 해보였다.
"아, 정말이지 할 맛이 안 생기는군. 이거야 원, 한번 쓱 본 것만으로도
이 나를 이겨 버리다니. 좋아, 그럼 약속대로 점을 쳐보기로 할까?"
"그렇게 서두를 것은 없습니다만."
"빚은 빨리 갚아버리고 잊어버리는 것을 신조로 하고 있거든."
그렇게 말하면서 솔리아드는 자신의 주머니 속에 넣어두었던 타로트 카드를
꺼내어 교묘하게 배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블러드 엘프의 붉은 눈동자와
망나니 소년의 기괴한 보라빛 안광을 받으며 천천히 카드를 섞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속으로 한번 툴툴대는 것을 잊어먹지 않았다.
'제길, 이럴줄 알았으면 내기같은 것은 안하는 건데….'
※ ※ ※
레일리스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달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즐거운 꿈을 볼 수
있게 해주는 달이다. 약간 휘어져 마치 소의 뿔마냥 되어있는 저 그믐달은
인간의 마음을 헐겁게 하는데 효과가 좋다.
물론 엘프나 드워프 따위의 데미 휴먼들도 꿈을 꾸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 꿈의 범위가 한정되어 있고, 게다가 레일리스로는 드워프같이 못생긴 종족의
정액을 받을 마음이 전혀 생기지 않았다.
레일리스의 다리가 멋들어지게 뻗었다. 하얀 나체가 어스름한 달빛을 받아
묘하게 빛나고 있었다. 정말 좋은 밤이다. 확실히 자신같은 어둠의 종족에게
어울리는 빛이라고, 그렇게 레일리스는 생각했다.
그때 자신이 막 정기를 빨아간 쉐도우 엘프의 몸에서 지잉-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그 소리의 근원을 살펴보았다.
이상하게 생긴 반지였다. 눈이 세 개가 나있는 해골, 그리고 그 머리에
나와있는 마왕의 뿔이 하늘을 향해 서있었다. 레일리스로 하여금 자신이
이미 정기를 빼앗은 시체에게 다시 눈을 돌리게 한, 그 이상한 소리를 낸 것은
바로 이 반지였다.
레일리스는 그것을 들어올렸다. 그러나 허리를 굽혀 손으로 집어 든 것은
아니다. 그녀는 그저 생각만으로 그것을 들어올렸다. 그녀 자신도 알다시피
그녀는 결코 실체화할 수 없는, 꿈속에서밖에 존재할 수 없는 서큐부스이므로.
※ ※ ※
확실히 야릇한 반지다. 어둠의 존재인 자신이 위축될 정도로 엄청난 요기를
내뿜어 내고 있었다. 도대체 이 쉐도우 엘프는 어디서 이런 물건을 구했을까.
레일리스는 기억을 되살려 보았다. 이 이상한 반지에 대해서는 릴리스 님에게서
들은 적이 있다. 요마의 반지, 기네킨. 기억이 맞다면 이 물건은 그 이름이
맞을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이것을 이 쉐도우 엘프가?
레일리스의 고개가 갸웃거렸다. 처음엔 남자인줄 알고, 그가 주문을 외우는
사이에 유혹의 술을 걸었다. 그러나 그의 정신으로 침입하고서야 알았다.
그녀가 잡은 사냥감은 쉐도우 엘프, 그것도 남녀추니(양성을 가리키는 말.
작가주)였던 키란 카둔의 전생체다. 레일리스가 릴리스 님으로부터 이름을 받고
독립한지 100여년 밖에 안되었지만, 그래도 쉐도우 엘프들에 대해서는 여러번
들어 잘 알고 있다.
딸에 대한 부모의 지나친 사랑으로 딸에게 금기의 술법을 건 니드 카둔,
그런 아버지를 이성으로써 사랑해버린 딸, 뮤 카둔.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세명의 아이들이 바로 남녀추니의 키란,
유아 형태의 페린, 가장 아름다우며 또 가장 그림자에 가깝다는 메가엘라.
하늘도 허락하지 않은 사랑을 해서인지 니드와 뮤 사이의 아이들은 모두
비정상이었지만, 그래도 뮤는 행복했을 것이다. 그녀의 아버지이자 애인인
니드가 자신의 병을 고칠 약을 찾다가 엘프의 화살에 맞아 죽기 전까지는….
아마 이 키란의 전생체는 1500년마다 되풀이되는 이 지긋지긋한 전생의 고리가
지겨워져 기네킨을 이용해 그 고리를 끊고자 했겠지. 하지만 그건 소용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당시 니드가 자신의 딸에게 건, 그리고 뮤가 자신의 애인과 그 아이들에게 건
'시간 역행의 마법'은 각각 500명이나 되는 다크 엘프와 하이 엘프들을 제물로
바치고 얻어낸 것, 그렇게 간단히 깨지는 것이 아니다.
아마 자신이 정기를 다 빨아버린 이 키란의 전생체도, 시간이 지나면 그 몸에
걸려 있는 주문에 의해 자신이 정기를 빨아버리기 이전의 시간으로 돌아갈 테지.
그리고 또다시 1500년 동안 이미 오래 전에 지쳐버렸을 전생의 여행을 해야할
것이다.
레일리스는 흥미를 잃어버렸는지, 기네킨을 쓰러져 있는 키란의 몸 위로
던져버리고는 서서히 날아올라 밤의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멀리서 자신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냄새가 나고 있었다, 소년의 냄새가.
#6.
사내의 재빠른 손놀림에 의해 카드가 뒤섞이기 시작했다. 곧 그 카드 뭉치들은
옆에 앉아있는 여인에게로 넘겨졌고, 그녀의 손에 의해 일부분이 들어올려졌다.
사내의 눈이 번쩍이더니 골라진 카드 뭉치들에서 또다시 일곱장을 뽑아내었다.
일곱장의 카드는 기묘한 모양으로 배열되었다. 처음 세장은 세로로 일렬
배열되었고, 한 장은 옆으로 뉘어진 채 처음 세장 중 가운데 장에 엇갈려
놓여졌다. 그리고 그 좌우에 다음 두장이 놓였다.
이제 여섯장의 카드가 십자가 모양으로 배열되었다. 남은 한 장은 십자가의
가로대 옆에 좀 떨어진 곳에 놓여졌다. 배열을 마치자 사내, 솔리아드는 두손을
비비면서 쾌할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 슬슬 시작해볼까? 우선, 아가씨가 직접 한 장을 뒤집어주시겠소?
가장 오른쪽 끝에 놓인 카드로 말이오."
그 말에 따라 붉은 머리칼의 시리아스는 그 가는 손가락을 뻗어 솔리아드가
말한 카드를 뒤집었다. 나타난 그림은 뒤집혀진 수레바퀴였다. 그것을 본
솔리아드의 눈이 찌푸려졌다.
"좋지 않은데…좋지 않아……. 아가씨, 가로로 배열된 세장도 뒤집어 보시오."
"뭐가 안 좋다는 겁니까, 솔리아드?"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조용히 술잔을 기울이던 선우 헌의 머리가 들렸다.
그 착 가라앉은 눈동자가 자신을 쳐다보았지만, 솔리아드는 별 신경쓰지 않고
그저 어깨를 들썩일 뿐이었다.
"점의 결과는 땅의 선이 뒤집힌 후에나 말할 수 있는 것, 함부로 말할게 못 돼.
그건 그렇고 자네는 정말 점을 안칠 생각인가? 원래 이 공짜 카드점은 자네가
나한테서 따낸 것이잖아?"
"후훗, 전 제 운명을 미리볼 생각은 없어요. 남의 운명을 보는 것엔 흥미가
있지만. 그건 그렇고 이거 놀라운데요? 솔리아드 당신은 도대체 갖고 있는
직업이 몇 개나 되는 겁니까?"
솔리아드는 피식 웃었다.
"말했잖아? 난 신비주의자라고. 난 별을 보며 길을 되짚는 점성술사이며,
흙과 불을 가지고 금을 만들어내는 연금술사이고, 기이한 문명들에 홀려버리는
여행광이기도 하거니와, 마지막으론 신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광신도야."
"잘 알겠어요. 오래 살다보면 별의 별 직업들을 다 접하나보군요. 그런데 점을
치는 도중에 말이 너무 샌 것 아닙니까?"
"말하지 않아도 잘 알고있어…."
솔리아드는 퉁명스레 말을 받으며 시리아스가 뒤집어놓은 세 장의 카드를
보았다. 그리고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그 카드들은 각각 뒤집혀진 연인,
무너지는 탑, 그리고 낫을 든 사신이었다.
솔리아드는 조심스레 자기 옆에 앉은 블러드 엘프의 눈을 바라보았다.
"우선 맨처음 아가씨가 뒤집은 카드는 지금 치는 이 점이 아가씨의 미래와
얼마나 부합되는지를 보는 것이오. 그런데 뒤집혀진 수레바퀴는 잔인할 정도로
어긋난 운명의 질주를 뜻하지. 아마 지금 치는 이 점은 아가씨의 미래와 치떨릴
정도로 맞아 들어갈 것이오. 그래도 그 결과를 알고 싶소?"
시리아스는 웃었다. 웃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어차피 점이란 것은 미래를
훔쳐보기 위해 있는 것이다. 그 결과를 두려워하여 보지 않는다면 점을 칠
필요가 없다. 하긴 그녀의 경우는 점을 별로 신용하지 않는 엘프였고,
또 자신의 의사가 아니라 저 소년이 원해서 점을 친 것이니까.
그리고 시리아스는 입을 열었다.
"말해주세요."
※ ※ ※
레일리스는 자기의 마음을 설레게 했던 냄새의 주인을 찾았다.
보라빛이 도는 머리칼의 소년이었다. 서큐부스인 자신이 보아도
시샘이 날 만큼 예쁘장한 얼굴을 한, 그러나 칙칙하게 가라앉은
눈동자로 인해 그런 얼굴이 모두 죽어있는 소년이었다.
공중에 몸을 띄운 채로 레일리스는 다시 한번 소년의 몸에서 나는 채취를
맡아보기 시작했다. 풋풋한 땀냄새와 더불어 알 수 없는 회색빛 기운이
밀려들어왔다. 그리고 그녀는 그 냄새를 가슴 속 깊숙이 들이마셨다.
흐흥- 그녀의 콧소리에 웃음이 배어 나왔다. 아무 감정도 담겨 있지 않은,
아니 그보다는 아무 감정도 갖지 않으려 애쓰는 소년의 마음이 미약하게나마
자신에게 전해진 것이다.
저렇게 감정을 억제하고 있는 이들일수록 공략이 쉬운 법이다. 사랑의 환상에
빠져 있지도 않은 연인의 이름을 불러대며 자신이 제공하는 쾌락의 계단을
올라가는 이들 중에는, 항상 고결한 척 하며 감정을 억제하는 성직자들도
다수 끼어있었다.
바로 저 소년이 하는 것처럼 감정을 억제해왔던 그들은 한번 봇물이
터져 나오면 거기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리고 결국 레일리스,
자신의 배 위에 정액을 질펀하게 싸놓은 채로 죽어갔다.
그러면 그녀는 그 정액들을 받아 자신의 아름다움을 배가시키는데
사용하는 것이다.
레일리스는 천천히 자신의 몸에 흐르는 어둠의 마나를 돌려보았다.
자신들의 어머니, 릴리스 님이 부여해주신 그 마나를 남자의 정기를 빨아
더욱 증강시킨다. 그것이 자신들, 서큐부스들이 살아가는 목적.
소년의 정신 속으로 들어가기 전, 레일리스는 다시 한번 그 소년의 공허한
보라빛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안으로 들어섰다.
※ ※ ※
"뒤집혀진 연인, 탑, 그리고 사신.
아마도 아가씨는 사랑에 실패하게 될 꺼요. 그러나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계속 도전하겠지. 하지만 그 결과로 오는 것은 죽음.
이제 하늘의 선에 놓인 카드를 볼까? 이번 것은…흐음, 망나니인가.
아가씨는 사랑하는 사람을 파멸로 이끌게 될꺼요.
그리고 다음 카드는 보나마나…역시, 뒤집혀진 심장이군.
아가씨의 사랑은 고귀하지. 하지만 철저하게 더럽혀질 겁니다."
"……그게 단가요?"
목소리를 깐 채로 어떻게 하면 충격을 덜 주면서 사실을 전달할지를 고민하던
솔리아드는, 그 잔인한 미래에도 아무렇지 않다는 투로 말하는 블러드 엘프에게
속으로 찬사를 보내고 싶었다.
그러나 저 빨간 머리칼의 엘프 아가씨는 자신의 미래를 덤덤히 받아들일수
있을 정도의 수양이 쌓여있어서 그런 행동을 한 것이 아니었다.
단지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다는 데에서 나온 자포자기식 심리일 뿐이다.
그래서 솔리아드는 그녀에게 찬사를 보내지 않았다.
대신 솔리아드는 마지막으로 남은 카드를 뒤집음으로 해서 그녀의 마지막을
보여주고자 했다. 그것이 훨씬 덜 잔인할 것이라 생각하면서.
그러나 뒤집힌 카드의 그림이 나타내는 것은 그런 종류의 것과는
전혀 거리가 먼 것이었다.
"이건 광대의 카드로군…."
"무슨 뜻이죠, 그 카드는."
시리아스는 솔리아드가 뒤집어 놓은 카드의 그림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괴기한 복장을 한 사내가 보따리를 지고 길을 가고 있었다. 보따리 안에
들어있는 것은 무엇일까. 보물이건 재앙이건 둘 중의 어느 것이든 상관없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리고 결과는 그녀가 생각한 것처럼 되었다.
"이 카드의 뜻은 여행, 어리석음, 뜻하지 않은 결과를 의미하죠.
아가씨는 죽음마저도 당신이 사랑하는 그 사람에 의해 좌우되겠군요.
하지만 이게 끝은 아니올시다! 아까 솎아낸 카드 무더기에서 아무거나
한 장만 뽑아보시오."
솔리아드의 쾌활한 듯한 목소리가 시리아스의 귓전을 때렸다.
그리고 그녀는 한 장의 카드를 골랐다. 그 카드는….
"이건 백지잖아요. 잘못 만들어진 카드 아닌가요?"
"아뇨, 아닙니다. 이 카드는 나만의 카드점을 위한 특별 카드요.
이 카드의 이름은 '거울', 그 뜻은 알 수 없는 미래, 불가항력으로
다가오는 운명, 그리고 현재의 모습에 충실할 것을 명하지요."
솔리아드와 시리아스는 그 카드를 유심하게 살펴보았다.
솔리아드는 될 수 있는 한 좋은 해석을 위해서,
시리아스는 야릇한 백지 카드에 대한 관심에서.
그때 파오 한구석에서 무언가가 무너지는 소리가 났다.
솔리아드와 시리아스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여인의 입에서는
마치 찢어지는 듯한 비명소리가 새어나왔다.
"헌!!!"
"이런!"
헌은 자신이 기대고 있었던 파오의 벽에서 미끄러져 땅바닥에 누워있었다.
차분히 감긴 눈과 대조적으로 벌겋게 핏줄이 솟아오른 이마가, 지금 저 소년이
처한 상황을 말해주고 있었다.
솔리아드는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서큐부스로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