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레일리스는 무릎에 얼굴을 묻고 울었다. 계속해서 울었다.
자신의 눈물로 더러워진 육체를 씻기라도 하듯이.
확실하게 그 소년은 자신이 입밖에 낸 말을 지켰다. 그녀는 새벽을 알리는
닭 울음소리가 날 때까지 각종 기묘한 형태로 소년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리고 종종 덮쳐오는 인간이 아닌 짐승의 것들까지도….
레일리스는 오열하다 말고 입술을 꾹 다물었다. 하복부에 전해져 오던 아릿한
통증은 소년이 꿈속에서 자신을 놓아주면서 사라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느낀 굴욕감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레일리스, 그녀는 처녀였다. 어찌 들으면 웃기는 소리일지는 몰라도 그녀,
아니 서큐부스 종족은 누구나 처녀였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들과는 상대되는
잉큐부스들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몽마족들은 자신의 동정을 버릴 필요가 없는 종족이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이 동정을 버리지 않고도 인간이나 유사인간들의 정기를 빨아 마신다는
것에 대해 일종의 자부심까지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데!
그 소년에 의해 레일리스의 동정은 사라졌다. 그것도 생각해낼 수 있는
온갖 비참한 방법으로 말이다.
이런 경우 릴리스 님에게서 들을수 있는 말은 이 말 한마디 뿐이었다.
'그 사내를 파멸시킬 때까지 일족의 일원이 될 수 있는 자격을 박탈하겠다.'
레일리스는 다시금 입술을 앙 다물었다. 그리고 천천히 날개를 펼쳐 밤하늘을
날아가기 시작했다. 자신을 이렇게 만든 소년의 냄새는 거친 모래먼지와 맑은
물소리가 섞여있는 곳에서 풍겨 나오고 있었다.
메마른 대지의 니더우드에서 유일하게 강이 흐르는 곳, 그리고 옆나라
퀘타라스와 바로 맞닿아 있는 곳. 그곳의 이름은 아즈탄이라고 했다.
※ ※ ※
"11년 만인가…. 드디어 돌아왔군, 솔리아드."
"그래, 11년이로군. 하지만 하탄, 자네의 그 끔찍하기 그지없는 정확한 계산은
여전해."
"그런가?"
씨익-! 미소가 두 개의 서로 다른 얼굴 위로 떠오른 것은 거의 동시에 일어났다.
수염이 거칠게 뒤덮인 음유시인은, 자신의 앞에 앉아 언제 봐도 여자 도망가게
만드는 미소를 짓고 있는 자신의 친구, 아즈탄 협곡 용병기지의 대장인 하탄
아베브의 몸을 얼싸안았다.
곧 이어 두 쌍의 손이, 전날 아침에 먹은 것까지 토해내게 할 기세로 서로의
등을 두드려 대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작 서로를 두드리며 동시에 그와 같은
힘을 자신의 등판에 받고 있는 이 둘은 그런 것에 신경쓰지 않았다. 오히려 더
거세게 서로를 두들겨 대며 포옹했다.
한참 후에야 떨어진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보며 큰 소리로 웃어대기 시작했다.
"우하하하! 이 자식, 살아 돌아왔구나!"
"하탄, 자네 역시…."
살아 있어주어 고맙네…. 솔리아드는 자신이 결코 밖에 내서는 안돼는 말을
목구멍 안으로 삼키며 하탄의 손을 잡았다.
하탄, 하탄 아베브. 올해 나이 58세, 열 여섯 살에 처음으로 전장에 서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용병대만을 지휘하며 또 그만큼 용병들을 효율적으로
움직이는 사내, 그리고 그 놀라운 효율성으로 인해 적국 퀘타라스의 진영
내에서도 '샌드런너'란 별명을 얻고 있으며, 42년간의 전장 생활 속에서도
살아남아 온 이.
그 사내는 지금 칼자국과 모래바람에 단련된 얼굴에 한껏 미소를 띄운 채 친구의
손을 잡고 있었다. 삶과 죽음이 한시간만에 오고 가는 전장에서도 띄울 수 있는,
그리고 여태껏 그가 결혼을 하지 못한 이유의 하나가 된 미소를 띄며, 하탄은
입을 열었다.
"건강한가? 아, 건강하겠군. 이거야 워낙 뻔한 질문이니 넘어가기로 하고….
어때, 자네가 데려온 그 이상한 사람들은?"
"음, 막 깨어났더군. 이젠 괜찮은 모양이야."
"스스로 서큐부스를 물리치다니 정말 대단한 소년이군, 그래. 자네 부탁이
없어도 우리 용병대에 넣고 싶은걸?"
"후훗, 그렇게 한다면 감사 대신 사례비를 받아야 겠군."
"쓸 곳도 없는 주제에 돈 밝히는 것은 여전해 가지고…쯧쯧."
혀를 끌끌 차던 하탄은 진지한 얼굴을 하며 여전히 솔리아드의 손을 잡은 채로
물어왔다.
"언제 떠날텐가?"
"글쎄, 우선 그들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떠나야 예의겠지?"
하탄의 얼굴이 침중해졌다.
"바로 떠나려는가? 나와 술 한잔도 하지 않고?"
"그렇게 되었어. 미안하네."
훗-하는 웃음이 하탄에게서 새어나왔다.
"드디어 소원을 이루게 되나 보군 그래…. 축하해야 하나?"
"……그렇게 해주면 고맙겠어."
"그래…."
하탄은 과장된 모습으로 한숨을 푹 내쉬어 보이고는 다시 한번 그의 친구의
몸을 얼싸 안았다. 그리고 한참 동안 놔주지 않고 그의 등을 두들겨 주었다.
한번 가면 다시 오지 않을 사람을 보내는 것처럼….
※ ※ ※
헌은 자신의 보라빛 눈동자를 들어 솔리아드의 수염난 턱을 바라보았다.
아니, 그보다 그 밑에 숨겨진 입술의 움직임을 보았다. 그는 웃고 있었다.
헌은 아무말도 하지 않고 그저 손을 내미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시리아스는 그런 헌의 옆에 앉아, 약간은 슬퍼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솔리아드의 가슴에 손을 올려놓고 숲의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잘 가요, 솔리아드. 숲을 관장하는 신들의 수호가 당신에게 깃들기를…
그리고 당신이 찾는 것을 찾을 수 있기를 빌어요."
"고맙소, 아가씨. 그리고 자네도 잘 있게나."
솔리아드는 그 말을 끝으로 방을 나섰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기 위해 내딛는
그의 발걸음은 무척이나 값있게 보였다.
헌은 나지막히 중얼거렸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라, 자신이 원하는 것….
그리고 그는 고개를 들어 눈빛으로 솔리아드를 배웅했다. 그는 이제 엠트 분지로
나갈 것이다. 모래와 돌과 바위산만이 있는 그 거친 땅에서, 그는 자신이 그토록
찾아왔던 존재를 만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그토록 궁금해왔던 것에 대한
질문을 하겠지.
헌은 고개를 흔들어 그에 대한 생각을 떨어내어 버렸다. 그리고 자신의 옆에
앉아있는 블러드 엘프의 손을 쥐었다.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현재에 충실해야
했다. 여인의 촉촉한 살갗을 더듬고,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전장에 몸을 던져
베고 또 베어야 했다.
이미 그런 일에 익숙해져 버렸으므로, 그런 종류의 일에 한번 빠져들면
절대 빠져나올 수 없으므로. 그리고 무엇보다도 솔리아드, 그가 말했듯이
자신은 영원히 시간의 수레바퀴를 돌리는 자가 아니므로.
#3.
하탄 아베브는 내준지 얼마 되지도 않아 자신의 책상에 놓여지는 서류를 보며,
눈을 들어 자신의 앞에 서있는 그 소년을 쳐다보았다.
"다 썼나?"
"……빠진 것이라도 있습니까?"
"아니, 없어. 쳇, 정이라고는 안 가는 녀석 같으니라고. 충고하겠는데,
이 용병기지에선 자신의 안전은 자신이 책임지지. 그렇게 밥맛없는 태도로
사람들을 대했다간 아시 여신(니더우드에서 섬기는 하라 신계의 행운의 여신.
작가주)의 가호가 있더라도 3일만에 나가떨어질 거다."
"……"
약간의 반항이라도 기대했던 하탄은 완전 무감각한 소년의 눈동자에 질려버린 듯,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대며 말의 방향을 그 옆에 서있는 엘프에게로 돌려보았다.
"정말 말이 없군. 그런데 옆의 엘프 아가씨는 정말 용병이 되겠다는거요?"
"네."
돌아오는 짤막한 대답. 한 점의 미련도, 후회도 보이지 않는다.
확실히 용병 지원자들의 대답 중 가장 좋은 대답이긴 하지만….
'같은 깃털을 가진 새끼리 모인다더니, 이 엘프 역시 똑같군."
속으로는 혀를 끌끌 차면서도 하탄은 자신이 아까부터 하고 싶던 말을 내뱉었다.
"솔직히 말해서, 그만 두는게 좋을거요."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역시 전혀 흔들림이 없다.
그래도 엘프라 그런지 소년 쪽 보다는 말투가 부드럽군.
"엘프는 조화를 중시하는 숲의 종족이라 들었소. 그런데 전쟁이란건 서로간에
조화가 되지 않아 일어나는 것이거든. 게다가 상대를 죽여야만 자신이 사는
부조화의 온상이 바로 전쟁이오. 그러니 엘프가 여기에 어울릴 리가 없지."
"그 이유셨나요?"
엘프 여인의 입가에 허탈한 미소가 감돌았다.
"적을 죽이지 않고도 자신을 지킬 수 있는 힘이 있다면 상관없겠지요. 게다가 전
블러드 엘프, 불의 세례를 받은 자입니다."
아차 하는 표정이 하탄의 얼굴에 떠올랐다. 얼마 후, 하탄 아베브는 씁쓸한
눈빛으로 그 두 남녀를 쳐다보더니 고개짓을 해서 나가보라는 시늉을 했다.
두 남녀가 나가고 나자, 그는 몸을 뒤로 젖혀 딱딱한 나무 의자의 등판에 기대며
지금쯤 엠트 분지에 도착했을 자신의 친구를 떠올렸다.
순간 그의 입가가 일그러졌다.
"그래서 이들을 도와준 것이었나, 솔리아드? 자네와는 달리 한정된 시간 속에
살면서도 죽음의 허무를 잊은 자들이라서? 그래서였나, 친구여?"
하탄 특유의 삭막한 미소가 다시 떠올랐다.
죽음 속에서 살아가는 자신을 자네는 항상 걱정했었지. 그러나 아마 자네는
죽을 수 있을 때 죽을 수 있는 날 부러워한 것이 아닐까.
그는 눈을 들어 창 밖을 내다보았다. 계단을 내려가는 아까 그 소년과 엘프
앞을 가로막고 시비를 걸고 있는 용병들의 모습이 보였다. 하탄은 쓰게 웃으며
다시 고개를 책상으로 돌렸다.
그리고 손을 들어 서류 한 귀퉁이에 도장을 찍었다.
쾅! 쾅!
경쾌한 두 번의 울림이 지나고 나서, 선우 헌과 시리아스 뮤프넬의 니더우드
용병 지원 서류는 하탄 개인 집무실 책상의 서랍으로 들어갔다.
※ ※ ※
레일리스는 요새 위를 한바퀴 돌았다. 분명히 소년의 냄새는 여기로 이어졌다.
그 이유만으로도 충분히 레일리스는 날개를 펴고 아침부터 날아다닐 수 있었다.
강렬한 복수심은 어떤 것도 움직일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던가. 그녀가 바로
그런 경우에 속했다. 날개가 타는 것도 모르고 태양 아래를 날아왔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녀는 마침내 이곳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늘을 찾아 그 안으로
숨어들었다. 보통 인간들은 염체 상태인 자신을 보지 못하지만, 마나의
움직임을 읽는 마법사라던가 하는 족속들은 자신의 존재를 알아낼 수도
있으므로 조심해야 했다.
이것이 바로 그녀의 가장 큰 장점이었다. 복수에 불타오르는 와중에서도,
그녀는 자신이 지켜야 할 사항에 대해서는 철저했다. 그런 이유에서 같이
태어난 동료들 가운데 가장 강한 어둠의 마나를 지니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저 소년에게 자신의 몸을 농락당한 이후, 그 강대한 어둠의 마나는
오히려 자신에게 방해가 되고 있었다. 자신이 가진 마나로 인해 끌려오는
어둠의 일원들이 급증한 것이다.
원래대로라면 부하를 두게 된 것에 기뻐해야겠지만, 복수를 위해 은밀히
저 소년을 따라 다니는 이 상황에서는 확실히 거추장스런 짐이 아닐 수 없다.
레일리스는 자신의 몸 속을 돌아다니는 그 어둠의 마나를 갈무리 한 후,
그 소년이 있는 곳을 찾아보았다.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지금 이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가장 큰 소동의 흐름
한가운데 바로 그 소년이 있었으므로.
※ ※ ※
선우 헌은 자신의 코앞에 다가와 있는 갈색의 단단해 보이는 주먹을 보며
조용히 말했다.
"이건 무슨 의미죠?"
"글세, 이 아즈탄 용병기지의 관례랄까? 새로 들어온 녀석에 대한
실력 확인같은 것이지."
주먹을 내밀고 있는 가무잡잡한 피부의 사내는 대조적으로 흰 이빨을 드러내며
빙그레 웃었다. 아마도 드라베 족에 속하는 모양이군.
소년은 손을 들어 자신의 앞에 있는 주먹을 옆으로 치우려 했다.
그것이 신호가 되었는지, 벽쪽에 서있던 빨간 두건을 한 녀석이
발차기로 그의 머리를 걷어찼다.
빠악! 발등은 정확하게 소년의 측두골에 격중했다. 너무 정확하게 격중해서
공격을 한 사내조차 잠시 넋을 잃은 모양이었다. 이것도 못 피한단 말야 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걷어차인 곳에선 피가 한줄기 흘러내렸다. 소년은 손가락을 들어 그것을
찍어서는 혀에 갖다대었다. 순간적으로 그의 무심했던 보라빛 눈동자에
생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바로 이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존재하는 이유, 내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바로 이것일지도 모른다.
소년의 입에서 메마른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이걸로 정당방위 성립인가…."
그리고 소년은 뒤로 발을 빼어 자신의 머리를 강타한 빨간 두건의 낭심을
강타했다. 푸욱 들어가는 느낌이 발끝을 통해 전달되어왔다. 그대로 소년은
무릎을 돌려 두목격으로 보이는 갈색피부의 사내에게로 휘둘렀다.
퍼억! 하는 소리와 함께 자신이 휘두른 힘에 의해 날라간 빨간 두건이
갈색피부의 사내에게 던져지는 모습이 들어왔다.
그대로 헌은 몸을 솟구쳐 갈색피부의 사내를 향해 재빠르게 발공격을 시도했다.
해동에서 배웠던 '택견'의 까치돌음이었다. 퍼버벅-! 정확하게 스물 네 번의
타격음이 들린 후, 소년의 몸은 땅에 착지했다. 피부에 와닿는 팽팽한 공기의
흐름이 매우 친숙하게 느껴졌다.
소년의 입에선 미소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보라빛 눈동자는 이미 적의 행방을
향해 쫓고 있었다. 그리고 망설이지 않고 그의 몸은 그곳을 향해 뛰어들었다.
자신의 옆에 서있는 블러드 엘프에 대한 것은 잠시 흘려버렸다.
헌의 몸이 움찔하더니 자신을 향해 괴성을 지르며 달려드는 거구의 사내에게로
향했다. 곧 헌의 어깨가 사내의 명치에 적중했다. 순간 동작이 멈춰진 상대의
멱살을 잡고 팔꿈치와 손바닥으로 추가 타격을 먹인 후 던져버린다. 그리고 바로
뒤에서 달려드는 상대의 상방 공격을 피하며, 몸을 낮추어 발목 부분을 강타하여
쓰러트린다.
그렇게 헌은 자신의 몸이 움직이는 대로 그 흐름 속에 자신을 맡겨 보았다.
옆에 서서 슬픈 눈동자로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블러드 엘프를 무시한 채.
상대의 몸에 자신의 공격이 격중했을 때의 몸에 와닿는 그 느낌,
그리고 상대의 비명과 코에 와닿는 피빛숨결. 확실히 이쪽이
지금의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리라 라고 생각하며, 헌은 숨을 들이켰다.
요새 위로 뜬 태양의 열기는 협곡에서 올라오는 물안개가 중화시켜 주었다.
헌의 이마에 흐르는 땀은 그의 시야를 가리지 못했다. 그는 도부수,
어떤 경우에도 사람을 죽이도록 훈련되어 있는 족속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