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 (28/65)

 #4.

 지금 아즈탄 협곡의 용병기지는 후끈한 열기에 휩싸여 있었다.

 이른바 '신고식'을 치러주러 간 메슈의 일행이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다는 얘기는

 얼마 안가 기지 내에 모두 퍼지게 되었다. 

 그런 이유로 해서, 보라빛 머리칼의 소년이 메슈 일행과 맞붙고 있는,

 하탄 아베브 사령관의 집무실 앞 광장은 구경온 용병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네들은 서로를 쿡쿡 찔러대며, 연신 곤혹스런 표정을 지어내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하탄 대장의 오랜 친구가 타타르에서 데려온 그 소년은

 기절한 채로 이 요새에 발을 들여놓았으니까.

 거기다 여자라고 해도 믿을 만치 예쁜 용모는 몇몇 용병들의 아랫도리를

 후끈 달아오르게 했으며, 그 외모에 무색하리 만치 독하고 빠른 공격은

 경륜있는 용병들의 눈을 빛냈고, 그 소년의 옆에 서서 걱정스러운 눈으로

 싸움을 지켜보는 블러드 엘프의 존재는 기지 내에 존재하는 유사인간들

 (Demi Human)-특히 하프 엘프들의 분노를 일으켰다.

 그러나 이런 여러 감정들의 교차와는 상관없이, 보라빛 머리칼의 소년은

 여전히 몸을 놀려 메슈 일행을 농락하고 있었고, 그리고 일방적으로

 우세에 있는 소년을 바라보는 블러드 엘프의 슬픈 눈빛도 달라지지 않았다.

 "와아아-!"

 "으아악-!"

 "빌어먹을!!!"

 순간 환성과 괴성, 그리고 욕설이 한꺼번에 터져나왔다. 소년의 팔꿈치가

 뒤로 들어와 잡기를 시도한 빨간 두건의 명치를 격해버린 것이었다.

 부웅-하고 빨간 두건의 몸은 위로 떠올라 구경하던 용병들 한가운데로 나가

 떨어졌고, 소년은 다시 자기 앞으로 날아드는 발공격을 몸을 뒤로 젖혀 피하며

 부드럽게 한손을 뻗어냈다. 

 원을 그리며 날아든 소년의 팔은 어느새 발공격을 한 사내의 허벅지를 제압하고

 있었고, 다음 순간 그 사내는 자신의 복부에 일장을 맞으며 역시 관중들 속으로

 나동그라졌다. 

 그러나 그렇게 나가떨어졌음에도 심한 상처는 입지 않았는지, 사내들은 입으로

 거친 욕설을 내뱉으며 다시 달려들었다.

 "이 자식이-!"

 "…귀찮군."

 소년은 싸늘하게 한마디 내뱉은 뒤, 몸을 한바퀴 회전시켜 달려드는 상대의

 발목 부분을 쓸어버렸다. 그리고는 몸을 일으켜 대장인 듯한 갈색 피부의

 사내를 바라보았다. 아까의 여유있는 웃음은 사라진지 오래, 그 사내 옆에

 남아있는 두 명의 용병들도 긴장한 듯 침을 꿀꺽 삼켰다.

 소년의 손이 그들을 향했다. 싸우려면 대장과 싸우는 것이 좋겠지.

 그리고 살짝 져주면 여태까지의 내가 보여준 실력으로 인해 날 무시하지도

 않을테고, 또 나에 대해 반감을 가지는 일도 없을테니까.

 "당신이 대장인가요? 당신과 일대일로 붙고 싶습니다."

 히죽- 희미한 웃음이군.

 체면을 살려주어 고맙다는 뜻인가.

 아님 나에게 이길 승산이 있다는 건가.

 "제법이군, 신참! 좋아, 도전을 받아주지!"

 예상대로야. 말을 끝내자마자 자세를 바로 잡는군. 절대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다는 거겠지. 만약 그랬다간 이 기지에서 완전히 도태될 테니.

 "자, 그쪽이 먼저 오지 않으면 내쪽에서 가주마!"

 역시 먼저 움직이는군. 선공을 빼앗겠다는 건가. 그럼 이쪽에서도 마중을….

 "하아앗!"

 "허억?!"

 헌은 재빨리 몸을 돌려 상대가 뻗어낸 주먹을 피하며, 안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그의 등이 상대의 가슴판을 밀어버렸다. 상대는 예상치 못한 공격에

 당해 비틀거렸고, 그러자 구경꾼들 사이에서 야유가 터져나왔다.

 "메슈, 그게 무슨 한심한 꼴이냐!"

 "때려눕혀, 때려눕히라구!"

 "신참에게 교육을 톡톡히 해주지 않고 뭐하는 거야!"

 메슈…저 갈색 피부의 사내가 메슈라는 이름인가. 이곳 아즈탄 협곡의

 용병기지에서 용병들의 실질적인 대장이 된 자, 바로 자기 앞에 서있는

 저 남자의 이름이군.

 헌은 피식 웃으며 빠른 속도로 상대에게 덤벼들었다. 이제 더 이상 살의가

 없는 싸움은 하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달려들어 상대의 품안으로 뛰어들면

 그 다음은 저 사내가 아무리 바보라도 내 뒷통수를 노리겠지. 그걸로 끝이야. 

 이렇게 해서 또 사람들 안으로 들어서는 건가. 피냄새를 맡고 싶어하는

 내 본성을 숨기고서….

 단지 내가 원하는 것은 그것뿐일까.

 사람을 베어내는 것 외의 내 존재이유는 없는 걸까.

 그때였다. 헌은 자신의 정신 세계 속으로 무엇인가가 침입한 것을 느끼며

 앞으로 쓰러졌다. 흐릿하게 자신을 향해 뛰어오는 시리아스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녀의 모습이 무엇인가와 겹쳐 보임을 느끼며 헌은 정신을 잃었다. 

 ※     ※     ※

 "뭐, 뭐야…갑자기 정신을 잃어버리다니…."

 "하긴 혼자서 메슈 일행을 다 쓰러트렸으니 체력의 한계가 올 때도 되었지."

 "흠, 이걸로 일단 메슈 녀석은 여전히 대장 자리를 지킬 수 있겠군."

 사람들이 제 각각으로 떠드는 소리를 무시하며, 시리아스는 소년의 몸을

 안아들었다.

 무척 가벼운 몸이다. 사형장에서 무수한 적들과 싸워 살아남은 흔적이

 여기저기 새겨져 있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웠다.

 그리고 슬퍼보였다.

 그러나 시리아스는 더 이상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그녀는 조용히 그의 몸을

 안아들어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방금 하탄에게서 배정받은 자신들의 방으로

 향했다.

 그때 누군가가 그녀를 뒤에서 불러세웠다.

 "이봐요, 아가씨."

 시리아스는 뒤를 돌아보았다. 분명히 메슈라고 불렸던 갈색 피부의 남자였다.

 그는 자신의 뒷머리를 벅벅 긁으면서 힘겹게 말을 꺼내고 있었다.

 "저, 저 그러니까 아가씨는, 음…저 소년의, 그러니까…."

 "보호받고 있는 처지죠. 하지만 지금은 제가 보호해야 할 차례인 것 같군요."

 그때 한 날카로운 목소리가 구경꾼들 사이에서 새어나왔다.

 빈정거리는 듯한 목소리였다.

 "흥, 숲을 파괴하여 불의 세례를 받은 블러드 엘프가 생명을 가진 것을

 보호한다고?"

 시리아스는 그 목소리에 뒤돌아보지 않았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자신에게 반감을 가진 종족은 자신이 원래 속해있던 바로 그 종족뿐이니까.

 뒤돌아보는 대신, 시리아스는 소년의 머리를 껴안으며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메슈라고 했던 사내를 향해 한마디 던지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는 지금 서큐부스에게 침입당해 있어요. 깨어나면 당신과의 승부를

 계속 하겠죠."

 "아, 아니, 그건 필요없소. 충분히 녀석의 실력은 알았으니까. 그보다 깨어나면

 주점으로 오라고 하쇼. 내가 한턱 낼 테니까."

 그러더니 메슈는 모여든 구경꾼들을 향해 한마디 했다.

 "어이, 모두들! 이 괴물같은 소년과 저 아리따운 엘프 아가씨가 우리 동료가

 되는 것에 이의 있나!"

 "당연히 없지!"

 환호성을 지르며 자신들을 환영하는 목소리들 가운데 자신을 향한 비난의

 목소리가 끼어있는 것을 느끼며 시리아스는 서둘러 발을 옮겼다.

 그러다 피식 미소를 지었다.

 깨어나면 주점으로 오라고…. 이 사람들은 서큐부스에게 침입을 받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모르는 모양이지. 하지만 이 소년이라면 틀림없이….

 시리아스는 이유없이 다가오는 슬픔을 몰아내며 소년의 몸을 침대 위에 뉘였다.

 그리고 소년의 머리를 끌어안고는 아까부터 참았던 눈물을 쏟아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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