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 (29/65)

 #5.

 "할아버지!"

 "어이구, 이런. 샬라 아가씨 오셨구나."

 하탄은 미소를 지으며 자기 무릎에 매달리는 자신의 손녀 샬라 아베브의

 귀여운 얼굴을 쓰다듬어 주었다. 그 특유의 삭막한 미소가 떠올랐지만,

 샬라는 전혀 무서워하지 않고 오히려 더욱 그에게 안겨 들며 칭얼거렸다.

 "할아버지, 옛날 얘기해주세요. 오늘은 꼭 해주셔야 되요."

 "이런, 이런. 할아버지한테서 얘기 들으려고 혼자서 찾아온거냐?"

 "히잉, 하지만 할아버지는 늘 바쁘시잖아요. 그러니까 집에 들어와 계시는

 시간도 적구…."

 하탄은 빙그레 웃으며 샬라의 몸을 안아 들어 자신의 무릎 위에 앉혔다. 

 "그래, 알았다. 그럼 무슨 얘기를 해주면 좋을까…."

 "여행자요. 여행자 이야기 해주세요. 세계 안 가본 곳이 없이 돌아다니며

 불쌍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여행자 얘기 말이에요."

 하탄의 눈이 약간 슬픈 빛을 띄었으나 그것도 잠시, 그는 샬라의 작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얼마 안된 이야기다. 한 여행자가…."

 샬라는 눈을 빛내며 할아버지의 가슴에 몸을 기대었고, 할아버지 입에서 나오는

 얘기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이 귀를 쫑긋 세웠다. 그리고는 그 얘기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 여행자는…."

 ※     ※     ※

 헌은 고요하게 가라앉은 호수를 보고 있었다. 이 광경은 전에도 본 기억이 있다. 

 말할 것도 없이, 그 서투른 서큐부스가 침입해왔을 때 눈에 들어왔던 광경이다. 

 그의 입에 메마른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또 침입을 허용한 건가…. 아무리 싸움에 정신이 없었다지만 이거 안 되겠는걸.

 그렇게 생각 안 해, 초보 서큐부스 아가씨?"

 그 말에 호수의 표면이 움찔 하더니 그 속에서 붉은 머리칼의 시리아스가,

 아니 시리아스의 모습을 취한 서큐부스가 체념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올라왔다. 

 그녀의 입가엔 자조적인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정말 대단해. 어떻게 알아챈 거지, 이번에는?"

 "호수는 내가 어머니를 위해 마련해둔 쉼터, 그곳은 항상 조용하면서도

 애달픈 느낌으로 가든 찬 곳이니까."

 서큐부스의 얼굴에 그랬구나 하는 표정이 떠올랐다.

 "그래서였군. 내 몸에 흐르고 있는 분노와 복수심은 숨길 곳이 없이 넘쳐

 흘러나고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평상시의 네가 말한 그런 호수의 분위기가

 아니었겠지."

 헌은 피식 웃었다. 도저히 자기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상대란 걸 알았으니,

 이젠 소멸시켜 달라 이건가. 서큐부스 일족들 간에는 남자를 굴복시키지

 못한 것은 소멸보다 더한 치욕, 익히 알고는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

 하지만 별로 소멸시킬 생각은 안 드는군. 약간 귀찮긴 하지만 저 서큐부스가

 날 노려주는 것이 내게 도움이 될지도….

 그리고 헌은 예의 무미건조한 말투로 내뱉듯이 말했다.

 "사라져."

 "뭐…."

 "사라지라고 했다."

 서큐부스의 얼굴에 당황스러운 표정이 역력했다.

 시리아스라면, 그 블러드 엘프라면 어떤 경우에도 저런 표정을 짓지 않겠지.

 후훗, 절대 볼 수 없는 얼굴이군.

 그녀는 엘프, 무엇과도 조화를 이루는 종족이니까. 

 헌은 찬찬히 눈을 돌리며 호수 중앙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그곳에는 얼음으로

 이루어진 기둥이 있었고, 그 안에는 자신의 어머니가 잠들어 있었다.

 그는 손을 들어 그 차가운 겉면을 어루만지며 아까 자신이 한 말을 다시

 되풀이했다.

 "사라져라. 오늘은 그냥 보내주겠어. 어머니가 원하는 것 같지 않으니 말이야.

 하지만 다음 번에 또다시 내 안으로 들어왔다가 들킨다면…."

 "…날 그냥 보내주겠다고? 이긴 자의 관용이냐?"

 서큐부스는 딱딱한 어조로 그렇게 말했다. 그러더니 이내 웃어보였다.

 아름다운, 그러나 때문에 위험한 웃음이었다.

 "어차피 널 처리하기 전에는 난 일족에게 돌아갈 수 없어. 그러니 계속 해서

 널 따라다니겠다. 게다가 넌 독특한 인간이니까 말야."

 그 말에 헌은 다시 피식 웃었다. 확실히 독특하긴 하지. 피로써-그것이 누구의

 피이든 상관없이- 자신을 지탱하며, 또 거기서 오는 죄책감을 또다시 피로 씻는

 나는 확실히 독특한 인간이다.

 그리고 헌은 세 번째로 자신의 말을 되풀이했다.

 "말했을 것이다. 어머니가 원하지 않으신다고. 그러니 사라져라."

 그런 헌의 말에 서큐부스는 얼음기둥 안에 갇힌 그 여인을 바라보았다.

 이 소년 곁에 있던 블러드 엘프를 닮은 듯한 얼굴이다. 다시 보니 자신의

 얼굴과도 비슷했다. 그녀의 입가에 고혹스런 미소가 다시 떠올랐다.

 "좋아, 오늘은 그냥 가겠어. 하지만 기억해라. 난 소멸되던가, 널 파멸시키던가

 결판을 내고 말 것이다."

 그리고 서큐부스는 천천히 날아올라 뒤로 몸을 날려 사라졌다. 그녀의 마지막

 말이 헌의 귀에 스며들어왔다.

 "그 전에 내 이름이나 알아두어라. 내 이름은 레일리스, 릴리스 님의 60번째

 자식. 이제 네 무의식 속에 머물러 있겠다."

 "좋을대로…."

 헌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하고는 정신을 집중했다. 그리고는 아까부터

 자신의 귓가에 속삭여오는 블러드 엘프의 목소리를 향해 다가갔다.

 그는 눈을 떴다.

 "헌…기다렸어요……."

 "미안해요, 누나. 걱정 끼쳐서…."

 헌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아까부터 자신의 귓가에 대고 자신의 이름을

 속삭여준 시리아스의 몸을 안았다. 창문 너머에는 어느새 달이 떠있었다.

 불그스레한 기운이 은은히 감돌고 있는…군신 아레스의 붉은 달이었다.

 ※     ※     ※

 "와우-!새로운 우리의 동료를 위해!"

 "잔을 비워라!"

 "와아아!"

 요란한 고함소리와 더불어 공중에서 잔들이 부딪혔다.

 사내들의 껄껄거리는 웃음이 기지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 웃음소리 한 가운데에는 보라빛 머리칼을 가진 소년과

 붉은 머리칼의 엘프가 앉아있었다.

 갈색 피부의 남자 메슈는 그런 그들에게 다시 잔을 채워주며,

 호탕하다고 자신이 생각되는 웃음을 터트렸다.

 "우하하핫-! 진짜 아깐 내가 진 줄 알았다구. 그런데 정말 운 좋게도,

 아, 아까 뭐라고 했지? 서쿠…."            

 "서큐부스."

 "그래, 그래. 그 서큐부스라는 종족이 네 정신 세계 속으로 침범한 덕에

 무사히 끝났지 뭐야. 정말 운이 좋았어."

 헌은 예전에 시리아스에게 처음 지어보였던 그 미소를 지으며 메슈의 말에

 대답했다.

 "운도 실력이죠. 그런데 누나, 왜 그래요? 아까부터 약간 불안한 것 같은데."

 소년의 말에 잠시 밤하늘 어느 곳을 쳐다보고 있던 시리아스는, 급히 그에게로

 얼굴을 돌리며 미소를 지어보였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저 이상한 소리가 들려와서."

 "아, 그러고 보니 누난 엘프였죠. 그런데 이상한 소리라뇨?"

 그렇게 궁금한 것같은 얼굴로 다가오지 마요. 사실은 알고 있으면서…

 내가 아직도 당신에게서 사랑 받고 있다는 착각 속에 빠지지 말게 해줘요.

 그런 얼굴로 내 곁에 쭉 있어줄 자신 있나요. 언제나 날 위하는 것 같은 태도로

 계속 날 대할 수 있나요. 내가 언제나 당신에게서 사랑 받고 있다는 착각 속에

 살게 해줄수 있나요.

 시리아스는 소년의 말에 대답했다.

 "무언가가 이동하는 소리였어요."

 "뭐라? 그럼 아마도 퀘타라스의 기사단이 움직이는 소릴거요. 요 근래 들어서

 그런 소리가 부쩍 늘어나고 있어. 특히 이 요새는 사막 중에서도 물이 있는

 유일한 곳이라 적의 공격 대상이 되거든."

 메슈의 입에서 킬킬대는 소리와 함께 답변이 돌아왔다. 그러더니 의외라는 듯이

 메슈는 시리아스 쪽으로 얼굴을 돌리며 말을 던졌다.

 "그런데 아가씨도 독특하군요."

 "뭐가요?"

 "보통 여자 용병들은 조그만 소리에도 놀라는 척 하며 맘에 찍어두었던 남자에게 

 안겨들죠. 그럼 그날 밤으로 일이 진행되는 거고. 그게 용병들의 사랑 표현인데,

 그런데 아가씨는…."

 그 소리였나. 하지만 그건 사랑하는 이의 품에 안겨 만족감과 안도감을 느낄 수

 있는 이들의 얘기. 나완 상관없어. 그리고 그에게 안기려면 언제든 안길 수

 있으니….

 그리고 시리아스는 메슈에게서 눈을 떼어 헌에게로 돌렸다. 오늘밤이라도 내가

 다가서면 그는 날 안아주겠지. 비록 그것이 진실된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해도. 

 시리아스의 붉은 눈동자에 달빛이 어렸다. 그녀의 눈동자만큼이나 붉은 기운이

 감도는, 불길한 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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