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쉬익-! 날카로운 칼바람이 일어났다. 그리고 또 하나의 생명이 꺼져버렸다.
긴 창 하나가 칼의 주인을 향해 찔러왔으나 낼름거리는 불꽃이 그것을 방해했다.
그리고 칼의 주인은 손을 뒤로 휘둘러 창의 임자를 잡았다.
창을 찔러왔던 병사는 그 손을 피하려 했으나 헛수고로 돌아갔고,
결국 그 손에 의해 내장이 파헤쳐지며 쓰러졌다.
그리고 칼은 또다른 희생자를 찾아 희번덕거렸다.
"잘 하는데?"
"우리가 죽인 수보다 더 많이 죽인 것 같아. 으랏차!"
어느새 칼의 임자 곁으로 다가온 레크와 탈라이신이 그들 앞을 가로막던
병사들의 몸을 베어내며 말을 건넸다. 그리고 또다시 달려드는 병사들을 향해
자신들의 무기를 휘둘렀다.
그리고 칼의 임자는 희미한 웃음을 그들에게 던졌다. 특유의 보라빛 눈동자를
빛내며, 붉은 머리칼의 엘프를 옆에 안으며,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가 물려준
도를 고쳐 쥐며.
문득 레크는 엘프 특유의 매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소년의 어깨를 툭 쳤다.
"정말 대단한 실력이야. 이 정도면 카프린과 대등하게 겨룰 수 있을지도
모르겠는걸."
"카프린?"
소년의 얼굴에 잠시 의아한 빛이 스쳐지나갔다. 레크는 그런 기색을 알아챘는지
오히려 더 이상하다는 투로 대답했다.
"모르는 건가? 그 '검은 바람의 카프린'말이야."
"어떤 사람이죠, 그는?"
"글쎄, 인간이라기에는 너무 강한 놈이야. 최강의 용병이지. 거기다 주제에
마법전사라구."
그때 시리아스는 분명히 보았다. 소년의 무심하던 눈동자에 잠시나마 한줄기
기광이 스쳐간 것을. 그리고 그녀는 그것을 진심으로 기뻐했다. 비록 그것이
자신을 향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는 진심으로 기뻐했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비록 숲을 배신하고 불의 정령왕과 계약을 맺은 블러드
엘프였지만, 그래도 그녀는 무엇과도 조화를 이루어낼 수 있는 엘프였으므로.
※ ※ ※
"아무래도 이상하단 말야…."
벌써 다섯 번째나 같은 말을, 하탄은 반복하고 있었다. 그만큼 도무지 이해가
안 갔던 것이다. 절벽을 기어올라와 목책을 뛰어넘어 기지를 급습하는 정도로
아즈탄 용병 기지를 점령할 순 없다. 그것은 이곳에서 수 없는 패배의 눈물을
삼켜야 했던 그들이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퀘타라스 병사들은 그 방법을 택했다.
도대체 무슨 이유에서….
하탄은 잘 돌아가지 않는 늙은 머리를 탓하며 창문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 올라와 그의 뺨에 촉촉한 물기를 가져다주었다.
밤은 어둠의 시간이다. 어둠 아래서 태어난 것들이 축복받은 대지 위에서 걷고,
뛰고, 나는 시간이다. 그리고 빛 아래에서 태어난 것들은 역시 축복받은
대지 위에서 잠드는 시간.
그렇게 생각하며 웃음을 짓던 하탄의 눈이 크게 떠졌다. 잠깐, 난다고?
달빛을 가리며 날아오는 저것들은 뭐란 말인가. 박쥐라기에는 너무 컸다.
저것들은….
"적이다! 퀘타라스 병사들이 공중에서부터 공격해왔다!"
"활을 쏴라, 활을!"
하탄은 그의 주먹을 힘껏 쥐었다. 창문 밖에서 들려오는 용병들의 고함소리가
그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대신하고 있었다.
이런 간단한 것도 몰랐다는 자괴감이 먼저 다가왔다. 목책을 뛰어넘어 달려드는
일차 부대에 정신이 팔린 사이, 요새 위까지 기어올라간 이차 부대를 놓쳐
버리다니. 게다가 이런 밤에는 화살도 소용없다.
그러나 거칠게 문을 열고 뛰어든 사내의 입에서 터져나온 말은 그의 정신을
혼미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하탄 대장님, 퀘타라스의 마장기입니다!!!"
쿵-! 마치 커다란 망치가 머리를 때린 것 마냥 하탄의 몸이 흔들렸다.
그러나 그는 다시 자세를 가다듬고는 침착한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이제 목책을 넘어온 습격자들은 거의 다 쓰러트렸나?"
"네, 그렇습니다만…."
사내의 얼굴은 땀과 피로 얼룩져 있었다. 그리고 그 밑으로는 한줄기 창백한
빛이 은은히 지나가고 있었다.
하탄은 그런 사내를 비웃지 않았다.
만약 그가 한가지 사실을 알고 있지 않았더라면 저 사내만큼이나
당황했을 것이므로.
그리고 하탄은 자신이 알고 있던 그 사실을 말해줌으로써 사내의 얼굴이
제 빛을 되찾게 해주기로 결정했다.
"카오린 전사대가 우리를 도우러 올 것이다. 아니, 벌써 와있을 지도 모르지."
"아…!!!"
사내의 입에서 안도의 한숨이 새어나왔다. 그리고 하탄은 어지간히 기운을 차린
용병대 제 사 분대장에게 명령을 내렸다.
"이제 전력을 뒤로 돌려라. 카오린 기사대가 올 때를 기다려 기지 밖으로 나가
퀘타라스의 마갑기사들을 맞아 싸운다. 그때까지 적의 이차 부대를 처리하도록."
"예!"
씩씩한 어투로 대답하며 들어올 때와는 다른 당당한 기색으로 발을 옮기는
부하의 모습을 보며, 하탄은 빙그레 웃었다.
그의 투박한 손이 펜대를 쥐더니 양피지 위를 누볐다. 미리 문구를 생각해
두었던 듯, 조금도 멈춤이 없었다. 그리고 하탄은 그것을 잘 펴 자신의 전장
일지가 들어있는 서랍 속으로 집어넣었다.
서랍은 약간 둔탁한 음을 내며 닫혔다.
쿠웅-!
※ ※ ※
키란과 니드는 다시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다. 자신의 아버지인 니드를 바라보는
키란의 입가엔 매혹적인, 그래서 더 위험한 미소가 매달려 있었다.
"이제 거의 다 되어갑니다. 하고 있던 일 하나만 마치면 이제 드래건들이 원하는
데로 되겠죠. 설사 그것이 신들이 원하지 않는 일이라 할 지라도…."
니드는 침중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지만 키란, 넌 그걸 원하고 있지."
"그럴지도 모르죠."
키란은 훗 하고 웃었다. 그-또는 그녀는 매우 즐거운 표정이었다.
아주 들뜬 음색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정말 기대되는군요. 자신이 최고라 생각하는, 그래서 다른 종족들을 모두
지배하거나 아니면 없애버리는 그 종족이 없어진 세상. 니드는 멋지다고 생각
안 하나요?"
니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리에겐 다른 종족을 평가할 권리같은 건 없다, 키란."
"그러나 그들을 멸망시켜 버릴 힘은 있죠."
키란은 키득거렸다. 정말 즐거워서 어쩔 줄 모르는 얼굴이었다.
"난 정말 즐기고 있어요, 니드. 그리고 한편으로는 기대되기도 하고요.
엘시타이가 창조한 가장 위대한 실패작이 사라진 세상, 도대체 어떤 세상인지
난 내 눈으로 보고 싶어요."
"…아마 넌 네 눈으로 볼 수 있을 거다."
니드는 체념어린 어조로 내뱉었다. 그리고 그 말을 끝으로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키란 앞에서 사라졌다. 올 때와 마찬가지로 아무 인사도 없이. 그리고 키란 또한
그를 배웅하지 않았다.
키란은 자신의 할 일과 그것이 가져올 결과에 도취되어 있었다. 문득 그-또는
그녀의 입에서 나지막한 혼잣말이 흘러나왔다.
"1500년의 희생이 다섯 번이나 반복되는 동안 얻은 유일한 즐거움인 것 같군…."
+ + +
하나 말 안한게 있는데...
'도부수'의 세계에서 '사람'과 '인간'은 서로 다른 의미로 쓰입니다.
'사람'은 한 마디로 살아있는 것들 중에서 두 발로 걷고 말을 하며
나름대로의 생활 방식을 지니고 있는 이들을 말합니다. '인간'과 '유사인간'
모두가 이 범주에 들어가죠.
반면 '인간'은 말 그대로 '인간'만을 가리킵니다.
'도부수' 읽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길 바라며...
북녘을 다스리는 검은 물의 가라한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