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어느새 협곡 너머로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은근한 햇살에 부러진 창과 칼이
영롱한 핏방울을 맺은 채로 빛나고 있었다. 목책 안은 여전히 시체들로 덮여
있었고, 병기들이 부딪히는 소리 또한 끝나지 않았다.
"이런 빌어먹을!"
위이잉-! 카가각!!!
메슈는 잘근잘근한 톱날이 선 자신의 칼을 휘둘러 눈앞에 선 갑옷의 빈틈으로
그것을 쑤셔 넣었다. 강철과 강철이 부딪히며 부쩍 신경 거슬리는 음이
튀어나왔다.
그러나 퀘타라스의 성기사는 그런 공격엔 쓰러지지 않는다는 것을 몸으로
보여주려는 듯이, 흰 갑옷의 사내는 옆구리에 메슈의 칼을 꽂은 채로 수중의
바스타드 소드를 내려꽂았고, 메슈는 미처 피할 새도 없이 두 팔을 교차시켜
그것을 막아내었다.
이내 육중한 충격이 전해져 왔고, 더불어 뿌드득 하는 별로 반갑지 않은 소리도
메슈의 귀에 들려왔다. 뼈가 부러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전해준 심적 동요와
신체적 고통은 그의 입에서 빌어먹을 이란 말이 튀어나오게 한 데에 정당성을
부여해주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옆에 서있는 빨간 두건의 하프 엘프 녀석은 그런 것에 신경쓸
여유가 없었던지, 잔뜩 눈썹을 찌푸리고 있었다.
"뭐야, 메슈? 고상하지 못하게 시리…."
"팔이 부러진 상황에서 그럼 찬송가라도 부르랴!"
메슈의 애절함이 듬뿍 담긴 말투에도 레크는 단지 어깨를 들썩일 뿐이었고,
탈라이신과 헌이라고 하는 저 소년은 아예 쳐다보지도 않고 있었다.
그리고 레크의 입에서 나온 다음과 같은 말에 메슈는 이런 놈들을 친구로 둔
자신을 탓해야 했다.
"쩝, 위기에 둘러싸인 놈을 구하러 왔더니 되게 말많네. 한번만 더 칭얼대는
소리하면 버려두고 간다."
"……벼락맞아 죽을 반쪽 엘프 놈…."
메슈는 이를 부드득 갈며 근처에 떨어진 창대를 자신의 팔에 동여매었다.
대충 응급처치를 한 그는, 다시 한번 주위를 살피며 레크와 등을 붙였다.
헌의 눈동자가 잠시 그쪽으로 흘렀으나, 이내 제 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의 몸은 다시 먹이를 찾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붉은 피, 그리고 자신의 손과 칼이 상대의 몸을 찢어낼 때 들려오는 음향.
헌의 입에서 메마른 어조로 중얼거리는 듯한 음이 새어나왔다.
"천인참 사십사식, 붕산(崩山)…."
또 몇 명인가의 육체가 소년의 칼등에 명치 부분이 우그러져 날아가 버렸다.
이제 그들과 대치하고 있는 적군의 수는 많이 줄어있었다. 하지만 하탄이란 자가
나머지 병사들을 이끌고 마갑기사들을 맞이하러 갔으니 이 요새를 지켜는 것은
지금 이 인원이 전부인 것이다.
헌의 입가에 언뜻 미소가 맺혔다. 그리고 그는 아버지가 물려준 도를 고쳐쥐며,
적들이 가장 많이 모여있는 곳으로 뛰어들었다. 자신의 등에 와닿는 블러드
엘프의 슬픈 시선을 무시한 채로.
그의 입에서 여전히 메말라 있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천임참 칠십육식, 마혈우(魔血雨)……!!!"
※ ※ ※
솔리아드는 거칠게 자라난 수염에 묻은 흙과 물방울을 털어내며 자신을 구해낸
이들을 바라보았다. 물방울 무늬의 두건을 쓴 닻을 든 아가씨-무녀라고 했다-는
여전히 그의 몸에 대고 회복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정말 강철같은 체력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밤샘을 해가며 주문을 걸었는데도
그녀는 아직 지치지 않고 있었다. 아니 땀조차 흘리지 않았다. 해적 출신이라고는
들었지만 이 정도의 체력을 갖췄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그리고 그는 눈을 돌렸다. 아까부터 자신이 들려주었던 이야기를 곱씹고 있는
검은 머리칼의 사내와 애꾸의 거구가 들어왔다. 문득 검은 머리칼의 사내,
카프린이 입을 움직였다.
"괜찮겠군, 오랜만에 아즈탄으로 가보는 것도. 게다가 내 기억의 흔적이
이번엔 발견될 지도 모르지."
"그럼 다음 행선지는 그곳이야, 카프린?"
카프린이라 불린 사내의 말에 솔리아드를 치료하던 무녀가 고개를 들고는
장난기 섞인 말투로 싱글거렸다.
"그때 그 붉은 머리의 하프 엘프가 아직 안 잊혀졌나 보지?"
"시끄러, 알리스. 이미 10년 전 얘기야."
알리스는 여전히 싱글거리며 그 옆의 거구에게로 말을 돌렸다.
"이봐, 마오 핑. 너 내 말에 공감하면 대답하지 말고 그대로 있어."
"……"
"봐, 카프린. 마오도 내 말에 공감하고 있잖아. 헤르메스의 무녀 앞에 진실은
숨길 수 없어. 안 그래, 마오?"
카프린은 한숨을 푸욱 내쉬며 알리스의 공격으로부터 몸을 돌렸다.
사기꾼과 도둑의 신인 헤르메스의 무녀와 말다툼하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일인 것이다.
승산없는 일에 시간을 낭비하는 대신 카프린은 다시 한번 저 괴이한 행색의
하이랜더가 말한 선우 헌이란 소년에 대해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아무리 그가 시간의 굴레에 얽매어 있는 자가 아니라 해도 확실히 끝내야 할 일은
끝내는 것이 이롭다.
자신의 어깨에 앉아있는 새, 지지가 뺨에 부리를 비벼왔다. 그는 손에 힘을 빼며
천천히 지지의 푸르스름한 깃털을 쓰다듬어주었다. 검고 투박한 손은 그의
사고마냥 멈추지 않고 계속 흘렀다.
카프린의 흰색 눈동자가 번뜩였다. 피부색과 같은 갈색으로 번들거리는
그의 입이 나지막하게 벌어졌다.
"이번에야 찾아내고 말겠어…."
※ ※ ※
검은 날개가 몸 속으로 접혀졌다. 일부러 흐트러트린 머리칼이 아슬한 곡선을
스치고 지나갔다. 부드러운 머리결이 자신의 몸을 매만지자 레일리스는 절로
흥이 났다.
그녀의 발아래 나뒹굴고 있는 살찐 돼지는, 쉰 살이 넘은 자신의 몸은 생각도
않고 수차례나 그녀가 만들어낸 환영을 탐했다. 그리고 그 대가로 사신의 낫에
자신의 목을 드리웠다. 레일리스는 그 덕에 자신의 검은 마나를 증강시키긴
했지만.
붉은 입술이 살짝 벌려지며 고혹적인 미소를 지어내었다.
"후후…후후후!"
그리고 그 미소는 유혹적인 웃음소리로 바뀌었다. 한참을 그렇게 서서 자신의
몸에 흐르는 마나를 느껴보던 그녀는 이내 몸을 움직였다.
그는 분명 언제고 자신있으면 그의 의식 속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그리고 지금
그는 전쟁터의 한 가운데 있는 상태. 만일 지금 침입해 버린다면 아무리 빨리
자신을 내쫓는다 해도, 방금 자신이 먹어버린 사내가 지휘하던 병사들이 자신을
대신해 처리해줄 것이다.
사실 그녀가 그에게 당한 것을 생각한다면 오랜 시간을 두고 차근차근 망가트려야
하겠지만, 지금의 그녀에겐 그런 힘이 없었고,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분노와
모멸감을 곱씹고 있을만한 정신적 여유도 없었다.
하루 빨리 저 소년을 어떤 형태로든 파멸시키고, 릴리스 님에게로 돌아가
다시 인정을 받아 서큐부스로서 돌아가는 것, 그것이 레일리스의 과제였다.
그리고 그녀의 눈에 지금 그 소년의 모습이 들어왔다. 때마침 그의 몸은
적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녀는 피식 웃으며 그의 정신 속으로 들어섰다.
아니, 들어서려고 했다.
파앙-!
"꺄아악!"
레일리스는 헌의 정신 속으로 침투하려던 자신을 무언가 보이지 않는 힘이
튕겨내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이내 엄습해오는 압박감에 몸을 떨었다.
뭐지, 이 기운은. 나와 같이 어둠에 속한 존재, 하지만 나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강한 어둠의 마나를 지닌 존재. 도대체 이런 존재가 세상에
존재한다는 건….
레일리스는 멍한 상태로 그냥 허물어져 버렸다. 몸에 힘이 다 빠져나갔다.
틀림없어, 이 존재는…이런 엄청난 압박감을 가해오는 존재는….
"블랙 드래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