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레크와 탈라이신은 자신들의 눈앞에 벌어진 상황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그저 멍하니 마장기를 통째로 반쪽낸 소년의 뒷모습이 점차 커져오는 것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소년의 몸은 떨어지고 있었다.
퀘타라스 병사들의 몸을 누구보다 많이 쪼개어놓고,
아까까지 자신들의 옆에서 몸을 뉘어 쉬다가,
갑작스런 서큐부스의 침입으로 정신을 잃었던 소년이 떨어지고 있다.
어느새 정신을 차리고 앞으로 나서 마장기와 맞붙었던 그 소년이,
마치 하늘을 벨 것 같은 기세로 칼을 거꾸로 치켜올리던 그 소년이
지금 떨어지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소년의 몸은 땅에 부딪혀 박살날 것만 같았다.
붉은 머리 엘프의 입에서 무언가 다급한 단어가 튀어나왔다.
"실프-!"
우웅-! 바람이 분다. 희미한 녹색 빛을 띈 바람이 불어왔다.
그리고 그 바람을 일으킨 실프들은 보이지 않는 춤을 추며
소년의 몸 주위를 에워쌌다. 순간 떨어지던 소년의 몸이 주춤했다.
그리고 조금씩 천천히, 마치 하늘을 날던 새가 빠트린 깃털처럼 가볍게 내려왔다.
주문을 외워 소년의 떨어지는 속도를 늦춘 엘프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앞으로 달려나가려 했다. 그러나 앞으로 달려드는 것은 그녀만이 아니었다.
마장기 나타넬 뒤에는 살기어린 표정을 짓고 있는 퀘타라스의 성기사단이
서있었다.
레크와 탈라이신은 얼굴을 굳혔다. 지금 카오린 전사대는 남은 마장기 세대와
싸우고 있었고, 자신들의 대장 하탄은 아직 계곡 밑에서 잔병들을 처리하는
중이었다. 지금 저 소년에게 창끝을 향하며 다가서는 저들을 막을수 있는 것은
자기네 둘과 저 붉은 머리칼의 엘프 아가씨 뿐인 것이다.
둘은 잠시 서로를 마주보다가 각자의 무기를 쥔 손에 힘을 가했다.
그리고 앞으로 한걸음 내딛었다. 엘프 아가씨도 결심을 했는지 조용히 두손을
모아 정령을 부를 준비를 하며 그들 뒤에 섰다.
그때였다.
"크아악-!"
"우윽-!"
"뭐, 뭐냐…."
다가오던 퀘타라스 성기사단의 무리 한쪽이 무너지고 있었다.
아니, 무너지고 있는 곳은 한군데만이 아니었다.
모두 세군데, 세군데에서 한꺼번에 이쪽을 향해 다가서고 있다는 사실은,
공중으로 날려가거나, 이상야릇한 힘에 의해 짓뭉개지거나, 허리나 가슴이
갈라져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병사들의 모습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잠시후 마침내 길이 하나 생기며 그 사이로 한 사내가 나타났다.
사내는 잠시 천천히 내려오고 있는 소년의 몸을 바라보더니 두팔을 내뻗었다.
그리고 소년의 몸을 받아들었다.
레크와 탈라이신은 그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이름은 어느새
그에게 다가선 엘프 아가씨의 질문에 의해 다시 확인되고 있었다.
멀리서 들려오는 병장기 소리 속에, 둘이 나누는 대화의 내용이 레크와
탈라이신의 귓가에 흘러들어왔다.
"…당신은?"
"카프린, 카프린 데 블라키프."
실프들이 흩어지며 다시 바람이 불었다. 사내의 검은색과 엘프 아가씨의 붉은색
머리칼이 흩날렸다. 그리고…그리고 지쳐보이는 하탄 아베브의 모습이 두 용병의
눈동자 속에 다가왔다. 전쟁이 끝난 것이다.
※ ※ ※
소년의 모습이 점차 땅에 가까워지는 것이 보였다. 저대로 놔두면 아무리 그라도
죽고 말 것이 확실했다. 세갈래진 귀를 드러내며 시리아스는 긴급히 정령을
소환했다.
"실프-!"
우웅-! 실프들이 자신의 부름에 따라 모여드는 것이 그녀의 눈에 보였다.
소년의 몸이 떨어지는 속도가 현저하게 줄어드는 것을 확인하며, 시리아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한걸음 내딛어 소년에게로 다가서려 할 때, 와작-!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 소리를 낸 것은 무거워 보이는 철갑 신발에 부숴진 자갈이었다.
그녀의 얼굴이 굳어졌다. 붉은 두건과 거구의 사내도 무기를 거머쥔 손에 힘을
주며 자신의 앞에 섰다. 그리고 그녀는 조용히 이프리트를 소환할 마나를 모으며,
눈앞에 선 퀘타라스의 병사들을 바라보았다.
한 이백여명 정도? 이프리트가 아니면 저 인원을 물리치기가 힘들 것이다.
게다가 저들은 지금 자신들이 자랑스럽게 생각하던 마장기가 쓰러짐으로 해서
무척 흥분해있다. 저 정도면 아무리 그녀가 엘프라 해도 조화를 이루기에는
힘들 것 같았다.
그녀의 입에서 막 주문이 나오려고 할 때였다. 갑자기 쭉 늘어서서 그들을
압박해오던 퀘타라스 병사들의 벽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별로 듣기 좋지 않은
비명소리와 함께 결국 한 부분이 완전히 무너지며 길이 났다. 그리고 한 사내가
그곳에서 나타났다.
검은 머리칼, 검은 피부. 그리고 묘하게 하얀 눈동자를 가진 사내였다.
사내가 팔을 내밀어 소년의 몸을 받아드는 것이 시리아스의 눈동자에 들어왔다.
잘 갈무리된 마나가 느껴졌다. 그녀보다 몇배는 되는 마나의 힘이었다.
그녀의 뇌리 속에 어떤 존재의 모습이 그려졌다. 잠시 굳어있던 시리아스는
이내 눈을 빛내며 사내에게 다가섰다. 그리고 그녀가 궁금해하던 것을 입밖에
내었다.
"…당신은?"
"카프린, 카프린 데 블라키프."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은 사내의 검은 머리칼을 흩날렸다. 사내의 유난히 하얀
눈동자가 그녀의 뇌리 속에 그려졌던 존재를 지워버렸다. 그리고 시리아스는
사내에게서 소년을 넘겨받았다.
잠자는 듯이 감긴 소년의 눈이 그녀의 가슴을 메웠다. 시리아스는 천천히 소년의
보라빛 머리칼을 쓰다듬어 갔다. 그녀의 손이 잠시 소년의 입술에 머물더니 이내
여인의 입술이 그 위에 얹혀졌다.
잠시 후 소년의 눈이 떠졌다. 그의 미소가 다시 한번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시리아스는 그에게 마주 웃어보였다. 바람은 이미 그들에게서 떠나 하늘로 날아가
버린 뒤였다. 참으로 맑은, 한 군데에 구름이 몰려있기는 했지만 참으로 맑은
하늘이었다.
※ ※ ※
카프린은 자신이 안고 있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무미건조한 얼굴 표정만 아니라면
제법 귀여운 얼굴이다. 소년의 두 어깨는 탈골된 듯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가볍게
두 손을 휘둘러 뼈를 맞춰주었다.
분명 아까 마장기를 반쪽 내며 빠진 것일 것이다. 아까의 그 도법은
그가 보기에도 굉장한 것이었다. 마치 하늘을 거슬러 올라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으니까.
문득 카프린은 소년의 얼굴에서 눈을 떼었다. 자신의 곁으로 다가온
붉은 머리칼의 엘프가 얼어붙은 듯한 표정으로 서있었다.
그리고 당연히 그가 예상한 질문이 나왔다.
"…당신은?"
카프린은 조용히, 자신이 몇십년 전에도 했던 대답을 되풀이했다.
"카프린, 카프린 데 블라키프."
그리고 블러드 엘프는 소년의 몸을 건네 받았다. 그녀가 자신을 경계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며, 카프린은 미소를 지었다.
문득 하늘의 한 부분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이상하게도 맑은, 그러나 한군데에는 여전히 구름이 몰려있는 하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