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헌은 자신의 어깨를 한바퀴 돌려보았다. 약간 뿌듯한 느낌이 들긴 했지만
생각보다 잘 움직였다.
확실히 퀘타라스의 마장기는 단단했다.
마장기의 재료가 되는 광물 아스타드의 강도는 중원에서 나는 건곤한철과
비교될만 하다고, 그렇게 헌은 단정지었다.
그런 강도를 지닌 것을 반쪽 내는 데에는 두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그보다 더 단단하고 날카로운 것으로 베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엄청난 속도와 힘을 가해 순간적으로 생긴 기파 (氣波)에 의해
베어내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속도를 택했다. 그것은 적절히 들어맞았다. 천인참의 마지막을
장식한 도법은 퀘타라스 최고의 마장기라는 나타넬을, 그 주인의 몸과 함께
정확히 반쪽을 내놓았다.
물론 그 대가는 컸다. 일시적이긴 했지만 음속을 뛰어넘은 자신의 어깨가
그 충격을 못이기고 빠져버린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헌은
빙그레 웃었다.
하지만 자신은 그것을 베었다.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서있는
그 거대한 철거인을 베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이제 그는 여전히
자기자신으로 남아있을 수 있는 것이다.
문득 헌은 궁금증이 일었다. 대체 어제 자신을 구한 사내는 누구였을까?
아무리 자신이라 해도 이백여명 되는 성기사단이 만든 포위망을 일이분 만에
뚫어버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과거 북해에 있는 형장에 끌려가서 약 삼백 마리 가량의 혈랑(血狼)들과
싸운 적이 있기는 했지만, 그때 그의 상대는 늑대였다.
철저하게 본능에 의해 움직이는 그들은 더 강한 본능을 끌어내어 도륙해 버리면
산산이 흩어져 버린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상대는 인간, 그것도 정규 교육을 받은 성기사였다.
자신의 기억이 맞는다면 그들은 그들의 신전에서 신성마법과 검술을
익힌다고 했다. 자신이 그들과 맞서 싸운 것은 18살이 되어 처음 맞이한
봄날이었다.
비록 퇴출된 성기사였긴 하지만 그는 굉장히 강했다.
용맹하고 강하게 부딪혀 오는 검도 검이었지만,
틈틈이 던져오는 신성마법은 더 대단했다.
그런데 자신을 구한 사내는 그런 적들이 둘러싼 벽을 약 이분여 만에 깨버렸다.
그런 힘과 기술, 그리고 정신력을 가진 존재는 흔하지 않다.
문득 헌의 기억 속에서 어떤 존재의 모습이 그려졌다.
열다섯 되던 때였던가. 아직 아버지가 살아있을 무렵, 귀족들에 의해 형장에
나선 그는 기이한 괴수를 보았다. 전신에 기분나쁜 비늘을 두른,
뱀의 대가리와 새의 날개를 지닌 괴수였다. 그것을 가리켜 귀족들은
'비룡-와이번'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이 그 괴수에 의해
죽는 쪽에 돈을 걸었다.
하지만 헌은 귀족들의 돈벌이가 될 생각은 없었고, 결국 그렇게 되었다.
그때 만들어진 천인참의 이십일 번째인 '도룡(屠龍)'. 귀족들은 경악했다.
그리고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 저 녀석이라면 최강의 괴수라고 하는 …을 벨 수도 있겠는걸!
헌은 차분히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오래지 않아 그는 자신의 머리 속에
남아있는 그 존재의 이름을 떠올렸다. 그리고 조심스레 그 단어를 입밖에
내어보았다.
"드래건…."
※ ※ ※
레크와 탈라이신은 침상 위에 몸져누운 메슈를 싹 무시한 채로,
침대에 걸터앉거나 기대어 서서, 가운데 자리잡고 앉은 자신들의
옛 동료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얼굴엔 미소가 가득 차 있었다.
탈라이신의 냄비 뚜껑같은 손이 메슈 옆에 놓인 위문용 건포도 한줌을 집어
입 속으로 털어넣었다. 레크가 옆구리를 꼬집지 않았다면 아마 남은 건포도들도
다른 쪽 손에 의해 같은 운명에 처했을 것이다.
메슈는 힘없이 눈을 들어 자신의 일용할 양식을 사수한 레크에게 감사를 표하려
했으나, 곧 그의 눈은 분노와 배신감으로 불타올랐다. 레크는 남은 건포도를
그릇 채로 들어, 앉아있는 이들 가운데에 놓았던 것이다.
메슈는 눈을 부라리며 으르렁대는 말투로 레크를 쏘아보았지만, 이내 그의 행동을
후회했다. 지금 그의 행동 따위는 레크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레크의 정신 속에
이미 한 사내가 들어가 있었고, 지금 그는 그 사내를 챙겨주기에도 바빴다.
"……너, 부상당한 전우에 대한 경외심같은 건 없는 거냐…."
"카프린, 한번 먹어봐. 이거 되게 맛있다."
철저히 무시된 메슈의 말을 받아준 것은 가운데 앉아있는 삼인 중 흑발에
가무잡잡한 피부를 가진 사내였으나, 레크는 그의 말에도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메슈는 처절한 소외감에 할 말을 잃은 듯 그대로 입을 닫아버렸다.
"…레크, 메슈가 뭐라고 하는데?"
"응? 상관없어. 자기 떼놓고 놀고 있다고 투덜대는 거지 뭐."
"……."
빠악-! 경쾌한 음색, 그러나 정작 당한 본인에겐 별로 반갑지 않은 소리가
모두의 귀에 들려왔다. 메슈의 분노를 풀어준 것은 다름 아닌 물방울 무늬의
두건을 두른 소녀의 묵직한 장화였다.
"알리스, 아프잖아!"
"참내, 환자에게 주어진 위문품으로 파티를 열다니 대체 용병들 사고방식은
이해를 못 하겠다니까. 레크, 아무리 카프린이 좋다고 해도 그렇게 노골적으로
표시하면 안 된다고."
"알리스…너도 용병이잖아…."
퍼억-! 이번엔 알리스의 어깨에 기대어 있던 닻이 꽂혀왔다. 잽싸게 옆으로 피한
레크의 머리에 응징의 주먹을 선사한 알리스는 지당하다는 얼굴로 다시 한번
자신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시꺼! 이 알리스 님으로 말하실 것 같으면, 전대무미한 해적선 부선장 출신의
모험자, 도둑과 상업의 신 헤르메스를 모시는 신관, 그리고 또…."
"…소울 페어."
"그래, 우리들은 소울 페어…어라, 카프린?"
카프린의 눈이 빛나는 것을 보며, 알리스는 입을 다물었다. 정말이지 저 사내가
진지한 표정을 지을 때면 왜 살기가 느껴지는 거지. 그때 아까부터 말없이
메슈에게 전달된 위문품 중 술만을 정확히 골라 비우고 있던 애꾸 사내가
입을 열었다. 탁하고 갈라진 목소리였다.
"영혼의 동반자를 찾았나."
"그런 것 같아. 보기 드문 기운이군. 설사 아니라고 해도 내가 소울 페어로
삼아버리면 되니까. 정말 탐나는 기운이야."
알리스는 신기하다는 눈으로 애꾸 사내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마오, 너 이거 알아? 네가 입 열은 게 거의 이주일 만이라는 거 말야."
"……."
"덕분에 네 침묵은 긍정의 뜻으로도 쓰이고 있다고."
"그런 용도로 쓰는 건 알리스, 너 뿐인 것 같은데?"
"뭐시라!"
부웅-! 거무틔틔한 빛을 뿌리며 닻이 아슬아슬한 차이로 숙인 카프린의 머리 위를
지나갔다. 그러나 수그린 그의 코를 기다리는 알리스의 장화가 멋지게 적중한
탓에, 카프린은 코피를 흘리며 넘어져야 했다.
나가떨어져 죽은 듯이 뻗어있던 카프린의 몸이 움찔거리더니, 이내 그의 눈이
생기를 띄기 시작했다. 그의 몸이 벌떡 일어나며 알리스를 덮쳐간 것은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이 자식-! 죽어라!"
"누가 네 맘대로 죽어주기나 한 데!"
메슈가 누워있는 침실을 난장판으로 만들며 싸우고 있는 둘을 보며,
탈라이신과 레크는 미소를 지었다. 당혹감이 어린, 그러나 친근감이 느껴지는
미소였다.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다시 씩 웃었다.
"오랜만이지, 저 둘의 모습?"
"응, 맞아. 정말 오랜만이야."
"레크, 내기하자. 이번에는 카프린이 이길 것 같은데?"
"그럼 난 알리스 쪽에 걸지. 진 사람이 이 상황에 대해 책임지기다."
둘은 킬킬 대며 소란의 중심을 바라보았다. 팔을 휘둘러 주먹을 날리고 있는
'검은 바람의 카프린'과 그 공격을 닻을 들어 막고 있는 알리스,
그리고 그 와중에도 자신쪽으로 오는 공격을 막아내며
묵묵히 술을 마시고 있는 마오의 모습이 들어왔다.
문득 레크의 입에서 그리운 듯한 한숨이 터져나왔다.
"사년 만이로군…카프린 용병대 귀환이라…."
그리고 레크는 눈을 돌려 유심히 상황을 관측하기 시작했다. 이미 카프린이
승세를 잡아가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는 아까까지의 진지한 표정은 뒤로
던져버린 채 벌떡 일어서 주먹을 쥐고 알리스를 응원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