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 (39/65)

 #3.

 붉은 머리카락이 공중에 휘날렸다. 검은 밤하늘을 배경으로 흐느끼는 붉은 색이

 무척이나 아름답다고, 그렇게 헌은 생각했다. 

 느닷없이 자신의 침대에 들어선 이 엘프는 온몸을 애무하며 자신의 귓가에 대고

 나지막히 속삭였었다. 안아줘요 라고.

 그리고 지금 그녀는 자신의 위에 올라탄 채 울고 있었다. 반은 쾌락에,

 나머지 반은 애증에 겨운 울음이었다. 

 헌은 결코 바보스럽지 않았다. 그는 시리아스가 이다지도 자신의 몸을 갈구하는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결코 내색하지 않았다. 그리고 내색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지금은 그저 이 엘프 여성이 원하는 대로 해주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다시금 자신의 아랫배에 힘을 주며 두 손을 움직여 여인의 야릇한

 곡선을 따라갔다.

 시리아스의 몸이 움찔 했다. 그러나 그녀는 결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더 강하게 갈구했다. 두 손을 내뻗어 소년의 굳건한,

 그러나 얄팍한 가슴을 쓰다듬으며 계속해서 그녀의 소원을 갈구했다.

 창조주 엘시타이여, 천룡 브라켄과 태양조 사파이트여, 모든 신계의 주신들이여,

 여러 정령왕들이시여. 여기 불의 세례를 받은 자, 시리아스 뮤프넬이 간절한

 마음을 담아 소망합니다.

 이 소년을 받쳐줄 수 있는 힘을 주세요. 부디 그가 무너지지 않도록,

 부디 그를 무너뜨릴 존재와 만나지 않도록.

 이프리트여, 나의 계약의 맹우. 그를 지켜주세요. 꺼지지 않는 당신의 불꽃을

 그에게 주세요, 영원히 꺼지지 않는…. 

 "하아……."

 "으으음…누나…."

 시리아스는 소년의 몸이 다시 한번 자신의 몸 속에 불을 지피는 것을 느꼈다.

 그대로 그녀는 그를 받아들였다. 가볍게 감긴 눈가에 방울이 맺혔다.

 가냘픈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자신의 몸에 불이 붙어가는 그 순간에도,

 시리아스는 자신의 기원을 멈추지 않았다.

 '부디…이 순간이 계속되어 그를 붙들어 둘 수 있게….'

 "하아악-"

 "으…으음…."

 둘의 숨결은 점점 가빠졌다. 어느새 정상을 향해 치달려가는 그들의 몸 위에

 어스름한 그믐달이 추레하게 빛을 뿌리고 있었다.

 ※     ※     ※

 레일리스는 조용히 헌의 의식 속으로 들어왔다. 가쁜 숨소리가 그녀를 자극했지만

 애써 자제했다. 지금 그녀가 들어와 있는 세계의 주인은 보통 소년이 아니었다.

 자신이 봐도 아름다운 여인과 정사를 하면서도 침입자에 대해 감시의 눈초리를

 보낼 정도의 정신력을 지닌 이였다.

 그래서 레일리스는 더 조심스레 의식의 중앙에 접근했다. 그리고 마침내 예의

 그 호수에 도달했다. 호수 한 가운데에 있는 얼음 기둥, 그리고 그 안에

 갇혀있는 여인은 여전히 제자리에 있었다.

 레일리스는 고개를 갸웃했다. 예상이 빗나간 것일까. 만일 내 추리가 맞는다면

 지금쯤 저 여인의 얼굴은…. 

 그때 레일리스는 보았다. 여인의 얼굴이 조금씩 변해가는 것을….

 그 블러드 엘프를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자신의 얼굴을 닮은 것 같기도 하던

 그 얼굴은 다시 변하고 있었다. 

 그녀는 지그시 그 얼굴을 주시하였다.

 틀림없어, 저 얼굴은…. 역시 내 예상이 맞았던 거야.

 저 소년은 틀림없이 자신의 마음에 파문을 일으킨 자의 얼굴을

 어머니에게 투영시키고 있어. 

 이건 안돼. 넌 내 먹이감이야. 다른 이에게 의해 무너지는 것은 두고 볼 수 없어.

 어느 누구에게도 넘겨주지 않아. 넌 내 먹이감이니까.

 그러니까…다른 이에게 의해 무너지는 것은 내버려두지 않아.

 레일리스는 휙 몸을 돌려 천천히 날아올랐다. 그녀가 잠시 머물렀던

 헌의 안식처엔 처음과 마찬가지로, 차가운 호수 하나와 가운데 서있는 얼음 기둥,

 그리고 그 안에 갇혀있는 아름다운 여인이 있었다.

 한 가지 달라진 점이 있다면…얼음 기둥 안에 갇혀진 여인의 얼굴이 변해있었다는

 것뿐이다. 지금 그녀의 얼굴은 약간 옅은 갈색을 띈…그래서 쉽게 구별되는

 '검은 바람의 카프린'의 얼굴이었다….

 ※     ※     ※

 펜을 잡은 투박한 손이 양피지 위를 누볐다. 손바닥은 물론, 손등에도 못이 박힌

 정직한 손이다. 이런 손의 주인은 한 종류밖에 없다. 전장에서 수년간을 살아

 남아온 전사. 그리고 그 전사의 이름은 하탄 아베브였다.

 턱밑에 난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눈을 굴리더니, 이내 하탄은 양피지 위에 몇자를 

더 적어 내려갔다. 한참을 그렇게 써내려 가던 그는, 드디어 마침표를 찍고는

 한번 자신이 쓴 내용을 읽어보았다.

 '라무텐 력 23년 지그라트의 달 열두째 주의 셋째날,

 퀘타라스의 성기사단이 계곡을 기어올라와 습격.

 계곡 아래와 요새 위에서 동시에 펼친 양동 작전에 잠시 당황하나

 훌륭한 용병들의 실력으로 격퇴.

 소수의 정예 용병들이 요새를 지키는 동안, 요새의 대장 하탄 아베브는

 남은 인원 모두를 이끌고 마갑기사단을 습격, 채 마장기에 올라타지 못한

 마갑기사 여럿을 도륙.  

 그 사이, 최강의 마장기라는 나타넬이 요새를 공격했으나 쿠리안 출신의 용병

 선우 헌과 그의 동료인 엘프 시리아스 뮤프넬의 힘으로 격퇴. 

 퀘타라스 본진은 은밀히 길들여진 샌드런너들에 의해 격퇴당함.

 그러나 우리 군 상층부도 마장기에 의해 심각한 피해를 입음. 

 이에 따라 두 나라는 다시 휴전 협상에 들어갔으며, 앞으로 삼년간

 상호 불가침 조약을 맺는 것에 동의 함.

                  

 니더우드 왕국 제 17용병부대      

 총 책임자 하탄 아베브 기록'  

 하탄은 자신의 친구가 늘 놀리던 그 험악한 미소를 얼굴에 띄웠다.

 그리고 그 양피지를 자신의 서랍 속에 집어넣고는 의자에 몸을 파묻었다.

 한 손이 움직여 다른 서랍 속에 비치되어있는 술병을 꺼냈다. 

 그는 천천히 술병을 따서 목구멍 속으로 내용물을 흘려보냈다.

 늘 이런 식이다. 전쟁이 끝나면 분명 평화가 오는 것일 텐 데도,

 그는 항상 이 순간에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심한 구역질을 느꼈다. 

 왜 일까. 왜 이다지도 평화보다 전쟁이 익숙해져 버린 것일까.

 문득 하탄은 자신이 찾아 헤매던 것을 찾기 위해 길을 떠난 친구가

 보고 싶어졌다. 그러나 지금 그는 여기에 없었고, 그래서 하탄은

 술병에 남은 술을 다시 들이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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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팔장 일편에서 가라한은 미친 짓을 한번 해보았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똑같은 사건을 서로 다른 세 개의 시선에서 서술해본 것이지요.

 시리아스의 시선은 날 사랑하지만 내가 사랑하지 않는 이의 것,

 카프린의 시선은 내가 사랑하지만 날 사랑하지 않는 이의 것,

 그리고 탈신과 레크의 시선은 내가 사랑하지도 않고 날 사랑하지도 않는 이의 것.

 북녘을 다스리는 검은 물의 가라한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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