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 (40/65)

 #4.

 전쟁이 끝난 후의 진지는 승패에 상관없이 무척이나 조용하다.

 아까까지 흘렸던 자신과 동료들의 피에 지친 용병들이 가장 손쉬운 안락처로

 잠을 선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달은 서편으로 지고 해가 다시 사막 위로 떠오르자, 아즈탄 협곡의

 용병기지는 하탄 대장의 상금 수여식이 있기도 전에 다시 웅성거리며

 활기를 되찾고 있었다. 

 전쟁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한 헌은 피식 웃었다.

 바로 자신의 눈앞에서 동료가 피를 뿌리며 죽어갔지만, 그래도 자신은 살아남아

 자신이 쓰러트린 적의 수급만큼 상금을 받고 즐거워하는 것이다.

 아니, 어쩌면 즐거워하는 척 하면서 죄책감을 떨쳐버리고 있는 지도 모르지.

 헌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전쟁을 처음 겪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감상에 젖어있는 것은 자신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하탄의 굵고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다음 상금 수여자를 호명하고 있었다.

 "메슈 베나드 휘하 특수 분대 소속, 선우 헌! 앞으로 나오시오!"

 헌은 고개를 들고 가슴을 폈다. 심호흡을 한번 깊게 한 뒤, 그는 천천히

 자신의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단상이 보였다.

 그리고 그 위에 앉아있는 검은 피부의 사내의 얼굴이 들어왔다.

 그 사내를 지나쳐 헌은 하탄의 앞에 섰다. 그가 뭐라고 중얼거리는 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는 마장기를 베어냄으로 해서 '도부수로서의

 자신'을 지킬 수 있었고, 그래서 당당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태도는 지상 최강의 종족-자신의 추측이 맞는다면 틀림없이

 '그 종족'일 흑발의 사내 앞에서도 지속될 수 있는 것이었다.

 드디어 하탄의 말이 다 끝나고 그에게 상금이 수여되었다. 헌은 그것을

 번쩍 들어보이며 시리아스를 찾아냈다. 그리고 그녀에게 웃어보였다. 

 와아아-! 

 어느샌가 일어난 함성 소리는 아즈탄 협곡을 가득히 메우고 있었다.

 단지 느낌뿐일지는 몰라도, 지독하게 맑은 하늘 아래에서 였다.

 ※     ※     ※

 상금 수여식이 끝난 후에는 늘 그랬던 것처럼 잔치가 벌어졌다. 게다가 오늘은

 특별하게도 아즈탄 용병기지의 대 퀘타라스 방어 성공 50회란 기록을 달성한

 날이었다. 그래서 모든 용병들은 서로서로 잔을 부딪히며 승자만이 가질 수 있는

 쾌감에 빠져 있었다. 

 레크와 탈라이신도 예외는 아니어서, 신참 주제에 가장 많은 상금을 받은

 보라빛 머리칼의 소년과 그 동료인 블러드 엘프를 붙잡아 놓고 억지로 술을

 먹이고 있었다. 

 탈라이신이 굳이 사양하려 하는 시리아스에게 계속 잔을 권하고 있을 때,

 쿵! 소리가 나며 그의 눈앞으로 묵직한 것이 꽂혔다. 

 탈라이신은 그 무지막지하게 생긴 물건의 주인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군말없이

 몸을 옆으로 움직여 자리를 내주었다. 

 닻을 휘둘러 탈라이신을 밀어내고 앉은 알리스의 얼굴엔

 전혀 미안해하는 기색이  없었고, 그래서 시리아스는

 그녀가 빙그레 웃으며 얼굴을 들이밀 때 약간 당황했다.

 "안녕?"

 "아…안녕하세…."

 당황 중에도 애써 나온 시리아스의 인사말은 알리스의 휘휘 내저은 손에 의해

 끊겨버렸다.

 "아, 존댓말은 싫어. 그냥 말 놓으라구. 게다가 엘프잖아. 아무리 젊게 보인다

 해도 나보단 나이 많을텐데 뭐." 

 "아, 저는 이게 편하…."

 알리스는 뒷머리를 벅벅 긁는 시늉을 하더니 다시 웃으며 시리아스를

 빤히 쳐다보았다.

 "뭐, 그럼 할 수 없지. 근데 이름이 뭐야?"

 "…시리아스…시리아스 뮤프넬입니다."

 "시리아스라고 불러도 되지? 난 알리스, 알리스 트로이네. 헤르메스를 모시는

 신관으로, 전직 해적선 부선장이지."

 "아, 네…."

 시리아스의 눈이 별로 커지지 않았다고 해서 그녀를 탓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엘프란 숲의 종족이고, 숲의 종족은 호수는 많이 볼 수 있지만 바다는 별로 접할

 기회가 없다는 것을, 아마조네스 출신으로 퀘타라스에서 노예 생활을 한 바 있는

 알리스로서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닻을 휘둘러 폼을 잡는 대신, 다시 미소를 지으며 시리아스에게

 다가가는 쪽을 선택했다.

 "아, 바다를 본 적이 없겠구나? 바다는 말야, 엄청 큰 호수와 같아.

 끝이 안 보이지."

 "어떤 느낌이죠, 바다라는 것은."

 시리아스라는 이름의 엘프가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알리스는 정말

 호기심에 가득 찬 그녀의 눈동자가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그녀는 바다에

 대한 느낌을 사실대로 말해버렸다.

 "바다의 느낌이 뭐냐고 물으면…글쎄, 대답하기가 좀 그런데?

 그러니까, 음…그건 아마도 갈매기의 끼루룩하는 울음소리와

 눈물날 정도로 짠 소금 냄새와 그리고…."

 "그리고 또 뭐죠?"

 "…몸서리쳐질 정도로 다가오는 시간의 무게…뭐, 이런 것들을

 모두 담고 있는 거지."

 알리스는 다시 빙그레 웃으며 시리아스에게 잔을 권했다.

 "아, 복잡한 이야기는 하지 말자. 난 지금 네가 마음에 들어서 여기 왔고,

 또 너하고 친해지고 싶으니까. 자, 한잔 마셔."

 "저…전 술은 잘…."

 "걱정 붙들어 매. 그리고 처음 만난 사람끼리 친해지는 데는 술만큼

 효과적인 방법이 없다구. 자, 마셔!"

 지금도 충분히 친해진 것 같은데요…. 시리아스는 그 말을 입밖에

 내지 못한 채로, 알리스란 이름의 새로 사귄 친구가 권한 잔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그 속의 것을 천천히 마시기 시작했다. 

 정신이 팽글팽글 도는 것이 느껴졌다. 눈앞에 드밀어진 알리스의 웃는 얼굴이

 약간 흐릿해졌다. 그리고 시리아스는 자신이 방금 사귄 친구에게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을 준비가 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시리아스는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에게는…."

 ※     ※     ※

 마오는 홀로 조용히 술병을 기울이고 있었다. 옆의 레크가 헌이라고 불리는

 소년의 머리칼을 휘어잡든, 그 보복으로 소년이 던진 접시에 레크 옆에 앉은

 탈라이신의 이마가 맞든, 그가 술을 마시는 데에는 전혀 지장을 주지 않았다.

 한참 그렇게 술을 마시던 마오는 문득 자신의 허리춤에 매달려 있는 가죽 부대를 

 끌러보았다. 그곳에는 자신이 여태까지 만들어온 작품들과, 앞으로 만들 작품에

 필요한 재료들이 담겨 있었다. 

 그 중에서 마오는 나무토막 하나를 끄집어내었다. 어린 소녀의 부조가 새겨진

 전나무의 나무토막이었다. 그의 무뚝뚝한 입가에 언뜻 미소가 맺혔다.

 그의 투박한 손이 섬세하게 새겨진 소녀의 얼굴을 쓰다듬더니 하나의 이름이

 그의 입에서 새어나왔다.

 무척 그리운 듯한, 그리고 어딘가 슬퍼보이는 어조였다.

 "…사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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