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헌은 눈을 들어 자신의 앞에 앉은 사내의 얼굴을 주시했다.
카프린, 카프린 데 블라키프. 그가 알기로는 이런 발음을 지닌 이름은
저 북쪽의 콜화이트 연합의 작명법을 따른 것이다.
그럼 그는 북에서 온 것일까. 그렇다면 저 사내의 검은 피부는 한가지 방법으로
밖에 설명되지 않는다. 블랙 드래건의 폴리모프. 블랙 드래건은 검은 색과
친숙하므로 피부와 모발, 그리고 동공도 검은 색으로 하기 일쑤다.
적어도 헌은 그렇게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하얀 눈동자는 또 무엇으로
설명해야 하는걸까. 문득 아까까지 자신의 의식 속에 들어와 있던 레일리스와의
대화가 떠올랐다.
그녀는 다짜고짜 자신에게 이렇게 물어왔다.
'넌 누구지?'
그리고 그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묻지마, 귀찮아.'
하지만 그녀는 그것으로 물러나지 않고 끈질기게 그에게 물어왔다.
결국 다음과 같은 대화가 이루어졌다.
'넌 누구지?'
'두 번씩이나 같은 말을 하게 하지마.'
'넌 누구지?'
'……………'
'생각해봐, 넌 누구인지.'
'난 망나니, 그래, 망나니야.'
'그것뿐이니?'
'그래, 그것뿐이다. 난 망나니다.'
'그럼 네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지?'
'내가 원하는 것…이라.'
'네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이지?'
'내가 원하는 것은….'
'부탁이야, 생각해내. 네가 무엇을 원하는지, 그리고 네가 누구인지를.'
'난…난…난 피를 원하고 있어. 그래, 피냄새를 맡길 원해.
그것이 누구의 것이건 상관하지 않아. 설사 내 몸에서 흐르는 피라 할 지라도….'
'…정말이니? 정말 그러길 원하니?'
'더 이상 네 말을 듣고 싶지 않아.
난 도부수고, 사람을 죽이는 일에 익숙해져 있어. 단지 그것뿐이다.'
'…후회할 꺼야. 언젠가 넌 무너지고 말아…틀림없어.'
'그렇다 해도 상관없지. 그리고 맘에 담고 있는 것도 없으니 후회할 것도 없어.'
'바로 그걸 후회할 꺼야. 공허한 채로 살아왔다는 것에 대해….'
'후훗, 네가 무슨 상관이지? 꺼져버려.'
그렇게 대화는 끝이 났지만 아직도 헌은 그 서큐부스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대체 그녀는 뭘 말하고 싶었던 걸까.
그녀의 목적은 날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었나.
헌은 피식 웃었다. 그리고 카프린을 쳐다보았다. 마침 그도 얼굴을 들고 있어서,
둘의 눈빛은 공중에서 얽혀버렸다.
헌은 다시 한번 웃었다. 그리고 몸에 흐르는 기를 다스려 보며 중얼거렸다.
"알아내려면 부딪혀 보는 수밖에…."
자리에서 일어선 헌은 그에게로 걸어갔다. 그리고 자신의 칼을 뽑아 그의 앞에
던져 꽂았다. 이게 무슨 뜻이냐는 눈초리를 온몸에 받으며, 헌은 눈초리가
닿는 곳마다 알 수 없는 쾌감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헌은 그대로 서서 카프린을 향해 나지막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당신과 한번 겨뤄보고 싶습니다."
카프린의 얼굴에 웃음기가 맴도는 것이 보였다. 그는 몸을 일으키는 것으로
그의 요청에 대답을 대신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카프린이 어깨에 앉은 새를
날려보내는 것을 신호로 둘은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 ※ ※
시리아스의 붉은 눈동자는 약간 흐려져 있었다. 머리칼은 이미 흩어져 바닥 위에
널려져 있었고, 그래서 알리스는 그녀의 손가락으로 마음껏 시리아스의 머리칼을
갖고 장난칠 수 있었다.
그 상태로 시리아스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아까부터 이어져 오던 얘기를 천천히
마무리 짓고 있었다.
"…완전한 빛, 완전한 어둠에 속한 족속들은 서로간에 뿐 아니라 자신들끼리도
사랑할 수 없죠. 그들은 그 자체로 완전하니까. 만일 완전한 빛에 속한 족속들이
자신들끼리 사랑을 하게 된다면 서로의 빛이 더해져 하나의 빛이 되겠죠. 어둠의
족속들 역시 마찬가지고."
알리스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하긴 이 블러드 엘프도 어떻게 보면 어둠에
속한 족속이라 볼 수 있겠지. 그리고 그녀는 시리아스의 말 중 궁금증을 일으킨
부분에 대해 물었다.
"그럼 빛과 어둠, 서로 간에는?"
"빛에 어둠이 파묻혀 버리거나, 아니면 어둠이 빛을 집어삼키거나 하겠죠."
알리스의 눈이 빛났다. 시리아스가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 알게 된 것이다.
"……그러면 당신은…."
"네, 전 두려운 거예요. 어둠에 속해있는 그가 절 사랑함으로 해서
더 짙은 어둠인 내 안에 파묻혀 버리는 일은…그런 일은 전 바라지 않아요."
알리스는 씨익- 웃으며 시리아스의 어깨를 껴안아갔다.
"헤, 이거 재밌는걸? 그래서 그런 이유로 넌 저 애에게 매어 있는거야? 사랑이란
이름의 조화를 이루는 일에 충실하기 위해서?"
"…짝사랑이에요."
"뭐 어느 쪽이던 상관없잖아. 게다가 둘 모두 영원한 것은 아니니까.
그건 그렇고 나 당신한테 호감이 가는데…?"
알리스의 눈이 약간 짓궂게 변하더니, 시리아스의 입술 쪽으로 얼굴을 숙여졌다.
다음 순간, 시리아스는 술이 확 깨버리는 것을 느끼며 일어나 앉아야 했다.
그녀의 눈엔 무슨 짓이냐는 표정이 어려있었다.
"뭐…뭘 한 거죠?"
"뭐긴, 입맞춤한 거지.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당신을 안고 싶은거고."
시리아스의 질겁하는 태도에도 불구하고, 알리스는 방글거리는 웃음을
잃지 않았다. 등을 감싸안으려 하는 알리스의 손을 피하며, 시리아스는
약간 의아하다는 눈으로 자신의 앞에 앉은 헤르메스의 무녀라는 여인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당신은 여자…."
"눈에 보이는 건 그리 중요하지 않아. 게다가 난 사내라면 지긋지긋 하다구."
"아, 저…."
시리아스의 몸을 그대로 안아가려는 알리스를 멈추게 한 것은 모닥불 근처에서
터져나온 폭음이었다. 그리고 폭음을 일으킨 장본인들의 정체는 시리아스의 몸을
떨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시리아스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땅바닥에 쓰러져 있는 소년에게 달려가
그를 안아들었다. 그녀의 입에서 찢어지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와 협곡 내에
울려퍼졌다.
"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