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 (42/65)

 #6.

 온 몸의 마디가 쑤셔오는 것이 느껴졌다. 가냘픈 손이 그의 몸 구석구석을

 만져감에 따라, 그의 입에선 짧은 신음성이 새어나왔다.

 자신을 만지고 있는 이는 우는 듯한 표정의 시리아스 같기도 하고,

 고혹스런 모습의 레일리스 같기도 했다.

 문득, 헌의 기억 속으로 방금 벌어진 상황이 재연되기 시작했다.

 카프린의 손에서 발사된 매직 미사일을 피해 접근한 그의 머리 위로

 검은 색 칼날이 떨어졌다. 헌은 어깨를 잽싸게 빼어 그것을 피하며

 몸을 맹렬히 회전시키기 시작했다. 

 그의 어깨와 팔꿈치와 손목이 금방이라도 튕겨나갈듯 팽팽해졌다. 그리고 강맹한

 몸통 공격인 천인참 팔식 곤옥쇄(昆玉碎)를 시전해 내었다. 

 헌의 입가에 허탈한 미소가 맺혔으나 이내 사라졌다.

 다시 한번 자신을 막는 벽을 넘어 '도부수'로서의 자신을 확인하는 데에는

 피냄새와 싸움에서 퍼져오는 살기만으로도 충분했다.

 거기에 굳이 감정을 넣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렇게 어울리지 않는 감상을 서둘러 끝맺어버리며 카프린의 명치를 향해

 달려들던 헌은, 갑작스럽게 자신의 발이 무거워진 것을 느꼈다.

 그리고 주춤대는 그의 목울대를 향해, 카프린의 상완근이 날아들었다. 

 퍼억-! 요란한 소리를 내며 헌은 자신의 몸이 날아가고 있는 것을 알았다.

 벽에 부딪힌 것까지는 알겠는데, 그 다음은 기억이 나질 않는다.

 기절해버린 것일까. 

 무의식으로 떨어진 것이 몇번째일까. 그 서큐부스를 만난 이후부터는

 너무 정신의 벽이 허술해졌다는 것이 절절히 느껴졌다.

 그때 누군가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헌은 그 소리를 따라갔다.

 시리아스의 슬픈 목소리도 아니고, 레일리스의 교태로운 목소리도 아니었다.

 그는 눈을 떴다. 

 ※     ※     ※

 수정구 안이 하얗게 빛나더니 갈색 로브를 뒤집어 쓴 금발 사내가 나타났다.

 사내의 눈썹이 약간 치켜 올라가더니 고저없는 음색이 흘러나왔다.

 "무슨 일인가, 키란. 난 지금 휴면 중이다."

 "아, 알려드릴 것이 있어서요. 의뢰하신 일의 마지막 것을 방금 처리했습니다."

 "그런가. 수고했다."

 자신의 은발을 쓰다듬어 뒤로 넘기면서, 키란은 말을 이었다.

 "그리고 지금 당신들의 마리오네트는 그의 소울 페어와 정신적으로 교감을

 시도했고, 소울 페어는 반응하기 시작했습니다."

 "…드디어 시작이군."

 사내의 목소리에 희열의 감정이 뒤섞여 있는 것이 수정구 너머로 전해져왔다.

 점차 어두워지는 수정구를 갈무리하여 품속에 집어넣으며, 키란은 어둠 속에서

 씨익 웃었다. 

 ※     ※     ※

 "여어, 정신이 들어?"

 "아아…그럭저럭."

 카프린의 갈색 손바닥이 헌의 이마를 짚는 것이 시리아스의 눈에 들어왔다.

 헌의 눈빛이 약간 떨리는 것이 그녀의 마음속을 가득히 채웠다.

 침대에 누워있는 헌과 그런 헌의 머리칼을 쓰다듬어 보는 카프린이란

 남자의 모습은 무척이나 어울려 보았다.

 시리아스는 가슴 한켠이 아려오는 것을 느꼈다. 할 수만 있다면 자신도

 저 풍경 안에 뛰어들고 싶었다. 그의 품에 뛰어들어 아까부터 참아왔던 울음을

 터트리고, 비록 거짓되긴 하지만 정성스러운 그의 손길을 몸에 받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는 끝내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녀는 엘프, 조화를 중시하는

 종족으로서 무엇보다도 조화로워 보이는 저 두사람 사이의 풍경을 깨트릴 수

 없었던 것이다. 그녀의 눈동자에 헌이 카프린의 부축을 받아 일어나는 모습이

 뿌옇게 어렸다.

 문득 헌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목에 와닿는 은은한 통증이 그의 정신세계를

 다시 한번 단단히 조여주었다. 그리고 그 상태로 헌은 딱히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입을 열었다.

 "몰랐어요, 내가 전력을 다한 싸움에서 패할 줄은…그리고 그런 싸움에서 지고도 

 내가 살아날 수 있다는 걸…. 돈과 생명을 저울질하는 싸움에서 패한 적은 여태껏 

 없었는데…."

 "말이 서툴군. 지금 모습이 진짜인가?"

 헌의 얼굴은 여전히 가라앉은 듯한 무표정이었다. 그러나 시리아스는 소년의

 속눈썹이 파르르 가볍게 떨리는 모습을 가슴 깊숙이 갈무리 해넣었다. 

 시리아스가 흐릿한 눈동자를 들었을 때, 헌은 카프린을 향해 얼굴을 돌리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어느새 조금씩 잦아들고 있었다.

 "…당신은 날 몰라요. 난 어느 무엇보다도 돈을 중요시하죠.

 세상에서 살아갈 수있는 조건인 명예와 지식, 그리고 돈 중에서 내가 택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으니까. 당신은 이런 날 경멸하나요?" 

 "그래, 난 몰라. 하지만 너 역시도 날 모르지. 이 세상엔 돈이나 권력, 명예보다 

 다른 평범한 것을 더 중요시하는 놈들도 있는 거다. 피차 서로를 모르기는

 마찬가지인데 왜 내가 널 경멸해야 하지?" 

 헌의 눈가에 무언가가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엘시타이여, 당신은 잔인하시군요. 

 결국 내 소원은…내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았어….

 시리아스는 속으로 오열했다. 그러나 그녀의 그런 심정과는 상관없이

 대화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세살 때였어요. 아버지가 모함을 받아 망나니로 추락해버렸고,

 난 그런 아버지의 아들이란 이유로 형장에 끌려나왔죠.

 그때 내게 주어진 과제는 피 튀기는 형장 안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살아남느냐 하는 거였고.

 두려워하거나, 눈물을 흘리거나, 심지어는 숨쉴 시간조차 없었어요.

 그저 다가오는 칼날을 피해 도망치느라 바빴죠.

 그때 내 눈물은 이미 말라버렸을 텐데…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여태까지 모르고 있었던 감정에 넌 눈을 뜬 거야.

 그리고 겨우 외롭다고 느낀거지. 애써 저항하려 하지마. 예전의 네가 사라진다고 

 해서 지금의 너까지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 지금 다가오는 감정들을 받아들여."

 카프린은 가볍게 헌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소년의 몸이 약간 움찔했으나,

 곧 저항을 포기하고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는 행동에 동조하고 있었다.

 문득 헌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믿기지 않게도 그의 목소리는 조금

 떨리고 있었다.

 "…이해할 수 없어. 당신은 분명 남자인데 왜 내가 얼굴도 모르는 어머니의

 모습이 겹쳐 보이는 거지?"

 "그건 아마도 내가 인간이 아니기 때문일 꺼다. 나는 몇십년 간을 홀로 살아왔어.

 그리고 그 상태를 즐겼고. 확실히 인간이라면 할 수 없는 일이지."

 "……그럼 당신은 뭐죠?"

 "글쎄…나도 몰라. 기억을 잃었으니까. 한 가지 확실한 건, 내가 인간은

 아니라는 점이지." 

 카프린은 장난기가 사라진 진지한 얼굴을 소년에게 내밀며 물었다.

 "이런 나의 동반자가 되어주겠어? 한정된 시간 위를 걷는 소년이여."

 헌은 잠시 카프린의 거무스름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소년의 눈동자에 이채를 띈

 하얀 눈동자가 가득히 맺혀왔다. 그리고 그 다음 순간 헌은 눈을 감고,

 입속으로 들어오는 카프린의 혀를 맞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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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팔장 육편엔 동성애가 묘사되어 있습니다.

 사실 이 부분이 젤 이해가 안간다고 멜을 받기도 했는데요,

 주인공인 헌이 허무하게시리 무너져 버린 것은 당시도 말씀드렸듯이

 그가 아무 것도 담지 않은 채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북녘을 다스리는 검은 물의 가라한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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