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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장 : 헤르메스의 무녀 (43/65)

 외장 : 헤르메스의 무녀

 와아아-! 챙챙-! 갑판 위는 대포연기와 쇳소리로 가득 차 있었다.

 일단의 무리들이 펠리 해를 거쳐 퀘타라스로 가고 있던 노예무역선을

 습격한 것이다.

 이미 대세는 해적들에게로 기울어져 있었다. 선원들 대부분은 항복하여

 갑판 한 구석에 묶여있었고, 만일을 대비해 타고 있던 호위대들은

 이미 죽어 넘어져 있었다.

 연기가 채 걷히지 않은 갑판 위를 지나 선실로 발걸음을 향하면서,

 올해 십육 년째로 선장을 해먹고 있는 '강철 머리의 잭'은 다시 한번

 칼을 휘둘러 자기 다리를 부여잡고 있는 호위병의 대가리를 쪼개놓았다.

 '강철머리의 잭'이란 웃기지도 않은 별명은, 그가 포탄을 머리로 받아냈다는

 고참 선원들의 농담 때문에 붙은 것이었다. 

 확실히 내 머리가 좀 단단하긴 하지. 잭 버튼은 그렇게 생각하며

 단단히 잠겨 있을 것이 뻔한 선실 문을 부수기 위해 자신의 머리를 뒤로 젖혔다. 

 빠각-! 기대했던 대로 문은 그가 박치기를 하자 부서졌다. 그러나 문이 열린 것은

 그의 박치기 때문이 아니었다.

 쿠웅-! 소리와 함께 한 뚱보 늙은이의 몸이 문을 부수며 날려온 것이었다.

 잭 버튼은 옆으로 몸을 돌려 그것을 피해내며 어느새 쓰러진 그 늙은이의

 뱃대기를 짓밟고 있는 소년, 아니 남장을 한 소녀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가 막 나타난 소녀를 소년으로 착각한 것은 너무도 표정이 사내처럼 억세고

 단단하게 생겼는데다 머리마저 단발로 쳐올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람 뱃가죽 

 밟는 소리와 더불어 터져나오는 욕설의 고저를 보아 나타난 사람은 확실히

 소녀였다.

 그리고 잭은 그녀가 소녀로서는 차마 입에 담을 없는 욕설을 퍼붓고 있기에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것이었다.  

 "이 개 밑구멍이나 핥다 죽을 영감탱이 같으니라고!

 뭐? 내 신음소리가 일품이라? 어디 이번엔 네가 한번 질러봐라,

 이 암캐랑도 xxx할 색골아!"

 대개 이런 욕설이었다. 잭은 고개를 설래설래 저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제 어지간히 약탈은 끝낸 모양이다. 잭이 해적선장이 된 이후로 아직까지

 지키고 있는 철칙이 있는데, 그것은 절대 사람은 사고 팔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의 그런 철칙에 의해 이 배의 노예들은 모두 풀려날 것이다. 

 그리고 그는 다시 아까의 소녀에게로 눈을 돌렸다. 그녀는 화풀이를 다했는지,

 이미 죽은 듯한 뚱보 늙은이의 몸을 옆으로 치워놓고서는 잭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내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일단 고맙다고 해야겠네요. 이 늙은이는 변태여서 소녀들을 채찍으로 때리며

 그 신음소리 듣는 것을 즐기거든요. 아, 난 알리스 트로이네라고 해요."

 "…노예인가? 이런 상황에서도 꽤나 당당하군."

 잭은 내심 혀를 내둘렀다. 이건 남자 못지 않은 것이 아니라 남자 이상이다!

 자신조차도 자신이 끄는 배 위에 침입자들이 몰려와 선원들을 도륙해버릴 때

 저런 미소를 지을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다. 그런데 겨우 열일곱 정도밖에

 안되어 보이는 저 소녀는 그걸 해보이고 있는 것이다.

 잭은 그녀에게 호감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어디 출신이지?"

 "아마조니아. 전쟁에 참여했다가 포로로 잡혀 퀘타라스의 노예로 팔려갔다가

 이 영감탱이의 노리개로 다시 노예선에 타게 된거죠.

 근데 아저씨 이름은 뭐예요?"

 아저씨라…. 이 '강철 머리의 잭'이 아저씨 소리를 듣게 될 줄은 몰랐는걸?

 잭은 씨익 웃으며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난 잭 버튼이라고 한다. 너희 배를 습격한 해적들의 선장이지.

 아마조네스, 너 혹시 우리 패거리에 낄 생각없나?"

 소녀는 빙긋 웃었다. 웃는 것조차 사내 아이같군 이라고 잭은 생각했다.

 그리고 그녀는 한 손을 사용해서 자신이 밟아 죽인 뚱보 늙은이의 시체를 거뜬히 

 들어보이며 말했다.

 "오히려 내가 부탁하고 싶었어요. 이래봬도 나 힘세니까, 좋은 자리 줘야 되요?!"

 잭의 얼굴에 놀랍다는 표정이 역력해졌다.

 "…신력인가? 너 이제 보니 무녀로군?"

 "도둑과 상업의 신 헤르메스의 무녀죠. 잘 부탁해요, 아저씨." 

 또 아저씨 소리냐…. 잭은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한 불만을 조용히 삭히며,

 이번엔 돛대를 뽑아 흔들어 보이고 있는 알리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짠 내 나는 바다 내음 속에서, 그녀는 웃고 있었다.

 ※     ※     ※ 

 "어이, 알리스! 이 녀석 좀 봐줘. 아까부터 속이 이상하데."

 "을! 내가 니들 소화약이라도 되냐?!"

 물방울 무늬가 새겨진 두건을 머리에 두르고 있던 단발 소녀가

 약간 짜증스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녀의 뒤에는 곤란한 얼굴을

 하고 있는 텁석부리 사내와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 있는 청년이 서있었다. 

 그들의 얼굴을 본 소녀는 뒷머리를 한참이나 긁적거리더니,

 손을 휘휘 내저으면서 할 수 없다는 투로 말했다.

 "젠장, 괜히 무녀라고 밝혔나봐…. 앉아, 임마! 그리고 크랙, 넌 가봐."

 "그래, 잘 부탁한다."

 크랙이라고 불린 텁석부리 사내는 청년의 뒷머리를 한번 쥐어박고는 갑판을 향해 

 휘적휘적 걸어갔다. 쥐어 박힌 뒷머리를 만지작거리며 사과통 위에 걸터앉은

 청년은 이내 눈길을 소녀 쪽으로 돌리더니 어색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안녕, 알리스…. 자주 보게 되네."

 "안녕 못해! 야, 대니. 넌 말야, 해적 후보생이면 해적 후보생답게 최소한

 식성 정도는 바꿔야 되는거 아냐? 어찌 된 놈이 벌써 삼개월이 지나도록

 생선 비린내에 맛을 못 들여?" 

 대니는 멋적은 듯, 얼굴을 살짝 붉히면서 괜히 뺨에 난 상처를 긁적였다. 

 "바꿀려고 노력중이야. 그리고 알리스, 난 후보생은 아닌데….

 엄연한 이등 선원이라고."

 "시꺼! 이등이나 후보생이나 그게 그거지! 이제 말걸지 마!"

 알리스는 눈썹을 치켜올려 보이더니, 이내 진지한 얼굴로 두손을

 대니가 아프다고 한 부위에 갖다대었다. 이내 손바닥에서 백색의 빛이

 새어나오더니, 그 부분을 구석구석 어루만지며 스며들어갔다. 

 대니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미소지었다.

 "고마워. 매번 느끼는 거지만 네 신성마법은 정말 대단…. 으악!"

 "그걸 이제 알았냐! 우와악! 뭐, 뭐야?"   

 아차 하는 사이 알리스의 가슴에 얼굴을 묻게 된 대니는 질겁하며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알리스는 도리어 더 깊숙하게 그의 머리를 껴안으며, 몸을 굴려 갑판

 으슥한 곳으로 자리를 옮겨갔다. 

 그녀의 눈동자엔 이미 장난기는 사라져있었다. 허리춤에 매달려있는

 자신의 무기-부선장이 반농담으로 내준 배의 닻을 확인해본 알리스는,

 조용한 목소리로 붉어질대로 붉어진 대니에 귀에 대고 속삭였다.

 "넌 여기서 꼼짝말고 쳐밖혀있어, 알겠지?"

 "……."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알리스는 닻을 뽑아들며 갑판으로 나섰다.

 아까 자신들의 몸에 와닿은 충격은 분명 배의 충선으로 인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들이 탄 배에 박혔다는 것은….

 "감히 이 알리스 님이 타고 있는 배에 침입해오다니! 배짱 한번 좋구만!"

 "케에엑!"

 부우웅-! 둔중한 파공음과 함께 알리스의 앞을 막아섰던 거구의 사내가

 가슴이 부숴진 채로 날아갔다. 다시 공중으로 치켜올려진 닻은 빙글빙글 돌며

 선두에서 지휘를 하고 있던 갑옷 차림의 사내를 향해 던져졌고, 목표물은

 어김없이 바다 속으로 떨어져버렸다. 

 "고마워, 알리스!"

 "고맙다는 인사보다 왜 이렇게 된 건지 설명이나 해줘, 선장!"

 알리스는 자신의 손짓에 따라 되돌아 온 닻을 손에 쥐며 선장 잭 옆으로

 뛰어내렸다. 화살 세례가 쏟아졌지만, 알리스가 주위에 쳐놓은 수호막으로 인해

 그들 주위에서 맥없이 떨어질 뿐이었다.

 잭은 한숨 돌린 듯, 심호흡을 한번 하더니 특유의 걸걸한 목소리로 짖어대기

 시작했다.

 "멍청이같은 부선장이 추격당하는 배를 구해주는 바람에 우리가 저 추격선하고

 싸우게 된 거지! 간단하게 말해 그렇게 된 거야!"

 "그래, 그 멍청이 부선장은?"

 잭은 또다시 자신의 검을 내리쳐 다가오는 적들의 머리를 갈라놓으며

 돛대 밑을 가리켜 보였다. 돛대 밑에는 늘 허허 거리는 웃음을 터트리던

 술주정뱅이 마틴의 몸이 고슴도치가 되어 놓여있었다.

 알리스는 휴-하는 한숨을 내쉬며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분명 저 멍청이 부선장은 선장에게 날려오는 화살을 막으며 죽은 거겠지.

 당신은 정말 바보야. 그래서 쬐끔은 맘에 들었었는데. 안녕, 마틴.

 그녀의 입에서 주문의 시동어가 걸렸다.

 "[스캔 루머]!"

 휘이잉-! 소리없이 주문은 적들의 사이를 파고들었다. 그걸로 끝이다.

 서로에게 불신을 심어주는 헤르메스의 언변을 당해낼 정신력이 저들에게

 있을 턱이 없다.

 여태껏 자신들을 향하던 창을 서로에게 돌려대는 적들의 모습을 뒤로 한 채,

 알리스는 뒤로 빠져나가 술통 사이에 몸을 뉘었다. 잭이 걸걸한 목소리로

 뭐라 하는 것이 들려왔지만 신경쓰기 싫었다. 

 바보 멍청이 마틴. 안녕이야. 더 이상의 인사는 해적들에겐 어울리지 않지.

 당신의 시체가 바다 물고기들에게 일용할 양식이 되길 바래.

 그리고 알리스는 눈을 감아버렸다. 싱싱한, 그리고 한편으론 비릿한 바닷내음이

 코끝을 간질렀다.

  ※     ※     ※

 "…그런 이유에서 이 몸이 부선장이 된 거지."

 "흠, 그랬구나. 이제 궁금증이 다 풀렸어."

 "데라, 그럼 내 입맞춤을…."

 알리스는 아까부터 벼르고 있었는지, 버둥대고 있는 데라의 목을 옴짝달싹 못하게

 팔로 죄고는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야 말았다. 겨우 벗어난 데라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알리스의 사정거리에서 비켜나 헝클어진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네가 남성 혐오증인 것도 알겠고, 동성애자인 것도 이해하겠는데,

 왜 하필 그 상대가 나여야 하는거야?"

 "그야…내 마음에 들었으니까."

 알리스는 언제나 그렇듯이 당당하고도 간결하게 답변을 하고는 자리에 주저앉아

 자신의 닻을 꺼내 닦기 시작했다. 한참 닦여 검푸른 바다빛을 내기 시작한 것을

 보며, 데라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근데, 알리스. 너 말야, 맨 처음 우리들을 구출하는 것에 대해 반대했다며?"

 "반대는 아니고…약간 찜찜했을 뿐이지."

 데라는 한껏 눈썹을 찌푸려 보였으나 여전히 장난기 있는 웃음은 입가에 매달린

 상태였다.

 "거짓말. 너 이렇게 말했었다며. '있지…그 사람들 구해주지 말았어야 했을지도

 몰라.'라고 말이야."

 자신의 말투를 어색하게 재현해내는 데라를 다시금 껴안은 알리스는,

 드디어 아까부터 노리던 데라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갖다대는데 성공했고,

 볼이 부어오른 데라를 무시한 채로 계속 자신이 하던 일을 하기 시작했다.

 한참 알리스를 노려보던 데라 역시, 알리스가 그 정도로 움직이지 않는다는걸

 알았는지, 그녀 옆에 주저앉아 자신의 화장을 고치기 시작했다.

 일반인들은 거의 하지 않는 진한 화장…. 그녀는 창녀였던 것이다. 

 ※     ※     ※

 "제기랄! 이게 다 뭐야!"

 "욕할 시간있으면 한놈이라도 더 죽여!"

 자기 옆에 서서 투덜거리고있는 대니의 어깨를 툭 친 알리스는,

 이미 외워두고 있었던 역중력의 주문을 적군이 몰려있는 곳으로 날려보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투덜거리는 것을 잊지 않았다.

 "쳇, 아무리 퀘타라스의 성기사단이라지만 이렇게 정신력이 강하다는건

 말도 안돼! 내 스캔 루머의 주문이 통하지 않다니!"

 "…네 주문이 약한거 아냐?"

 알리스는 마악 자기 옆으로 달려드는 창을 피해내며 대니를 향해 눈썹을

 치켜올렸다. 

 "너 감히 내 실력을 의심하는 거냐? 에라, 이거나 먹어랏! [메르큐스]!"

 주문이 끝나자마자 반고체 상태의 하얀 물줄기가 쏟아져 나오더니 배의 앞부분에

 침입해 도열해있는 궁수들의 몸을 휘감아갔다. 비명도 없이 뭉개져 가는 동료들의

 모습에 질렸는지, 적군의 기세가 약간 줄어들었다. 

 그러나 알리스는 조금도 마음을 놓지 않았다. 확실히 저들은 자신들이 예전에

 구해낸 바 있는 그 배-데라가 타고 있었던 배를 추적해 온 것이 확실하다.

 그 이유는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알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저들은 자신들을 살려두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알리스는 당연하게도 아직 죽을 마음이 없었다.

 "크아악!"

 "대니!"

 알리스의 몸이 흠칫 했다. 그녀의 눈가에 목에 화살을 맞고 쓰러지는

 대니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녀의 눈이 부릅떠졌다. 닻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대로 그녀의 몸은 앞으로 쏟아져 나아갔다.

 그녀의 입에서 주문의 시동어가 튀어나왔다.

 "받아봐라! [인더루나]!"

 푸른빛이 감도는 광채가 창병 뒤에 도열한 석궁 사수들을 향해 날아갔다.

 그대로 알리스는 결과도 보지 않은 채 창병들의 사이로 뛰어들었다.

 검푸른 빛이 감도는 닻이 휘둘리며, 창병들 발밑에 깔려있는 데라의 알몸이

 눈에 들어왔다.

 알리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의 몸에 흐르는 신력이 폭주할 것만 같았다.

 그리고 자신이 알고 있는 최고의 치료 주문이 거꾸로 돌기 시작했다. 

 "[안티-케두케우스]!"  

 하얀 빛이 퀘타라스 병사들의 몸 위로 내려 쬐었다. 병사들의 몸에 경악과

 절망의 빛이 맺혔다. 한순간의 혼란과 동요가 잇달았고, 곧 이어 죽음과도 같은

 침묵이 찾아왔다.

※     ※     ※

 알리스는 혼자 갑판 위에 서있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하복부가 엉망이 되어있는 

 데라의 알몸을 안은 채였다. 그녀의 주위에 살아있는 생명체는 보이지 않았다. 

 최고의 치료 효과를 보인다는 헤르메스의 뱀 지팡이는 과연 거꾸로 휘둘리자

 뼈가 으스러지고 살이 어가는 파괴주문으로 돌변했다. 촉망 중에 데라 주위에

 밖에 보호막을 치지 않아서 아군과 적군을 가리지 않고 모두 녹아버린 것이었다. 

 알리스는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자신이 실수로 죽여버린 잭과 동료들은

 있을 턱이 없었다. 퀘타라스의 성기사단은 엄격한 훈련 과정을 통해 엄선되는,

 엄청난 실력의 소유자 들이다. 결코 십칠년 차의 해적선 선장과 그 부하들이

 당해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녀가 신경쓰고 있는 것은 싸움이 일어난지 얼마 안되어 전멸당한

 그녀의 동료들이 아니었다. 그녀는 데라의 몸 상태가 걱정되었던 것이다. 

 데라의 눈동자는 공포로 인해 완전히 풀려있었다. 창녀는 퀘타라스에서

 가장 하대받는 직업, 아마 싸움이 시작된지 얼마 안되어 잡혀가 병사들 사이에서

 윤간당했겠지. 전쟁 중에선 그리 드문 일은 아니었지만 알리스는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문득 데라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엔 뿌연 막이 어려있었다.

 "…알리스, 나 죽는거야?"

 "글쎄, 그런 소리하는걸 보니까 아닌 것 같은데?"

 알리스는 애써 웃음을 지어보였지만, 침중한 안색을 감추지는 못했다.

 그녀의 몸은 이미 엉망이 되어있었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남자를 받아들인

 모양인지, 기력이 소진해 있었다.

 그러나 데라는 걱정스런 얼굴을 한 알리스를 향해 살짝 웃어보였다.

 "결국 네가 말한대로 되었네…. 사실 우리들 난민이었어. 퀘타라스와

 니더우드 간에 전쟁이 잦다 보니까 생긴 거지. 하지만 난민이 발생했다는

 사실이 대외로 나가면 전쟁에 불리해지니까…그러니까 그 사실을 은폐하려고

 우릴 추적한 거야…."

 "……."

 "알리스…."

 "…왜?"

 데라의 얼굴에 희미한 빛이 떠올랐다. 그대로 그녀는 살짝 상체를 일으키려 했다.

 그녀의 입가에 이상야릇한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나 입 맞춰줄래?"

 알리스는 애써 웃었다. 그리고 몸을 숙여 데라의 입술에 정식으로 입을 맞추었다.

 자신의 혀가 데라의 입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느끼며, 알리스는 조심스럽게

 이빨 사이에 숨겨둔 독액을 그녀의 목구멍 속으로 밀어 넣어주었다.

 한참 후, 알리스가 데라의 입술에서 떨어졌을 때, 그녀는 방금 자신이 보여주었던

 그 미소를 띈 채로 잠들어있었다. 

 알리스의 얼굴에 허탈한 기색이 감돌았다. 문득 맥빠진 목소리가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이제 어떡하나…. 동료들은 모두 죽어버렸고, 용병이나 되어볼까?"

 그렇게 혼잣말을 중얼중얼 거리던 알리스는 이윽고 몸을 일으켰다.

 한번 주위를 죽 둘러보며, 배 구석구석을 뇌리 속에 담은 그녀는,

 이내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파앗-! 흰빛과 함께 그녀의 몸은 간데 없었다. 이제 바다 위에는 마치 연인처럼

 서로를 부둥켜안고 있는 배 두척만이 사람을 잃고 떠돌고 있었다. 

 +              +                +

 '알리스'란 캐릭터를 만들어내기 위해, 

 가라한은 슬레이어즈의 리나 인버스 양을 기초 모델로 삼고,

 거기다 길티 기어의 메이를 차용했답니다.

 특히 메이 양이 휘두르는 닻은 그대로 알리스가 차게 되었지요.

 개인적으로 젤 맘에 들어하는 캐릭터인지라 다른 외장들보다

 그 길이가 꽤 길답니다. 맘에 들어하시면 기쁘겠네요.

 북녘을 다스리는 검은 물의 가라한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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