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 (44/65)

 #1.

 시리아스는 불그스름한 눈동자를 들어, 카프린의 등에 기대어 잠들어있는

 헌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저 소년은 지난 삼일 동안 평생 울었을 눈물을 흘렸고, 

 평생 지었을 웃음을 터트렸으며, 그리고 평생 했을 사랑을 한 것 같았다.

 그리고 지금, 엠트 분지로 향하는 말안장 위에서 저 소년은 평생 짓지 않을 것

 같았던 편안한 얼굴을 하고서, 저렇게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여태껏 공허한

 의식 속에서 자신을 긴축시킨 채 살아왔던 그로서는 저런 일은 처음일 것이

 분명했다.

 시리아스는 물론 그런 소년의 휴식을 방해할 생각은 없었다. 다만 마음속에

 걸리는 것이 몇 가지 있을 뿐이었다.

 시리아스의 기억 속에서 요새에서의 마지막 밤에 그 서큐부스와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늘 그렇듯이 그 존재는 갑작스럽게 그녀의 의식 속으로 들어왔고,

 그녀 또한 늘 그렇듯이 덤덤하게 방문을 받았다.

 서큐부스는 그녀의 의식 속에 들어오자 마자 시리아스를 향해 용건을 꺼냈다.

 "할 말이 있어. 그에 대한 얘기야."

 그리고 시리아스는 인간의 측면에서 보자면 무례하기 짝이 없는 그녀의 인사를

 당연히 받았으며, 그녀의 이름이 무엇인지 물어볼 생각도 않고 레일리스의 말이

 계속 이어지길 기다렸다.

 "난 그 동안 그를 무너트리기 위해 몇 차례나 그의 의식 속으로 들어갔었다.

 그러면서 그의 정신 세계가 변하는 것을 봐왔지."

 "…지금 그의 정신 세계는 어떤가요."

 레일리스는 여전히 도도한 표정으로 버티고 서서 말하고 있었다.

 아무리 위급한 상황에서라도 서큐부스 특유의 오만함은 지속될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그녀의 표정과는 전혀 상관없이 진지하고,

 또 그만큼 무서운 것이었다.  

 "이제 난 그의 안으로 들어갈 수 없어. 지금 그의 의식 세계는 저 카프린이란

 자가 뿜어내고 있는 어둠의 마나에 보호받고 있지. 최근에, 그러니까 카프린이

 그에게 입맞춤한 순간 들어갔던 것이 마지막이었어. 그의 정신세계는 완전히

 여성화되어 있었지."

 시리아스는 살짝 미소지었다.

 결국…결국 나는…. 엘시타이여, 당신은 역시 잔인하신 분, 무관심하신 분.

 모든 물질에게 관심과 애정을 갖고 있다는 얘기는 결국 어떤 것에도 얽매어 있지

 않다는 얘기. 솔리아드 씨, 당신의 예언은 정확했어요.

 미소지은 채로, 그녀는 자신이 그런 상황에 쳐했음에도 안심할 수 있었던 것에

 대해 말했다.

 "…어찌되었든 그와 함께 있다면 더 이상 헌은 무너지지 않겠군요."

 레일리스의 얼굴이 약간 일그러졌다. 그러나 이내 그녀는 코웃음을 치고는

 날개를 펼쳤다.

 "이렇게 된 상황에서도 그에 대한 걱정이냐? 하긴 엘프니까…."

 그걸로 끝이었다. 레일리스는 곧장 그녀의 의식 속에서 빠져나갔고,

 시리아스는 별이 가득한 아즈탄 협곡의 밤하늘을 올려보며 잠에서 깨어났다.

 그녀의 옆에는 항상 미소짓는-결국 꾸민 채로의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그녀를 안심시켜주었던 헌의 모습은 없었다. 대신 물방울 무늬의 두건을

 둘러쓰고 있는 알리스의 등이 있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녀의 눈에 들어오는 것 역시 알리스의 등이었다. 괜찮다고 하는

 시리아스를 박박 우긴 끝에 자신의 뒤에 태운 알리스의 덕이었다.

 그 덕에 시리아스는 자신이 마음을 내준 그 소년과 나란히 달릴 수 있었지만,

 그 소년의 얼굴을 볼수록 그녀의 마음은 어두워져 갔다. 

 시리아스는 그런 자신의 마음이 들킬까 염려하며, 자신의 앞에 앉아 말고삐를

 재촉하고 있는 알리스의 등에 자신의 얼굴을 파묻었다.

 "하! 하!"

 "이럇!"

 살짝 드러난 그녀의 뺨 위로 애처로운 소리를 내는 바람 한줄기가 빠른 속도로

 스쳐 지나갔다. 그들의 눈앞으로 엠트 분지의 노란 모래먼지가 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     ※     ※

 "지금부터의 여행은 매우 위험해."

 그렇게 서두를 꺼낸 카프린의 얼굴은 말과는 달리 전혀 진지한 표정이 없었고,

 알리스의 장난기 섞인 얼굴로 인해 분위기는 조금도 침중되지 않았다.

 자신의 망토가 알리스가 신은 장화의 걸레로 쓰이는 것을 피하려고 애쓰며,

 카프린은 말을 이었다.

 "우리들은 일단 엠트 분지의 가장자리 선을 따라 걸어간다. 그리고 퀘타라스

 안으로 들어가야 해. 내 기억이 처음으로 시작된 곳으로 가는 워프 게이트는

 퀘타라스의 수도 리용에 위치해있어. 게다가 왕궁 안에 있으니 각오하는게

 좋을 거야."

 힐끔 눈을 돌려 약간 혼란한 듯한 눈빛으로, 그러나 얼굴만은 편안하게 풀려있는

 헌을 바라본 카프린은 망토를 거두어들이며 말 위로 다시 올라탔다. 

 한참 신나게 장화 밑바닥을 그의 망토에 비벼 흙을 떨궈내고 있던 알리스가

 자빠지는 사태가 벌어졌지만, 그는 눈썹 하나 까딱 않고 그의 일행들을

 바라보았다.

 "그럼 출발한다."

 "아, 잠깐만."

 어느새 일어나 옷에 묻은 흙먼지를 깔끔하게 털어낸 알리스가 전혀 안 어울리는

 진지한 표정을 띄고 있었다. 그래서 카프린은 그녀에게 주시했다.

 "카프린, 네 기억이 시작된 곳이 블랙 드래건의 레어라고 했지?

 혹시 그 드래건의 이름 알고 있어?"

 "카프라치오라고 한다더군. 그런데 그건 왜?"

 알리스의 얼굴이 한층 더 진지해졌다.

 "전에 콜화이트 어딘가에서 휴면기의 드래건 하나가 사라졌다는 얘길 들었어.

 그리고 그 드래건 역시 블랙 드래건. 뭔가 좀 이상하지 않아?"

 카프린은 피식 웃었다.

 "그래서 날 그 실종된 드래건이라 생각하는 거야? 휴면기의 드래건은

 활동기 때까지 레어 밖을 나가는 법이 없다는건 너도 알잖아?

 만일 그런 일이 있다면 그건 드래건 로드의 명에 의한 것이고."

 알리스는 어깨를 으쓱였다.

 "좋아, 네가 굳이 확인해야 겠다면 말리진 않겠어."

 승복하는 알리스의 모습에서 등을 돌리며, 카프린은 천천히 고삐를 움직였다.

 아직 그가 동료들에게 미처 말하지 못 한 것이 있긴 했다.

 하지만 자신의 어깨 위에 앉아있는 지지라는 이름의 새가 실은 뇌계의 정령왕

 지즈이고, 자신의 상실된 기억을 찾는 여행에 동참했으며, 소울 페어를 찾아

 다시 자신이 처음 정신을 차렸던 그 레어로 돌아오면 그때서야 자신의 진정한

 정체를 알게 될 거라는 말을 해주었다는 것을 어찌 얘기해야 할 것인가.

 자기 자신조차 처음엔 반신반의했던 이야기였으니, 이들이 믿어줄 지도 의문이다.

 하지만 저기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보라빛 머리칼의 소년이라면 믿어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카프린은 고개를 뒤로 돌렸다. 그의 소울 페어가 보라빛

 눈동자를 희미하게 빛내며 의아한 듯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카프린은 얼굴에 미소를 떠올리며 말의 배를 한번 걷어찼다.

 "히히이잉-!"

 "하앗! 핫!"

 경쾌하게 따가닥 거리는 소리와 함께, 시원한 바람이 그의 흑발을 맘껏 뒤로

 날려보내 주었다. 그대로 카프린은 자신의 가슴에 부딪혀오는 바람을 만끽하며

 길을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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