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 (45/65)

 #2.  

 퀘타라스는 500여 년의 역사를 지닌 전통있는 국가이다. 그들의 역사에 따르면

 최초 프랑 갈레론이란 이름의 은둔자가 엠트 분지에서 엘시타이의 음성을 듣고

 예배당을 건립한 것이 시작이 되었다고 한다.

 후일 니더우드의 야만족들이 침공해왔을 때, 그는 탁월한 용병술을 발휘해

 침략을 물리쳤고, 그 공로로 왕에 추대되었다. 

 꿈 속에서 엘시타이의 목소리를 듣고 그에 의해 승리했다는 프랑 갈레론은

 나라의 이름을 '끝없는 물음'이란 뜻의 퀘타라스라 칭했고, 자신의 성도

 '묻는 자', '추구하는 자'라는 의미의 퀜타로 바꾸었다. 

 이렇게 해서 성립된 퀜타 왕조는 200년 전 암흑신 푸타의 강림을 막아낸

 신성 여왕 아르네 퀜타가 신비스럽게 실종됨으로 해서 끝이 났고, 그 뒤를

 수석 마법사였던 바티유가 이어받음으로 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카프린은 천천히 말을 몰아 길을 안내하면서 자신의 동료들에게 퀘타라스에 대한 

 설명을 마쳤다. 아니, 정확하게는 자신의 소울 페어가 된 헌이란 이름의 소년에게

 였다. 그런데 뜻하지도 않은 곳에서 방해자가 튀어나왔다.

 알리스의 눈이 가늘게 떠지면서, 그녀의 입에선 나직하게 킬킬거리는 웃음이

 새어나왔다.

 "암흑신? 신비스럽게 실종? 하여간 퀘타라스의 정보 조작하는 솜씨는

 끝내준다니까. 저 카프린조차 그 거짓말에 속아넘어가다니. 시리아스, 들어봐.

 난 퀘타라스와는 오래 싸워온 아마조니아 출신이야. 그래서 퀘타라스 내부 사정에

 대해선 오히려 퀘타라스에 살고 있는 애들보다 더 잘 알고 있지. 200년 전

 강림했던 것은 암흑신이 아니었어. 그저 거대한 정념의 덩어리였지. 그리고 그걸

 봉인한건 여왕 아르네가 아니라, 지금은 역사서에서 이름조차 지워진 최고의

 마갑전사 요하네스였어. 아르네는 반역자로 낙인찍힌 그와 함께 하기 위해

 왕위를 내던진 거라고."

 "아, 네…." 

 붉은 머리칼의 엘프를 알리스가 억지로 껴안든, 그걸 피하려고 몸을 피해낸

 그녀덕분에 알리스가 균형을 잃고 휘청거리든, 그건 카프린의 상관할 바가

 못 되었다. 다만 알리스가 그의 멋들어진 설명을 중간에 망쳐놓았다는 사실이

 그의 기분을 나쁘게 했다.

 카프린은 얼굴을 굳힌 채로 고삐를 잡아당겼다. 다시금 자신의 등에 와닿는 대강

 깎은 듯한 머리칼이 어느 정도 기분을 풀어주었다. 말의 배를 한번 걷어찬 그는,

 그대로 퀘타라스의 접경 지역으로 올라가는 협곡을 향해 말을 달리기 시작했다.

 ※     ※     ※

 동굴은 여전히 어두웠고, 그리고 아득했다. 그 안쪽 깊숙한 곳에서 빨갛고 파랗고

 희고 검은 목소리들이 울려왔다.

 "이건 뜻하지 않은 수확이요."

 "의식 세계가 외부에 대한 아무 면역도 되어 있지 않아 이렇게 된 것 같소만."

 "하지만 흥미롭군요. 분명 저 인간은 남성으로 태어나 남성으로 살아왔는데,

 저렇게 갑자기 여성화되어 버리다니…."

 "아니, 그건 아닐거요. 저 인간은 비록 남성으로 태어나긴 했지만 남성으로

 살아온 것은 아니지. 그는 여태껏 자기 자신이 아닌 채로 살아온 거요."

 한 장중한 목소리가 새로 울려나오며 다른 것들을 압도해갔다. 금빛 종소리가

 퍼져나가듯, 은은하면서도 위엄있는 목소리였다.

 "어떻게 되든 결과는 마찬가지. 또다른 세상을 열어줄 열쇠는 이미 완성되어

 있으니, 대표분들은 너무 서두르실 것 없습니다."

 "그랬군, 로드여."

 난데없이 들려온 낯선 목소리에 탁자에 앉아있던 이들은 모두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그들의 뒤에는 먼지투성이 망토를 걸친 중년 사내가 얼굴을 굳힌 채로

 서있었다. 

 "너는 누구냐. 여기는 네가 올 곳이 못 된다. 아무리 하이랜더라 하나…."

 "기다려주십시오, 레드 일족의 원로시여. 살바지오스, 오랜만입니다."

 앞으로 나서려는 빨간 머리의 청년을 가로막으며, 허름한 로브의 금발 사내는

 어느새 자신의 앞에 와서있는 사람의 이름을 불렀고, 그는 허허 거리는 웃음을

 터트리며 그의 말을 정정해주었다.

 "지금은 솔리아드 레넬이란 이름이요, 로드여."

 ※     ※     ※ 

 "대신들은 어떻게 생각하오?"

 "이번 니더우드와 퀘타라스 사이의 전쟁이 중원의 이름을 떨치게 하고

 쿠리안의 기세를 밖으로 떨칠 절호의 기회라는 것에 대해 만장일치했사옵니다.

 남은 것은 황제 폐하-만수 무강하소서-의 지엄하신 명만을 기다릴 뿐이옵니다."

 올해 나이 스물 일곱인 중원의 황제는 습관적으로 자신의 뒤를 돌아보았으나,

 그곳에는 이미 수렴은 거두어지고 없었다. 세 살 때부터 자신을 대신해 중원을

 키워온 어머니는 자신이 성인이 되었음에도 자리를 내주려 하지 않았고,

 결국 젊은 대신들의 반발과 자신의 사병에 의해 북해의 빙궁에 유폐되었다. 

 황제는 소리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확실히 이런 일에는 어머님의 조언이 제격인데….'

 하지만 또다시 어머니의 손을 빌리려 한다면 이 자리에 앉기까지 흘려온 피와

 쌓아온 시체는 무엇을 위한 것이었단 말인가. 그것들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는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황제는 가슴을 폈다. 어느새 그의 얼굴엔 근심어린 표정은 간데 없고,

 거역할 수 없는 위엄만이 서릿발처럼 솟아 나오고 있었다.

 "윤허하오!"

 "존명!"

 자신의 앞에 벌써 두 시진(한 시진은 2시간. 작가주)이나 무릎을 꿇고 있던

 황군 좌위도반 북평공은 큰 소리로 복명하며 물러갔다. 그가 물러나자 흰 수염을

 기른 영의정승이 앞으로 나서며 엎드렸다.

 "페하-만수무강하소서-의 총명하신 결정에 신은 찬사를 드리오며 감히 한말씀

 드리고저 하옵니다."

 "말씀하시구려."

 황제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저 늙은 너구리가 할 말이란 건 뻔하다.

 한때 자신의 어머니 서릉황후를 밀은 바 있는 저 영감은 어떻게든

 자신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애를 쓰고 있고, 이 시기에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다름이 아니오라, 해동에 관한 문제이옵니다. 쿠리안의 진정한 지배자는

 오로지 중원의 황제 폐하-만수무강하소서-외에는 없사오나, 저 해동의 오랑캐들은

 스스로를 선인의 후손이라 일컬으며 폐하-만수무강하소서-의 명에 정면으로 맞서고

 있으니 마땅히 이번 기회에 일벌백계하심이…."

 그 이상은 듣지 않아도 좋았다. 황제는 한 손을 휘휘 내저으며 영의정승의 말을

 중간에 끊었다.

 "그만하시오. 어차피 해동에 대한 불문율은 선대에서부터 지켜져 오던 것.

 거기에 대해 그대들이 왈가왈부할 필요는 없소."

 "허나 폐…."

 황제는 재빨리 말을 이었다. 저놈의 만수무강하소서 소리는 정말 지겹지도 않은지

 계속 튀어나오고 있었다. 다행히도 황제는 그 소리가 나오기 전에 어전 회의를

 마무리 해버렸다.

 "그대의 충심을 모르는 바 아니나 황실의 전통이란 것이 있으니 그 점에 대해선

 신경쓰지 말도록 하시오. 그럼 이만 회의를 마치도록 하십시다."

 "만세, 만세, 만만세! 황제 폐하의 성덕이 참으로 크시니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하옵니다!"

 황제는 재빨리 몸을 일으켜 어전을 떠났다. 걸핏하면 해동 정벌을 주장하는

 저들은, 지금 황실의 피의 절반이 해동에서 왔다는 것을 알고나 있을까.

 아니, 어전 회의 때마다 외치는 세상을 이롭게 한다는 인사말이 해동의 것이라는

 것조차 모르고 있을게 뻔했다. 

 주위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황제는 한껏 기지개를 폈다. 문득 그의 눈에

 처마 밀에 조각된 용머리 상이 들어왔다. 금방이라도 하늘로 올라갈 듯한

 용의 조각을 한참 바라보던 황제는 살짝 미소지으며 걸음을 빨리 옮기기 시작했다.

 그의 입에서 들릴락 말락한 혼잣말이 바람을 타고 조용히 흘러나왔다.

 "하마터면 잊을 뻔했군. 우리들보다도 높은 그분을 기다리게 할 수야 없지."

 이내 쿠리안의, 정확하게는 쿠리안 칠연합국의 맹주는 이내 별궁 쪽으로

 사라져갔고, 그의 곁을 스쳐지나갔던 바람도 덩달아 하늘 높이 날아올라갔다.

 푸른 가을 하늘엔 검은 제비 한 마리가 자국을 남길듯이 날아가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