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 (46/65)

 #3.

 퀘타라스로 들어선 일행의 앞에 들어온 것은, 나무 판자로 얼기설기 엮어 만든

 집들 사이로 우뚝 솟아있는 십자가였다. 특이하게도 거기엔 날개를 펼친 매

 한 마리가 매달려 있었다.

 나무에 매달린 매. 그것은 엘시타이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뚜렷한 형체없이

 회색빛 구체로만 표현되는 엘시타이의 모습이 일반 서민들에게 받아들여지기

 힘들다는 계산 아래, 성황청은 하나의 표상을 만들기에 이르렀고, 그것이 바로

 이 나무에 매달린 매, 이른바 휄콘 크로스였던 것이다.

 매는 하늘 높이 날아가는 엘시타이의 정신을, 십자 형태는 그의 완전성을,

 그리고 못자국은 세상을 창조하기 위해 그가 치른 희생을 의미한다.

 설명을 마친 카프린은 힐끔거리며 알리스를 쳐다보았다.

 아주 실망스럽게도 알리스는 이번에도 역시 그의 기대를 져버리지 않았다.

 "정말 말도 안돼는 얘기야. 시리아스, 어떻게 생각해? 원래 신의 형태는 없는데

 그걸 인간이 멋대로 해석해버린 거지. 인간이란 항상 그래. 엘프들은 그래도 좀

 나은 편인가?"

 "아, 저희들은 신계와는 좀 거리가 멀어서…."

 "그렇지, 엘프는 정령계에 속해있으니까. 마력과 신력, 그리고 정령력은 서로를

 멀리 한다지? 하지만 말야…."

 그 이상은 듣지 않아도 좋았다. 카프린은 애써 알리스의 도발을 무시하며 자신의 

 뒤에서 여전히 자신을 끌어안고 있는 소년의 존재를 인식하는데 신경을 쓰기로

 했다. 그러나 결국 그의 꾹꾹 눌러온 화는 터트려질 운명이었다. 한 무리의

 병사들이 그들의 앞을 가로막으며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서라! 국경 감시단이다!"

 "수상쩍은 자들이군. 무기를 이리 내놓고 조사에 협력하라!"

 그중 한 병사는 카프린 뒤에서 그를 껴안은 채로 있는 헌을 보더니

 가만히 키득거리며 창대 끝으로 소년의 다리를 쿡쿡 찍어보기 까지 했고,

 마침내 카프린은 폭발했다.

 ※     ※     ※

 병사들이 주위를 둘러싸고 있다. 그리고 그는 지금 내 앞에서 검을 뽑아들은 채로

 내 앞을 막고 서있다. 병사들이 창으로 그를 찔러오는 것이 보인다.

 내가 나서야 할까. 난 어떻게 해야…….

 다시 망나니로 돌아가야 하나? 아니면 그의 소울 페어로?

 하지만 난 지금 그를 도와 함께 싸우고 싶어.

 그의 소울 페어로서 그의 옆에 있고 싶은거야.

 이런건 몸으로 부딪혀 알아볼 수밖에 없어. 

 하지만 만약에, 만약에 내가 나서는 것을 그가 싫어한다면 어떻게 하지?

 내가 다시 망나니로 돌아가게 되면 어떻게 하지? 난 그것을 두려워하고 있나?

 그래도…그래도 난 그를 돕고 싶어. 망나니가 아닌 그의 소울 페어로서,

 그와 공명하고 있는 '선우 헌'으로서 그와 함께 싸우고 싶어.

 그러니까 난 싸울거야. 

 헌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자신의 도를 뽑아드는 동시에 말등에서 뛰어내렸다. 

 자신을 바라보는 카프린의 눈동자가 잠시 자신을 주춤거리게 했지만, 망설임은

 얼마 가지 않아 없어졌고, 헌의 몸은 예전처럼 병사들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카프린, 카프린이라고 했죠? 난 당신을 사랑하는 걸까?

 아니, 그런건 아니야. 오히려… 그래, 공명이라고 하는게 옳겠지.

 이상해, 당신과 공명하는 것이 즐겁게 느껴져. 당신의 망설이는 마음,

 날 걱정하는 마음이 나에게 밀려오고 있어. 어쩌면 내게 소중한 것은….

 그대로 헌의 몸은 회전해가며 두 병사의 목을 꺾어놓았다. 그의 입에선

 예의 독특한, 그러나 어딘가 모르게 달라진 음색이 흘러나왔다.

 "…천인참 백삼식, 수참(首斬)!!!"

 ※     ※     ※

 "네레브리카 님은 그 당시 휴면기에 있으셨으니 처음 만남이시겠죠.

 살바지오스 님은 전대 로드였던 칼라이노에 님 대신 해츨링이었던 절

 돌봐주신 분입니다."

 "…확실히 그건 내가 살바지오스로 지낼 때의 얘기로군요, 로드여."

 솔리아드는 어두운 미소를 지으며 비어있는 자리에 가 앉았다.

 좌중은 묘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시 말을 꺼낸 것은

 은발을 허리까지 드리운 여성이었다.

 "실버 드래건의 대표자가 일족의 구원자께 인사드립니다."

 솔리아드는 피식 웃었다.

 "바둔 산맥에 칩거했던 아뮤리자 님이시군요.

 그때의 용맹한 마법전사 살바지오스는 세월 따라 가버리고,

 여기 남은 것은 음유시인 솔리아드 레넬일 뿐입니다."

 "이름을 바꿨다고 해서 과거까지 변하는건 아니죠, 백은성(白銀星)의 수호자여." 

 솔리아드의 고개가 좌우로 흔들렸다.

 "그 얘기는 그만 하도록 하죠. 제가 여기 온건 다른 용건 때문이니까."

 "…우리들의 마리오네트를 만나셨더군요."

 그 말이 나온 곳을 향해 솔리아드는 얼굴을 돌렸다. 지상에서 최고로 강한 자들의 

 지배자, 그리고 한때 자신의 품에서 뛰놀았던 아이가 그곳에 있었다. 솔리아드의

 입에서 쓸쓸한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많이 변했군요, 로드여."

 "하지만 우리들은 변하지 않습니다, 살바지오스."

 "…예전이라면 당신은 인간 몰살 계획같은건 세우지도 못했을 겁니다."

 "……."

 좌중엔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암흑같은 침묵을 깬 것은 역시 솔리아드였다.

 "도대체 무슨 생각인 겁니까. 인간의 정신 세계에만 작용하는 무기라니.

 게다가 용제에게 까지 협력을 구해가며 쿠리안의 황제에게 그 무기를 전달해주는

 의도는 뭡니까?" 

 잠시 숨을 고르던 솔리아드는 그답지 않게 한숨을 푹 내쉬었다.

 "끝내 당신들은 인간을 멸망시켜야 겠습니까?"

 "그건 아닙니다, 살바지오스."

 앞으로 나선 것은 예의 은발 여성이었다. 그녀의 손이 부드럽게 솔리아드의

 어깨에 놓였으나, 솔리아드는 피식 웃으며 어깨를 떨굴 뿐이었다.

 "120년 전에는 인간 남성의 모습이었던 것 같은데, 당신의 취미가 변했나보군요.

 어쨌든 얘기를 들어볼까요?"

 은발 여성은 그의 짓궂은 말에도 표정을 흐트러트리지 않고 자신이 하려던 말을

 이어나갔다.

 "우리들이 무성이라는걸 굳이 얘기할 필요는 없겠죠, 살바지오스? 여하간 아까

 말한 대로 우리가 인간을 멸망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을 멸망시키는 것은

 어디까지나 인간, 우리는 그것을 앞당길 뿐이죠."

 "…무엇 때문입니까."

 은발 여성, 실버 드래건의 대표자 아뮤리자는 잠시 솔리아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세상이 있을 때부터 나타난 불노불사의 전투종족 하이랜더,

 그리고 기나긴 세월 속에서 끝까지 살아남은 몇 안되는 이들 중 하나인

 백은성의 수호자 살바지오스. 

 삼천년이란 드래건의 수명보다도 세배 정도 되는 세월을 살아왔을 존재.

 그런 시간 속에서 인간들 속에 섞여 살아왔으니 저런 반응도 이해는 간다.

 하지만 계획은 계속 진행되어야 한다. 모두의 멸망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그리고 아뮤리자는 대답했다.

 "엘시타이의 진노로부터 모든 생명체를 보호하기 위해서입니다.

 어차피 그들은 멸망으로 향하고 있으니 우리가 조금 앞당긴다고 해서

 안될건 없겠지요."

 아뮤리자의 예상대로 솔리아드는 입을 다물었다. 좌중의 이런 불편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돌탁자 위에 놓인 수정구 속으로는 속속들이 그들이 관찰하고 있는 소년,

 선우 헌의 심리 상태가 계속 기록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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