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캄캄한 어둠…그리고 허무하게 느껴지는 고요함.
내 이름을 부르는 것은 누구?
나를 향해 손을 내미는 것은 누구?
당신…나를 미워하지 않나요.
이대로도 괜찮은 건가요.
결코 돌이킬 수 없는 나의 과거만으로도 괜찮은가요.
날 버리지 말아요.
당신의 손으로 꼭 껴안아주세요.
내가 나를 잊어버리지 않도록,
내가 당신 곁에서 사라져 버리지 않도록.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
그가 날 싫어하게 되는 것.
그래서 눈을 뜨는게 두렵나?
눈을 뜨고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 두렵나?
그가 날 외면할까 그것이 두렵나?
하지만 그가 외면한다 해도
더 두려운 것은 그의 얼굴을 영영 보지 못하게 되는 것.
그래, 눈을 뜬다.
그리고 날 부르는 소리를 향해 걸어가겠어.
빛이든 어둠이든, 그와 함께 서있을 수 있는 곳으로.
※ ※ ※
"폐하께 아룁니다. 5년 전 감히 폐하의 별실로 침입했던 자와 비슷한 인상착의를
지닌 자가 국내로 들어왔습니다. 그는 몇 명의 일행과 함께 엠트 분지에서
올라왔으며, 그들을 저지하던 국경 감시단은 두명을 빼놓고는 몰살, 생존자의
보고에 의하면 우두머리인 듯한 자는 검은 피부에 검은 장발을 갖고 있었다고
합니다."
"…검은 바람의 카프린인가. 알겠다."
퀘타라스의 국왕 브로멘트 2세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오른팔이자
요즘에 들어선 심상치 않은 세력을 키우고 있는, 제3 국경 수비군
강철 호랑이 군단의 군단장 데릴린드를 물러나게 하려 했다.
그러나 이내 자신의 왼편에 서있던 재상 카인허프의 매서운 질책이 뒤따랐다.
"아인도르트 경, 국경을 수비하는 책임자로써 그런 수상한 자들을 들여보냈다는
것은 직무 유기가 아니오?!"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그때 폐하 곁에 있었으면서도 침입을 허용한
베넬룩크 각하의 동생 단 베넬룩크 경의 처벌이 어찌 없었는지를 묻겠습니다만."
브로멘트 2세는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둘 다 그만들 하시오. 재상, 아무리 아인도르트 경이 책임자라 하나
그 넓은 국경을 혼자서 수비하는 것도 아니고, 침입한 자의 신상 또한
확실한 것이 아니니 이번 일은 그만 넘어갑시다."
"그러나 폐하…."
"그대의 동생으로 인한 하니엘(엘시타이의 권능을 상징하는 권천사. 작가주)의
밧줄은 아직 유효하오."
자꾸 미적거리는 재상의 말을 단칼에 끊어버리며 브로멘트 2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이것으로 끝내도록 하오. 짐은 잠시 비의 정원에서 머리를 식히고자
하니 방해없도록 하시오."
"폐하께서 들어가십니다-!"
자신의 퇴궐을 알리는 시종의 뿔나팔 소리가 브레멘트 2세의 머릿속을 울리며
비집고 들어왔다. 정말 이 두통은 언제쯤에나 나을 수 있을까. 요즘 들어 재상과
데릴의 소리없는 싸움을 보고 있자면 더한 것 같다.
브레멘트 2세의 걸음이 문득 멈추어 섰다. 하드 풀 향기로 가득한 이곳은 그와
그의 아내, 그리고 이제는 세상에서 사라진 그의 친구만이 들어올 수 있는 곳.
그러고 보니 재상의 동생인 단과 데릴은 같은 기사 수련원을 나온 친구 사이라고
했는데.
그의 입에서 나지막하면서도 우울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세월이 흘러가면 사람의 마음도 변하는군. 이런 기분은 오랜만에 느껴지는 것.
친구여, 자네가 그립군…."
잠시 그의 머릿속으로 자신의 손으로 처벌해야 했던 자신의 친구가 생각났다.
절규하며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기 보단 자신의 아내와 딸을 살려달라고 하던 그.
하지만 현 국왕과 어렸을 적 친구였다는 마법사 길드장의 존재는 귀족들의 마음
한구석에 불안을 심어주었고, 결국 그는 반역죄에 몰려 가족 모두가 참살당했다.
당시 자신의 입에서 나온 말을, 그는 아직도 기억한다.
'비록 짐과 친분이 있다하나 감히 이 나라 왕실에 반역의 마음을 품은 것은 어쩔
수 없는 중죄! 죄인의 가족 모두에게 참살을 명하노라!'
그때 자신의 위치가 귀족들에게 좌우되는 것이 아니었다면…
그랬다면 그를 살릴 수 있었을까. 아직도 마음에 걸리는 것처럼,
그때 자신은 단지 귀족들에게서 확고한 승기를 다잡기 위해 그를 처형했던 것일까.
브레멘트 2세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엘시타이의 옷자락이라는 하늘은 오늘도
푸르렀지만, 그의 마음만은 먹구름이 낀 양 뻑뻑했다. 그리고 어느새 자신의
손위에 앉아있는 전서구가 가져온 소식은 그의 그런 심정을 더 착잡하게 했다.
쿠리안에 심어둔 밀정이 보내온 소식은 다음과 같았다.
- 해동의 황제가 용들의 대표자 용제와 접촉했습니다.
그는 용제에게서 기이한 병기를 얻은 것 같습니다.
엘 시타이께 영광을, 폐하께 충성을. -
브레멘트 2세는 그 내용을 몇번이고 읽어 완전히 암기시켰다. 그 후 쪽지를
부스러트려 한 식물의 꽃대 속에 집어넣고는 정원을 빠져나갔다. 종이 쪽지를
구겨넣은 식물의 이름은 엘렌디나움, 강력한 용해액으로 작은 새나 생쥐를
잡아먹고 사는 포식 식물이었다.
※ ※ ※
헌이 눈을 떴을 때, 처음으로 눈에 들어온 것은 생각했던 대로 카프린의
거무스름한 얼굴이었다. 카프린은 그를 보며 부드럽게 미소지었고,
그런 그의 태도는 헌을 안심시켰다.
"마음 고생이 심한가 보군. 그럴 때는 네가 한 것처럼 몸으로 부딪혀
풀어보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지."
"별로 놀라지 않은 모양이네요, 당신은."
카프린은 헌의 보라빛 머리칼을 손으로 매만지며 대답했다.
"당연히 놀랐지. 그렇게 갑자기 쓰러져 버리면 누구라도 놀란다고.
그것도 백 오십여 명이나 되는 수를 혼자서 쓰러트린 후에 라면 더더욱이 그렇지."
헌은 몸을 일으키며 카프린의 어깨에 자신의 머리를 기대었다. 그의 심장 고동이
들릴 것만 같았다.
"…두려웠어요. 당신이 그런 나의 모습을 싫어할까 봐."
"하지만 역시 몸으로 확인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거지?"
카프린은 싱긋 웃더니 문득 두 손을 부드럽게 움직여 소년의 탄탄하지만
부드러운 몸을 애무해 가기 시작했다. 갑작스런 그의 손길에 완전히 발개진
헌의 귓가에 대고, 카프린은 속삭였다.
"어디, 내가 널 어떻게 생각하는지 몸으로 확인해볼래?"
"……으음…아, 아앗…."
카프린의 손은 점점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헌은 약간은
거칠은 그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다. 그들이 있는 곳은 수도에 널리고 널린
여관 중 한 곳의 구석 방, 그들을 방해할 사람들은 밑에서 식사 중이었고,
다시 길을 떠나기까지는 시간이 남아있었다.
그리고 헌에게 있어서는 시간이 어떻게 흐르든, 장소가 어떻게 변하든 상관없었다.
그저 카프린이 이끄는 대로 몸을 움직여 갈 뿐. 예전에 자신이 갖고 놀던 소녀의
시체로 만든 인형처럼, 헌은 카프린의 욕망에 철저히 순응했다.
"아……!"
시간은 아직도 많이 남아있었다.
#5.
한참의 몸부림이 끝나고 카프린과 헌은 침대 위에 걸터앉아 서로에게 기대어
정사 후의 노곤함과 동시에 다가오는 충만함을 만끽하고 있었다. 문득 카프린은
입을 열었다.
"넌 마치…."
말을 하다말고 카프린은 자신의 칼을 벽에다 내려꽂더니 헌의 눈앞에 가져갔다.
칼끝에는 자그마한 벌레가 찍혀 있었다.
헌은 그 벌레를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등에는 이상한 무늬가 있고 전체적인
색깔은 거무튀튀하다. 신경 쓰지 않으면 여타 다른 곤충들과 구별하기 힘들
것이다. 다른 점이라면 껍질이 좀 단단해 보인다는 것 정도?
"이 벌레와도 같아."
헌은 눈을 깜빡였다. 이 벌레와도 비슷하다니? 헌은 대답을 기다리며 조심스레
몸을 카프린에게 기대어 보았다.
"먹어봐, 그럼 내가 한 말뜻을 알꺼야."
먹어보라고? 헌은 다시 한번 그 벌레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조심스레 입을 벌려
혀를 내밀었다. 혀에 와 닿는 감촉이 매우 꺼끌거린다. 하지만 카프린은 자신이
이것을 먹길 바라고 있다. 헌은 눈을 감으며 거무튀튀한 벌레를 한 입에 넣었다.
와작! 껍질 부서지는 소리가 요란하다. 의외로 단단한 벌레의 껍질에
헌은 놀랐다. 그러나 그 밑에 숨어있는 부드러운 살이 그를 더 놀라게 한다.
벌레의 살이 혀에 닿자마자 녹아 버린다. 다음 순간 헌은 자신의 몸이 후끈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호흡을 천천히. 그리고 기를 운행시켜봐."
귓가에 속삭이는 카프린의 목소리. 헌은 그의 말을 알아듣고 가부좌를 틀었다.
두손을 모아 단전에 갖다대며 천천히 기를 움직여 보았다. 자신의 기가 임맥과
독맥 양쪽으로 치닫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그리고 정수리 부분에서 그 둘은
마주쳤다.
"으음…."
헌은 가벼운 신음성을 흘렸다.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임독양맥이 타통되는
순간의 고통은 어릴 때부터 엄한 훈련을 받아온 그로써도 처음 겪는 것이었다.
이내 십이주천이 끝났고 헌은 눈을 떴다.
"어때?"
"좋은데요? 이 곤충의 이름이 뭐죠?"
헌은 자세를 편히 하며 다시 카프린에게 자신의 몸을 기대었다. 그러자 카프린은
고개를 숙여 그의 귓가에 입을 가져다 대며 속삭였다.
"'토르고츠이'라고 하는 거야. 등에는 해골 무늬가, 배에는 사람의 얼굴이,
그리고 그 자체의 얼굴까지 총 세 개의 얼굴을 지녔지. 그건 그렇고 이제 내가 한
말뜻을 알았니?"
"알 것도 같아요."
헌은 조심스레 얼굴을 돌려 카프린을 쳐다보았다. 카프린의 입술이 빛나고
있는 것 같다.
"그 벌레는 껍질은 너무 단단했지만 반대로 살을 너무 부드러웠어요.
그래서 제 혀에 닿자마자 녹아버렸죠."
"그래서?"
카프린의 손이 헌의 몸을 다시 더듬기 시작했다. 그의 손의 거칠면서도 부드러운
감촉이 자신의 가슴을 쓸고 지나가는 것을 느끼며 헌은 더듬거렸다.
"으음…제가 그 벌레와 비슷하다는 건, 아앗…제가 겉보기엔 강해 보이지만
어떤 심한 상처를, 아…받으면 금세 자아를 잃고 말꺼라는 말…맞죠?"
"그래, 맞았어. 상으로 뭘 원해?"
카프린은 헌의 그 보라색 머리칼에 자신의 얼굴을 부벼보며 장난끼 섞인 말투로
물어왔고, 헌은 빙긋 웃으며 그런 그에게 안겨 들었다.
"당신…."
"그럴줄 알았지."
카프린의 손가락이 헌의 갸름한 얼굴을 조심스레 쳐들더니 자신 쪽으로 고개를
돌리게 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둘의 얼굴이 겹쳐졌다.
헌은 약간 젖은 눈을 들어 카프린의 다음 행동을 기다렸다. 그러나 카프린은
더 이상 헌을 애무하지 않았다. 그의 눈은 약간 비릿한 조소를 담고 방문 쪽을
향해 있었다. 헌은 그 눈빛을 따라 움직였다. 그리고 한 여인의 모습을 발견했다.
헌의 입에선 당혹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시리아스 누나…."
※ ※ ※
"좋아, 다들 준비해. 여기서부터는 좌표를 알 수 있으니 단번에 텔레포트해서
워프 게이트가 있는 곳까지 간다. 텔레포트할 장소는 왕궁 안에 있는 국왕의
개인 정원, 워프 게이트가 있는 곳은 국왕의 개인 별실 3호. 질문 있어?"
"없어, 출발하자구."
알리스는 빙긋 웃으며 카프린을 재촉해 텔레포트할 준비를 시작했다. 일행이 서로
한 자리에 모여들자 카프린은 어깨에 앉아있는 새, 지지에게 무언가를 말했고,
이내 일행들은 자신의 몸이 푸른 녹색으로 빛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몸과 무기 모두에 뇌전계 정령마법을 걸어놓았어. 자, 그럼 다들 조심해라.
들어가자 마자 각기 흩어져서 워프 게이트가 있는 곳에서 보자. [텔레포트]-!"
미리 주문을 외워두고 있었던 듯, 카프린은 곧장 시동어를 외쳤고,
일행을 눈 깜짝할 사이에 빛으로 둘러쌓여 정원같은 곳에 서있는 자신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모두는 각기 다른 방향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카프린은 헌과 함께, 알리스는 시리아스를 붙들고, 그리고 마오는 언제나 처럼
혼자서.
경비병들을 피해 달려가며 시리아스는 어제의 대화를 지우려 노력했다.
그러나 헌의 부드러우면서도 냉정하게 자르는 그 대답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그래, 나는 그 소년에게 말했다.
내게 조금도 관심없고 항상 가식적인 미소만을 던져도 상관없으니,
차라리 이전의 당신으로 돌아오라고.
당신이 변해가는 것이 두렵다고. 내게 아무것도 주지 않아도 좋으니
제발 예전의 헌으로, 내가 계속해서 사랑-비록 짝사랑이지만-할 수 있는
헌으로 돌아오라고.
그러나 소년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미안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누나가 틀렸어요. 사랑은 서로 주고받는 거예요. 주기만 하거나
받기만 하는 것은 아무 의미 없어요. 결국 그 때문에 내가 변해도,
또 그 사람이 변한다 해도, 서로를 사랑하기에 변한 거라면
그건 아주 멋진 일이라고 생각해요.
미안, 누나. 난 그 사람을 사랑해요.
그의 소울 페어인 '선우 헌'으로써 말이죠.'
그 미소…여태껏 내게 보여주었던 그 미소. 하지만 예전과는 완전히 달라.
지금은 전혀 꾸밈이 없어. 난 알아. 그건 자연스러운 감정에서 나온 미소였어.
너무 아름다워. 그래서 너무 잔인하게 느껴져.
아아, 당신은 결국…결국 내가 잡을 수 없는 곳으로 가버리는군요.
당신이 무너지지 않도록 당신 곁에서 받쳐주는 버팀목이 되어주고 싶었는데.
"정신차려, 시리아스! 이제 금방이다!"
"……네."
내 앞에서 닻을 휘두르며 길을 뚫고 있는 단발의 여자, 여성이면서도
여성이라기엔 너무도 남성같은 알리스라는 이름의 여전사.
솔직히 자신의 감정을 말하고 그대로 행동하는 그녀가 부러워.
조화를 중시하는 우리들 엘프는 결코 할 수 없는 행동을 그녀는 하지.
"좋아, 도착했다! 시리아스, 내 손을 잡아!"
"……!"
어느새 그들은 서재같은 곳에 들어와 있었다. 그들의 발 밑에서 이상야릇한
도형이 빛으로 떠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자신들을 향해 경비병들이 쏘아대는
화살이 흐릿해지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시리아스는 자신의 몸에 한기가 와닿는 것을 느끼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온통 하얀 눈으로 뒤덮인 겨울의 나라, 콜화이트의 동토에 그들은 서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