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 (49/65)

 #2.

 헌의 눈이 카프린을 쫓아 뛰고 있었다. 그의 칼날은 이제 한계에 달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물려준 외날의 도, 그리고 자신을 과거에 묶어두는 단 하나의 징표. 

 소년의 오른손이 뒤로 꺾어져 올라갔다. 

 "천인참 이십일식, 도룡!!!"

 블리자드 한 마리가 또다시 차가운 백색의 피를 뿌리며 떨어져 내렸다.

 덕분에 저 앞에서 블리자드의 무리 한 가운데로 뛰어들고 있는 카프린의 모습이

 확연히 들어왔다. 마오의 망치가 몇 마리인가를 박살내었지만, 아직도 많은 수가

 남아있었다.

 헌은 발을 퉁겨 날아올랐다. 파악-! 얼음의 비늘 조각이 깨지며 또다른

 블리자드의 머리 한가운데가 움푹 파였다. 천인참 삼십이식 아랑격(餓狼擊)을

 무릎을 이용해 펼쳐내며, 헌의 몸이 카프린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헌은 아버지가 물려준 칼을 단단히 쥐었다. 손목에서부터 시작된 회전은

 팔꿈치를 거쳐 어깨에서 허리까지 전달되었다. 그리고 헌이 알고 있는

 가장 위력적인 공격, 천인참 구십식 파천(破天)이 펼쳐졌다.

※     ※     ※

 "…멈출수는 없는건가?"

 "이 세계를 바꾸는 정도의 일인 것을, 그렇게 쉽게 멈출수 없다는 것을 자네가

 오히려 더 잘 알텐데, 나의 친우여."

 솔리아드는 피식 웃었다.

 "자네 일족이 걱정되는 거겠지, 맞나?"

 "부정하진 않겠네."

 솔리아드의 손이 슬쩍 자신의 수금을 쓰다듬고 지나갔다. 그의 수염 덥수룩한

 얼굴에 떠오른 미소는 점점 희미해지고 있었다.

 "훗, 상록의 현자도 이제 옛말이 되었군…." 

 "비웃지 말게, 백은성의 수호자여. 내게 주어진 시간은 거의 다 되어가네.

 종족들이 멸망하는 미래는 보고 싶지 않아."

 마침내 솔리아드의 얼굴에선 미소가 완전히 사라졌다. 그는 어느 정도 침착해진

 얼굴을 들어 여전히 고개가 높을 정도로 위에 있는 파르미안의 녹색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포이즌 그린…너무도 짙은 초록은 오히려 독을 품고 있다.

 자신이 젊은 혈기에 넘쳐 다니던, 그래서 자신이 불노불사의 전투종족이란 것에

 오히려 자긍심을 가지던 때에, 파르미안이 그에게 해준 충고였다. 지금은

 그 충고를 그대로 돌려주게 되었군…. 

 솔리아드는 말을 이었다.

 "…하긴 내가 엠트 분지에서 엘시타이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부터 어느 정도

 짐작한 일이긴 하지만……."

 "그래, 우리들의 창조주께서는 뭐라고 하던가, 살바지오스."

 "……."

 살바지오스…이제는 지워버리고 싶은 이름. 그러나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동료들의 피와 절규, 그리고…그리고 그에게 도전하여 결국엔 그의 칼 아래

 죽어간 마리아네의 마지막 미소.

 솔리아드는 대답하는 대신 천천히 수금의 현을 고르기 시작했다.

 이윽고 고즈넉한 음조가 천천히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히리하 히리하 히리하후네…

 히리하 히리하 히리하후네…

 ※     ※     ※

 헌은 자신의 뼈마디가 울리는 것을 느끼며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카프린의

 투박한 손이 그것을 막았다. 잔뜩 찌푸린 그의 얼굴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 못 말리겠군. 내가 너의 그 공격 방향을 읽지 못했으면 어쩔 뻔했어?"

 헌은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아버지가 물려준 칼은 자루만 남아있었다.

 엄청난 회전력을 바탕으로 적을 끌어와 뭉개버리는 파천의 수법을 끝까지

 버텨준 것만으로도 그 칼은 제 몫을 다한 것이었다.

 소년은 상반신을 일으켰다. 이제 자신과 아버지를 이어주던 끈은 끊어졌다.

 그리고 이제 자신은 자신의 등을 받쳐주고 있는 저 사내와 함께 걸어갈 것이다. 

 문득 헌은 주위가 조용해진 것을 느끼고는 카프린에게 물었다. 

 "…그 괴물들은?"

 카프린은 말없이 손가락을 들어 산산이 부서져 내린 얼음 조각들과

 그 위에 버티고 서있는 거대한 존재를 가리켜 보았다. 푸른 털에 눈보라를

 감고 다니는 빙계의 정령왕, 펜릴의 모습이 그곳에 있었다.

 카프린은 씨익 웃으며 헌의 설명을 요구하는 눈동자에 응답했다.

 "네가 블리자드 무리 사이에서 그 위력적인 회오리를 일으킨 순간,

 내가 거기에 살짝 화계 주문을 섞었지. 그래서 어지간히 퇴치했을 무렵,

 저 녀석이 나타나더군."

 눈과 얼음의 지배자, 타타르 인들이 종종 말하는 푸른 늑대 펜릴은,

 개 같기도 하고 늑대 같기도 한 얼굴을 숙여 늘 카프린의 어깨 위에 앉아있던 새,

 지지를 노려보고 있었다. 

 언뜻 펜릴이 조소를 짓는 것 같다고 헌은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시리아스에게서 

 정령들은 인간과 같은 감정 노출이 없다는 것을 들어서 알고 있었기에 이내

 그 생각을 벗어 던졌다.

 펜릴은 분명 그 새와 얘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조소를 지은 것도 헌의 착각이

 아닌 사실이었다. 정령들의 언어를 알아들을 수 있는 시리아스로서는 그 사실을

 깨닫는데 얼마 걸리지 않았다.

 펜릴의 날카롭고도 차가운 정령어가 인간은 들을 수 없는 음파의 영역 속에서

 터져나오는 것을 시리아스는 들었다.

 - 모든 날짐승들의 왕이여, 그대는 지나치게 참견하는군.

 - …….

 - 왜 대답이 없나. 고작 1년간의 여행으로 그같은 하등 생물에 익숙해져 버릴

   그대가 아닐텐데?

 - …….

 - 모든 날짐승들의 왕이여, 뇌정들의 지배자여, 대답하라. 그대와 동등한 위치에 

   서서 빙계의 정령왕, 눈과 얼음의 지배자로서 내가 묻겠다. 대답하라. 

 - …….

 - 끝내 말하지 않겠다는 건가! 폴리모프의 법이 우리들 정령들에게 더 필요하다는

   것을 그대도 잘 알고 있을 것! 어서 말하라, '지즈'여!

 마지막의 '지즈'라는 울부짖음은 너무도 커서, 시리아스는 순간적으로 귀를 막고 

 자리에 주저앉아야 했다. 호기심 반, 놀라움 반으로 펜릴의 얼굴을 쳐다보던

 알리스는 당황해 시리아스의 어깨를 흔들었지만 그녀는 움직이지 않았다.

 무언가 알아듣는 것같은 표정으로 서있는 것은 마오였다. 갑자기 나타난 거대한

 늑대와 마주 서서 조금도 뒤떨어지지 않는 모습으로 서있는 지지의 모습을

 볼 때부터, 그는 마치 벼락을 맞은 사람 마냥 몸을 떨며 서있었다.

 그의 손에서 떨어지지 않던 망치는 이미 지면에 닿아있었다. 그런 그의 눈동자

 속으로 녹색 빛에 싸여 점차 몸이 변해가는 그 작은 새의 모습이 들어오고 있었다.

 마오는 좀처럼 열지 않던 입을 열었다.

 "…드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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