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 (50/65)

 #3.

 펜릴의 푸른 눈동자는 더 이상 지지, 아니 지금은 네 장의 날개를 지닌 거대한

 새의 모습을 하고 있는 지즈를 향해 있지 않았다. 빙계의 정령왕은 시리아스를

 굽어보고 있었다.

 - 숲에서 떨어져 나간 숲의 딸, 불의 세례를 받은 자, 이프리트의 맹우인

 시리아스에게 눈과 얼음의 정령들을 다스리는 자로서 내가 묻겠다.

 그대는 저 소년을 사랑하는가?

 시리아스는 잠시 당황해서 대답할 틈을 놓쳐버리고 말았다. 아무리 자신이

 정령들과 접할 기회가 많은 엘프라지만 정령계의 정령왕을 직접 접하기란

 쉽지 않았다.

 당시 자신이 불의 힘을 얻기 위한 계약을 맺을 때에도, 이프리트가 아닌

 그의 대리자를 통해 불의 세례를 받았던 것이다. 물론 나중에 숲의 지주

 역할을 하던 나무를 태워버림으로 해서 이프리트에게 인정받긴 했지만 말이다.

 그녀가 우물거리는 사이, 펜릴은 계속 정령어를 그녀의 머릿속으로 흘려보내고

 있었다.

 - 살라맨더의 보호를 받는 화염의 아가씨, 그대는 그대가 사랑하는 이가

 한낱 인형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알고 있으면서도 계속 사랑할 것인가.

 네, 그래요. 그렇게 시리아스는 대답하려 했다. 그러나 도중에 끼여든 녹색의

 목소리가 펜릴을 가로막는 바람에 그녀는 또다시 대답할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 눈과 얼음의 지배자여, 더 이상 이들의 앞을 가로막지 마라.

  모든 것은 예정대로 흘러가는 범. 그대가 구태여 끼여들 필요는 없다.

 그러니 어서 그대가 데려온 그대의 종속들과 함께 그대가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라. 

 펜릴은 신들조차도 얼려버린다는 자신의 송곳니를 드러내며 웃었다. 

 - 나를 놀리는가, 벼락을 다스리는 자여! 균형의 섭리를 어기고 있는 것은

 오히려 그대가 아닌가! 폴리모프의 법을 사용해 균형을 깨트리고자 하는 쪽은! 

 - …….

 - 좋다! 어차피 우리들이 충돌해보았자 남는 것은 모두의 파멸뿐이겠지.

 허나, 기억해 두어야 할 것이다. 그대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의 대가는

 피할 수 있겠지만, 내 송곳니의 냉철한 판결은 피하지 못할 것이란 걸!

 정령왕들의 대화는 여기서 끝났다. 아직 일행 주위에서 주인을 수호하듯이

 떠돌고 있던 블리자드와 클로이제 무리를 이끌고 서서히 허공으로 사라지던

 펜릴은, 마지막으로 시리아스를 바라보며 조용하고도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 그만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불의 세례를 받은 자여. 그대가 사랑하면 할수록

 저 소년의 파멸은 빨리 올 터, 그리고 그것은 나도 바라는 바가 아니니…. 

 숨 한번 내쉴 정도의 짧은 시간에 푸른 늑대의 모습은 간 데 없었다.

 펜릴이 돌아가고 난 후, 정령어를 못 알아듣는 알리스는 머리를 갸웃거리며

 시리아스의 어깨를 보듬어 안아 보았지만, 그녀의 손길은 축 쳐진 시리아스를

 일으켜 세우기엔 역부족이었다.

 또르륵! 시리아스의 볼에 나있는 '불의 눈물 자국'. 그 붉은 길 위로 눈물

 한줄기가 굴러 내려갔다. 그녀는 울먹이며 속으로 끝없이 되뇌이고 있었다.

 '알고 있어요…. 알고 있어요, 빙계의 정령왕이여.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어요.

 그리고 알게 되겠죠…. 끝끝내는 그렇게 되리란 것을….'

 살라맨더의 보호력이 걸려있었음에도 콜화이트, 이 극한의 대지에 불어오는

 바람은 여전히 차갑고 매서웠다.  

※     ※     ※

 솔리아드의 손은 더 이상 수금을 타고 있지 않았다. 그의 투박한 손가락은

 어느새 자신의 목을 쓰다듬어 보고 있었다. 잠시간의 침묵이 둘 사이에 흘렀다.

 그리고 이번엔 파르미안이 입을 열었다.

 "말하지 않아도 짐작이 가는군, 엘시타이가 뭐라고 말했을지."

 "알면 됐어…. 더 이상 말하지 말게. 또다시 과거에 얽매여 좌절에 빠져버리기는

 싫으니."

 파르미안은 고개를 돌려 자신의 레어 한구석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겁도 없이

 보물을 훔치러 왔다가, 기생 식물 크리토프에게 침입당해 지금은 완전히 식물이

 되어버린 인간 모험자들의 모습이 있었다.

 나즈막한 목소리로 파르미안은 중얼거렸다. 

 "자네도 알 걸세, 광천사 루시펠과 암천사 사마엘이 엘시타이의 명으로 인간을

 내려보내며 했다는 그 말을."

 물론 솔리아드는 알고 있었다.

 - 인간은 약한 존재, 바람에 날리는 나뭇잎처럼.

   그러나 인간은 강한 존재, 굳세게 뿌리내린 바위처럼.

   빛에 속한 자비심과 그림자에 속한 잔인성을 한데 지닌 것은 인간.

 파르미안의 말을 계속 이어졌다.

 "엘프만큼의 미모도, 드워프만큼의 손재주도, 용만큼의 지혜도 없는,

 그러나 그 모든 것을 골고루 갖춘 종족, 그것이 바로 인간.

 엘프보다는 체력이 강하고, 드워프보다는 사교적이며, 용들보다는 단결을 잘 한다.

 왜 엘시타이는 그런 종족을 만들었을까.

 어느 종족에게도 떨어지지만, 그 모든 종족들의 장점을 갖고 있다.

 왜 엘시타이는 그런 완벽한 실패작을 만들었을까."

 "…그건 아마도……."

 솔리아드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단언하듯이 또렷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그래…그건 아마도……." 

※     ※     ※

 키란은 조용히 자신의 알몸을 매만졌다. 네레브리카는 레드 일족의 원로였고,

 그의 일족들과 마찬가지로 그의 레어는 화산에 위치해있었다. 그리고 화산 근처에

 몸 씻을 곳이 있다는 얘기는….

 카린의 손이 증기 자욱한 못 위를 한번 휘저어갔다. 약간 뜨거운 듯한 물의

 느낌과 귓가에 와닿는 찰랑거리는 소리가 그-또는 그녀의 기분을 좋게 해주었다. 

 이 이름도 모를 온천에서 나오는 지열수는 압력이 상당히 강하여 그-또는 

 그녀같은 암살자들의 육체를 단련시키는데 그만이었다.

  

 문득 카린은 자신의 몸을 한번 쳐다보았다. 가늘기만 한 팔과 다리, 나온 듯

 안 나온 듯한 실팍한 가슴, 그리고…그리고 수시로 변하는 자신의 성기(性器)…. 

 1500년의 생애가 다섯 번째로 시작한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 저주받을 육체는

 자신을 얼마나 괴롭혀 왔던가. 이런 자신에 비하면 차라리 영원한 유아 형태로

 살아가야 하는 페린이 부러울 정도였다.

 하지만 지긋지긋한 남녀추니의 몸도 이젠 끝이다. 자신이 로드에게서 받은

 마지막 의뢰를 해결한다면 그는 자신에게 폴리모프의 법을 가르쳐줄 것이고,

 그것을 얻는 순간 키란은 자신의 육체에서 해방될 수 있을 것이다.

 몸을 뒤로 쭉 뻗으며 키란은 눈을 감았다. 나른한 기운이 온 몸에 퍼져오는 것을

 느끼며, 그-또는 그녀는 오랜만에 갖는 휴식기간을 맘껏 즐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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