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그러니까 다시 한번 정리해보자. 카프린 네가 항상 어깨에 얹고 다니던
지지란 새가 실은 뇌전계의 정령왕이고, 그가 네 정체에 대한 무언가를
알고 있었고, 그리고 펜릴이란 빙계의 정령왕은 그 무언가가 필요해서
나타났다가 시기가 안 맞아서 물러갔다 이거야?"
"…대충 맞는 것 같군."
알리스는 정리를 해놓고서도 오히려 머릿속이 혼란해졌는지 자신의 머리를
부둥켜안고 주저 앉아버렸다.
"으아아-! 제길, 난 복잡한 건 딱 질색…어이, 잠깐! 같이 가자구-!"
한참 소리를 질러 자기 머리 용량의 한계성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던 그녀는,
문득 저 앞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가고 있는 동료들의 모습을 보고는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탈라리아(헤르메스가 신는 날개달린 신발. 작가주)의 마법을 걸어 위태위태하게
돌진해오는 알리스의 모습을 보던 마오는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띄었다.
그래, 사류와 닮긴 했지만 넌 그 애가 아니야. 아무도 그 애를 대신할 수는
없겠지. 이미 내가 만들고 싶어했던 작품의 이미지는 이미 찾았어.
이제 남은 일은….
마오는 다시 한번 입가에 잘 떠올리지 않던 미소를 띄었다. 그의 하나 밖에 남지
않은 외눈은 희미한 정열과 무언가에 대한 집착, 그리고 결코 멈추지 않을 광기로
번득이고 있었다.
※ ※ ※
솔리아드의 표정은 이제 좀더 편안해졌다. 자신이 하고 싶었던 말을 밖으로
배출해버린 그의 모습은, 마치 하나의 조각상과도 같이 느껴졌다.
다행이 파르미안은 자신의 친구가 레어 안의 일부분으로 동화해버리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즉, 갑자기 파르미안의 거대한 육체가 빛에 휘감기더니, 어느 순간 긴 수염에
녹색 이파리들을 엮어만든 옷을 입은 노인이 솔리아드의 앞에 나타난 것이었다.
그것을 본 솔리아드의 입술이 살짝 올라갔다. 비웃음도, 그리고 부탁조도 아닌,
그저 있음으로 해서 의미가 부여되는 그런 미소였다.
"이젠 의지만으로 폴리모프를 행하는군…. 그러니 정령왕들에게 정령들도 실체를
지닐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따위의 말을 할 수 있었던 거겠지?"
"…그건 거짓말이 아니라네, 살바지오스."
노인의 모습을 한 파르미안은 잘도 자기 것이 아닌 수염을 능숙하게 쓰다듬으며
허허롭게 웃었다. 약간은 애조를 띈 것같은 그 웃음을 지켜보며, 솔리아드는 다음
말을 기다렸다.
"드래건은 완전한 존재로서 성(性) 따위는 없다는걸 그대도 알고 있겠지?"
"그런 대답을 원한건 아니야…."
"그렇지, 자네는 2500년 전의 그 일을 계기로 완전한 관조자가 될 것을
결정해버렸으니까 말이야. 우리들 종족이 멸망하는 것은 그대에겐 그저 스쳐
지나가는 바람 정도의 의미밖에 그대에겐 다가오지 못하겠지.
하지만 난 좀 다르다네, 친구여."
관조자…그래, 난 관조자의 운명을 걸어가기로 결정해버렸다. 나의 손아래
쓰러져간 동료들의 얼굴과 마리아네의 마지막 미소에 걸고…!
그러니 날 내버려두게, 친구여. 날 자네들 계획 속에 끌어들이지 말게. 인간들의
멸망같은 것은 이미 내 마음속에서 지워진지 오래. 그들이 멸망의 길을 향해 걷고
있다는 것쯤은 나도 잘 알고 있지. 그러니 그것으로 날 끌어들이지 말게.
난 휴식을 원해. 인간의 멸망에 관여하기엔 내 마음은 너무 물러졌다네, 친구여.
그러니 날 내버려두게나.
난 침잠을 원해. 인간의 멸망을 관조하기엔 내 마음은 너무 물러졌다네, 친구여.
그러니 날 내버려두게나.
로드의 부탁으로 여기에 오긴 했지만 더 이상 자네들 종족엔 관여하지 않겠네.
자네가 나의 친구이긴 하지만 자네의 일족 모두가 내 친구는 아닌 것처럼.
자네가 나에게 우정을 요구할 수 있지만 내가 자네에게 우정을 요구할 수
없는 것처럼.
그러나 착잡한 표정으로 앉아있던 솔리아드는, 그 때문에 잠깐 사이 자신의
친구의 몸에서 찬란한 황금빛이 흘러 지나갔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 ※ ※
일행은 어느새 가파른 산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얼어붙어 딱딱하게 와닿는 대지의
감촉은 그리 기분좋은 것이 못 되었다.
게다가 얼음의 나라답게, 올라가는 여기저기에서 설인이나 샤벨 타이거,
그리고 갓 죽인 짐승의 따뜻한 시체 속에다 새끼를 낳는다는 킬링 버드 따위가
튀어나와 가뜩이나 짜증나 하던 알리스의 화를 돋구는데 일조하고 있었다.
"야, 카프린!"
"…왜?"
카프린은 약간 틈을 두어 대답했다. 그에게로 달려 날아오는 킬링 버드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의 등뒤에는 지금 아까의 블리자드 무리를 소멸시키느라 힘을
다 써버린 그의 소울 페어가 앉아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알리스는 별로 그것까지 신경쓰고 싶지는 않아 하는 것 같았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아까부터 빙빙 돌고 있는 생각이 하나 꽉 들어차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우리 잘못 올라온 것 같은데? 여기가 진짜 그 블랙 드래건의
레어 맞아?"
"…재미있는 생각이군. 이유를 세가지만 대면 오늘 저녁 당번은 내가 하지-!"
퍼어억-! 어떤 생물이든 간에, 그것이 자기 목숨을 노리고 달려드는 식인조라
하더라도 자기 손에 의해 두개골이 깨져 뇌수가 날리는 모습은 별로 즐길 만한
것이 못 된다. 하지만 난 아직 죽을 생각은 없으니 할 수 없지.
카프린은 자기 생각에 자기가 동조한다는 것을 강조하며 머리를 주억거렸고,
틀림없이 알리스가 이유를 하나 밖에 못 댈 것이라는 쪽에다 자신의 운을 걸었다.
그리고 그의 운은 알리스에게 따먹혀 버렸다.
"첫째, 드래건이 없는 레어 주위에 몬스터가 이렇게 많을리 없잖아?
둘째, 드래건이 있다고 한다면 이렇게 죽자살자 덤벼들지는 못 할 테고 말이야.
셋째, 블랙 드래건의 레어 주변에 언데드가 없다는 말 들어봤어? 그럼-"
저녁 식사 잘 부탁해. 알리스는 뒷말은 생략한 채, 무더기로 날아오는
킬링 버드들에게로 손을 내밀고 있는 시리아스를 보호하기 위해 닻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파아앙! 뒤에서 보기에도 무식해보일 만치 커다란 망치를 돌리고 있는
마오 녀석은 어떤 수를 쓰는지, 킬링 버드는 그것에 닿자마자 나뭇잎이
찢겨나가듯 찢겨져 버렸다.
저런 걸 할려면 엄청난 힘과 스피드에다 순간의 조절력까지 필요한데 말이야.
어째 마오는 제작사보단 검투사나 용병 쪽이 더 어울려. 저 탐구와 집착,
그리고 광기에 넘치는 외눈만 빼면 말이지.
알리스는 고개를 흔들며 다시 앞쪽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시리아스의 자그마한
어깨가 들어왔다. 저 작고 여린 몸으로 그녀는 위험을 감수하면서 까지 헌이란
소년을 지키려고 했다.
그리고 알리스는 블리자드 무리를 소멸시켜버린 다음 축 늘어져버린 소년이,
몸을 조금씩 추스리면서 시리아스에게 한 말을 기억해낼 수 있었다.
'왜 누나가 숲을 버리면서 까지 그 남자를 지키려 했는지 이젠 이해할 수 있어요.
나 역시 지금 누나가 느꼈을 감정을 똑같이 느끼고 있으니까. 하지만 난 누나처럼
바라보고만 있진 않겠어요. 날 변화시켜 그에게로 걸어가 그의 옆에 서겠어요,
그의 소울 페어로써.'
소울 페어…영혼의 동반자. 세상에 태어난 어떤 생명도 그것을 지니고 있지만
모두가 자신의 동반자를 만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소울 페어를 찾아내는
이들은 천만명에 하나 정도일까. 그런 점에서 카프린 녀석은 운이 무척 좋은거야.
방금 전, 자신이 그 운좋은 녀석의 운을 따먹었다는 사실도 잊어버린채,
알리스는 씨익 웃었다. 그리고는 그대로 당겼던 손을 퉁겨내었다.
꾸에엑-! 킬링 버드의 비명소리…. 하지만 그녀의 마지막 미소보다는 내 가슴을
그리 때리지 못하는걸? 그러니까 잘 가라구. 알리스는 손의 땀을 닦아내며 다시
닻을 던져낼 준비를 했다. 킬링 버드의 무리는 아직 세 마리 가량 남아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