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알리스의 악담에 가까운 추리에도 불구하고 일행은 행로를 바꾸지 않았다.
그리고 그 고생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듯이, 어마어마하게 큰 동굴이
일행의 눈앞에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휴우우-! 엄청나게 큰데? 이게 레어란 말이지?"
알리스는 휘파람을 불며, 과장된 몸짓으로 일행을 향해 몸을 돌려 '검은 바람의
카프린'을 쳐다보았다. 카프라치오…검은 바람…카프라치오…검은 바람….
알리스는 고개를 이리저리 휘저으며 머릿속에 있던 생각을 털어버리려 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마음에 걸리는 조각은 남아있었다.
자신이 카프린과 일행이 되었을 당시, 그는 스스로를 '검은 바람의 카프린'이라고
소개했었다. 그리고 마치 약속한 것처럼 만났던 그들 셋…그래, 거의 동시에
만났었지.
카프린은 소울 페어를 찾는다는 목적에서, 마오는 일생 최고의 작품을 만들겠다는
목표에서, 그리고 나는 상처를 잊기 위해…. 목적은 각기 달랐지만 그래도 우리
셋은 일행이 될 수 있었다. 각자가 원하는 바는 모두 카프린의 상실된 기억과
관련이 있었으니.
하지만 상실된 기억을 찾는 것 치고, 모든 일은 너무도 일관성이 있게 진행되었다.
카프린, 그리고 '검은 바람'이란 뜻의 카프라치오….
실종된 휴면기의 블랙 드래건과 인간의 모습을 하고 소울 페어를 찾아다니는
카프린.
펜릴이 그들 앞에 나타나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카프린의
상실된 기억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시리아스가 저토록
갈 때까지 간 표정을 할 이유가 없겠지.
알리스는 잠시 사고를 정지시켰다. 지금 일행들은 카프라치오의 레어 안으로
발을 옮기고 있었다. 주인의 허락도 받지 않은 채 말이다. 그녀는 자신의 무기가
제대로 허리춤에 달려있는지를 확인한 뒤, 일행과 걸음을 맞추기 위해 종종거리며
뛰어갔다.
※ ※ ※
솔리아드는 천천히 숨을 들이키며 하늘을 쳐다보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울창하게
우거져 태양을 가려주고 있던 나무들은 이제 자신의 뒤에 서있었다.
그의 손가락이 사백년의 습관대로 수금을 쓰다듬어 가다가 문득 멈추었다.
홀로 있어도 완전한 존재인 드래건. 그래서 그들에겐 성(性)이란 존재하지
않았고, 폴리모프를 행하면서 자신의 성을 조정할 수 있었다.
그들의 출생 자체도 신비스러웠다. 자신의 친구 파르미안이 자신이 청년기였을
무렵 해준 말을, 그는 기억하고 있었다.
'드래건은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몇 백년에 걸쳐 가끔씩
선택된 드래건의 레어에 해츨링이 발견되지. 그럼 선택된 드래건은 그 해츨링을
돌보고, 약 백년이 지나면 그 해츨링은 스스로 활동할 수 있는 지성이 생기고
마나를 흡수하게 된다. 그렇게 해서 새로운 드래건이 나타나는 거지.'
그래,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드래건…
그래서 난 그 당시 광천사 루시펠과 주천사 더디겔 사이에서
일족의 균형을 위해 돌아다니던 칼라이노에 대신,
현재 로드인 크리에이트를 돌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그 아이가 성년이 된 지도 삼백년이 된다.
삼백년…자신이 백은성의 수호자란 이름을 버리고, 음유시인 솔리아드로
살아갈 것을 결심한 때도 그 무렵이었다. 그때는 절대 드래건들과는 관계를
맺지 않겠다고 생각했는데….
솔리아드는 우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관조자의 입장에 충실하라고…그렇게 말했나, 파르미안?"
그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그에 따라서 그의 머릿속에 울려오던 친구의 목소리도
점차 옅어져갔다. 마령의 숲 체니타카아는 점차 그의 등에서 멀어졌고,
그의 눈앞으로 은빛의 바둔 산맥이, 콜화이트를 향해 뻗어있는 그 산맥이
펼쳐져 왔다.
※ ※ ※
키란은 다시 한번 자신의 장비를 점검해보았다. 로드에게서 의뢰받은 마지막 일은
세단계로 나뉘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중 앞의 두 개를 해결했다.
이제 로드의 명이 떨어지면 그녀는 그 마지막 단계를 실행에 옮길 것이고,
그럼 폴리모프의 법은 그녀가 갖게 될 것이다.
키란은 조용히 웃으며 여태껏 향기를 맡고 있었던 꽃을 땅바닥에 내던진 뒤 발로
비벼 으깨어 버렸다. 피처럼 붉은 꽃잎, 그리고 금방이라도 이성이 무너질 것같은
야릇한 향기가 퍼져나왔다. 그 꽃의 이름은 알라우네, '단두대의 아가씨'였다.
※ ※ ※
레어 안은 예상대로 텅 비어있었다. 덕분에 엄청난 크기의 동굴은 그 적막감과
위화감을 강하게 풍겨주고 있었다.
문득 카프린이 불러낸 귀화(鬼火, 즉 도깨비불. 작가주)가 어디론가를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고, 카프린 역시 무언가에 홀린 듯 쫓아가기 시작했다.
남은 일행이 시리아스의 살라맨더의 도움을 받아 겨우 카프린을 찾아내었을 때,
그는 또다른 동굴의 깊숙한 곳에 쓰러져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 한 여인이
나체로 서있었다.
시리아스는 서둘러 헌의 눈을 돌려 그 광경을 못보게 했으나, 알리스의 경우는
이미 늦어 정신이 나간 얼굴로 그 여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리아스의 입에서 경악에 찬 음성이 흘러나왔다.
"어…어떻게 알라우네가…!!! 콜화이트엔 존재하지 않는 꽃인데!"
동굴 안은 이미 그 여인이 뿜어내는 향기에 가득차 있었다. 시리아스는 손을
들어 알리스를 기절시킨 후, 가급적이면 여인의 눈을 피하려 애썼다.
요화 알라우네, 단두대의 아가씨. 단두대에 의해 목이 잘려나간 사람들의 피가
떨어진 곳엔 그들의 원한을 머금고 알라우네가 피어나며, 그 원한이 진해지면
꽃의 정령은 여인의 모습을 하고 나타난다.
흑월…그믐밤에 나타나 상대를 유혹해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을 즐기는 마물,
그것이 알라우네였다. 하지만 마오는 알라우네에게 유혹당하지도, 알리스처럼
혼을 놓쳐버리지도 않았다.
알라우네라는 여인은 어울리지 않게 천진한 미소를 지으며 마오를 향해 서있었다.
그녀의 가슴엔 자그마한 갈색의 새 모양을 한 장식이 걸려있었다. 그걸 본 마오의
몸은 마치 머리를 얻어맞은 사람마냥 흔들리고 있었다.
마오의 음성이 떨렸다.
"너…너는……!!!"
그녀는 그런 마오를 보고 어린 아이같은 미소를 지으며 까르르 웃었다.
"안녕, 아저씨."
+ + +
내용은 흘러 흘러...어느덧 십장까지 와버렸군요.
'도부수'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이 부분인데...
작가의 역량이 딸리는 바람에 표현이 제대로 안된 것 같아여...흑.
북녘을 다스리는 검은 물의 가라한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