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알리스는 몸을 뒹굴려 시리아스의 무릎 쪽으로 머리를 옮겨갔다.
시리아스는 말없이 자신의 무릎을 대주었고, 약간 높아진 시선으로
한결 편하게 엘프의 얼굴을 바라보던 알리스는 문득 손을 들어 그녀의 볼을
쓰다듬어 보았다.
여자로서는 투박하고 짧은 손가락이 '불의 눈물자국'을 스치며 흘러내려갔다.
알리스의 입가에 문득 미소가 맺혔다.
"저 둘은 아직도 일까, 시리아스?"
"…그런 것 같습니다."
알리스가 말하는 '저 둘'이 있을 동굴 안 쪽을 흔들리는 눈빛으로 바라보며,
시리아스는 천천히 대답했다. 잠시 그녀의 붉게 흔들리는 눈동자를 쳐다보던
알리스는, 다시 한번 피식 웃으며 두 팔을 들어 시리아스의 얇은 허리를
껴안았다.
"카프린은 한참 네 짝사랑과 육체를 통한 서로의 존재 확인 중이고,
마오는 아직도 작품 손질하고 있겠지. 저기, 시리아스?"
"네?"
알리스는 상체를 약간 일으키며 자신의 팔을 그녀의 어깨에 걸면서 부드럽게
그 입술에 입맞추어 갔다. 낮게 가라앉은 쾌활하고도 삭막한 목소리가 떨려나왔다.
"…우리 일행 중에 정상인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아……."
그대로 알리스의 몸은 시리아스를 타고 눌렀다. 붉게 타오르는 눈동자는
슬픈 듯이, 하지만 모든 것을 수용하겠다는 의지를 담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고,
그래서 알리스는 주저없이 그녀의 위로 올라갔다.
※ ※ ※
마오는 몸을 부들부들 떨며 예전의 그 소녀였던 여인을 바라보았다.
그때 자신에게 천진한 미소로 인사를 건네던 모습이 남아있지 않았다면,
한 덩이 바위 속에서도 아미타 조각상을 생각한다는 제작사의 눈으로도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망치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어깨에서 등으로 이어지는 근육은 팽팽해져
무언의 압력을 뇌리에 가해주고 있었다.
여인은 그런 그의 모습을 보고 웃었다. 그리고….
"크헉-!"
뒤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알리스도 알라우네가 뿜어내는 유혹의 향기에
못이겨 쓰러진 것이겠지. 그럼 이제 남은 것은 헌이라고 하는 카프린의
소울 페어와 저 블러드 엘프….
마오는 정신을 집중시키며 알라우네를 뚫어져라 쳐다보기 시작했다.
반투명한 옷자락이 휘날리는 가운데, 그녀의 가슴 한복판에 매달린
새모양의 장식이 들어왔다.
어떻게 저 아이가 알라우네가 되어 나타났는지…
그리고 어떻게 이 차가운 콜화이트의 대지에 저 요화가 존재할 수 있는지….
하지만 그 모든 것은 뒤에 생각해도 될 일.
내가 '길'을 찾은 이후로 만들어낸 첫 번째 완성작이자 실패작.
어차피 부셔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만들어야 할 것.
그리고 내 첫 번째 완성작이자 실패작을 받은 너의 존재를 부정한다.
그러면 그토록 원하던 하늘의 작품을…!
망치의 길다란 손잡이가 자신의 실패작이 걸린 그곳을 향했다. 여인은 여전히
미소 띈 얼굴로 자신에게 손짓하고 있었다.
저 미소…저 미소만큼은 변함이 없군. 마오는 알라우네의 가슴을 향해 있는 힘을
다해 망치의 손잡이를 찔러 넣었다. 그때, 여인의 얼굴에 그 소녀의 얼굴이
겹치는 것도 같았다.
마오는 괴성을 지르며 손에 힘을 주었다.
"으아아-!"
우드득! 가슴뼈가 부러지는 음향이 들려왔다.
환청인가? 아니, 현실이군. 요화 알라우네가 만들어낸 환영에서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날 까닭이 없으니, 이건 내 가슴뼈가 부러진 것이로군.
하지만…내가 만든 것은 내가 거둔다, 온 힘을 다해서라도!
그리고 너…사류의 모든 존재를 온몸으로 부정해주겠다!
"이야아앗!"
마오는 다시 한번 괴성을 지르며 손잡이를 비틀어 올렸다. 그리고 그 끝에 닿은
무언가를 짓뭉개버렸다.
파르르-!
여인, 아니 이제는 소녀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는 사류의 가슴에 꽂혀있는
손잡이의 끝을 보며, 마오는 잔뜩 쉰 목소리로 말했다.
"빙의했군…."
"…아저씨……."
마오는 천천히 다가가 자신의 품안으로 쓰러져오는 사류의 몸을 받아내었다.
그녀의 가슴은 이미 자신의 실패작과 함께 같이 뚫려있었다. 그 뒤로 납작하게
눌려있는 핏빛 꽃잎이 눈에 들어왔다.
마오는 사류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다시 말했다.
"그래, 빙의. 그래서 이 극한의 대지에 저 요화가 존재할 수 있었던 거로군….
하지만 알라우네 혼자의 힘으로는 불가능할 텐데 어떻게…."
"아저씨…나 추워…."
"……."
말없이 사류를 안은 팔에 힘을 주며, 마오는 입가에 미소를 띠어 올렸다.
알라우네로 변해 나타난 사류를 처음 보았을 때, 그의 뇌리를 스치고 간
그 무엇…. 그리고 그 무엇은 빙계의 정령왕 펜릴 앞에서도 당당했던
작은 새의 모습과 겹쳐져 한 가지의 뚜렷한 그림을 그려내고 있었다.
마오의 투박한 손이 사류의 볼을 조심스레 쓰다듬어 갔다. 자신의 가슴에 사류의
작은 몸을 안으며, 마오는 속삭였다.
"곧 춥지 않게 해줄께…곧…."
"…으응……."
마오는 조심스레 손을 움직여 그녀의 작고 가녀린 목을 쥐어보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부푼 기대감과 설레임으로 팽팽해진 그의 손가락 근육들은
사류의 목을 꺾어놓았다.
※ ※ ※
마오는 조심스레 불의 강도를 약간 낮추었다. 무릇 금속을 녹이는데 있어 가장
손이 많이 가는 때가 바로 지금이었고, 그래서 마오는 무척 분주히 움직였다.
부글거리는 소리와 함께 황금빛 광채가 튀어 올라왔다. 풀무는 쉴 새 없이 상하
운동을 반복했고, 불꽃은 그에 장단을 맞추기라도 할 듯 너울대며 춤을 추었다.
이윽고 충분한 온도에 이르렀다고 확신하게될 즈음, 마오는 자신이 직접 만들은
연장을 사용해 금이 끓고 있는 동이를 들어올렸다. 그리고 임시로 세운 천막
한켠으로 가져갔다.
마오의 하나뿐인 외눈이 번득였다.
가장 중요한 순간, 그리고 가장 무서운 순간.
하늘의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
한번 놓치면 언제 다시 올지 모를 시간.
마오는 손목을 구부려 동이 안에 든 액체를 조심스럽게 쏟아부었다.
깨진 단지에서 새어나오는 벌꿀처럼, 단정히 앉아있는 사류의 시체 위로
황금이 흘러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