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 (56/65)

 #3. 

 그녀의 어머니는 조용한, 그러나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카프라치오는 이미 죽고 없더구나. 휴면기에 습격을 받았지.]

 레일리스는 멍한 눈으로 자신의 어머니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처음으로

 어머니의 말을 믿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그것을 표출했다.

 [그럴 리가?! 아무리 휴면기라지만 적의 침입 정도는 간파할 수 있습니다!

 드래건이 그렇게 맥없이 당할 리가….]

 [실체가 없는 존재에게 공격받았기 때문이지.]

 [……!!!]

 레일리스는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가는 것을 느꼈다.

 그래, 왜 여태까지 몰랐을까. 소년의 보라빛 눈동자와 보라빛 머리칼도

 흔한 것은 아니었지만 무색의 눈동자라는 것 역시 흔하지 않다.

 왜 여태까지 아무도 그것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지 않았을까.

 레일리스는 퍼뜩 어느 생각에까지 이르자 저절로 자신을 이루고 있는 염체가

 떨려오는 것만 같았다. 무색의 눈동자! 그리고 실체가 없는 존재!

 그 블러드 엘프는 이 사실을 알고 있는걸까.

 아니, 어쩌면 벌써부터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지.

 어떤 존재와도 조화를 이루는 그들이니, 실체가 없는 존재 정도는

 처음부터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레일리스의 입에서 득의와 조소가 뒤섞인 웃음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어머니 릴리스 님은 이미 자신들의 세계로 돌아가신지 오래,

 그러니 아무리 큰 소리로 웃는다 해도 건방지다 할 존재는 없다. 

 이걸로 그 소년의 운명은 정해진 것이다. 그 카프린이란 존재의 껍질을 둘러쓰고 

 있는 실체 없는 존재가 자신의 정체를 자각하게 된다면…그걸로 그 소년은 끝인

 것이다. 자신의 손으로 끝내지 못하는 것이 아쉽긴 하지만 말이다.

 한가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또 있었다.

 헌, 그 소년의 머리칼은 보라색이다. 정상적인 생명체들 사이에선 절대 존재하지

 않는 색소이다. 마계에 사는 존재이거나 새롭게 창조된 생물이라면 모를까….

 레일리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보다 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있지.

 그런 일을 여태껏 아무도 신경쓰지 않고 있었다는 점이야.

 그리고 그녀는 날개를 펼쳤다.

 아름다운 밤이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그녀의 몸은, 아니 그녀라고 하는

 형상을 이루고 있는 염체는 구름 속을 헤쳐가고  있었다.

※     ※     ※

 시리아스의 붉은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휘젓고 있던 알리스는,

 뒤에서 서로 다른 종류의 발소리 셋이 들려오자 고개를 돌렸다. 

 맨 처음 알리스의 눈에 들어온 것은 카프라치오-카프린의 동굴 입구 한켠을 파서

 만든 제단같은 것이었다. 그 제단 위에는 분명 마오가 만들었을 조각상 하나가

 얹혀있었고, 마오의 모습은 제단에서부터 점차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중이었다.

 마오가 만든 조각상은 여인같기도 하고 남자같기도 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보통 사람보다 많이 작은 몸집을 하고서는, 입가에는 고통인지 환희인지 모를

 표정을 떠올린 황금 좌상이었다. 그리고 알리스는 마오가 만든 작품의 재료가

 무엇인지 알 것도 같았다.

 카프린은 자신의 소울 페어인 헌이란 소년과 함께 동굴 입구 쪽에서 걸어나오고

 있었는데, 흔들리는 소년의 걸음걸이는 그 동안 어떤 일을 했는지, 그녀로

 하여금 추측이 가능하게 해주고 있었다.

 윗도리는 풀려 맨 가슴을 드러내놓고 있는 소년의 얼굴엔 불그스레한 기운이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게다가 카프린의 욕심많은 갈색 빛 손가락은 여전히

 그의 부드러운 배 부위를 애무하고 있었다.

 알리스는 고개를 휘휘 내저으며 몸을 일으키고는 시리아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카프린과 헌이 동굴 안에서 몸을 나눈 것처럼, 자신은 이 엘프와 방금 몸을

 나누었다.

 아니, 나눈다 라는 말은 맞지 않다. 그런 표현은 둘 사이에서 모종의 합의가

 이루어진 다음에야 가능하다.

 그녀는 단지 시리아스의 침묵 속에 멋대로 그녀의 몸을 갖고 장난을 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시리아스는 단지 아무 말도 안했을 뿐이지, 한번도 동의한다고

 말한 적은 없었다.

 알리스는 피식 웃으며 자신이 내민 손을 잡고 천천히 일어서는 시리아스의

 붉은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이 엘프가 자신의 고통에 그녀 자신의

 포용력을 조화시켜 어느 정도 그것을 약화시킨다 해도, 시리아스는 윤간당하며

 죽어간 데라가 될 수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지.

 나 역시 아무리 노력해도, 그리고 아무리 이 엘프에게 호감을 가지려 해도,

 이 엘프 가슴 속에 있는 헌이란 소년은 되지 못하는 거야.

 알리스는 어느 때보다도 쾌활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자, 다들 각자 일들은 다 끝난 건가?"

 "아아."

 그녀의 질문에 카프린은 살짝 웃으며 대답했고, 헌은 그의 눈을 쳐다보며

 마주 웃어 주었다. 그리고 마오는 평소처럼 침묵으로 일관했다.

 알리스의 입가에 미소가 짙게 배였다.

 그래, 이게 우리들의 진짜 모습이야.

 누구도 막지 못하는 '검은 바람' 카프린의 용병대.

 지금까지의 행동들은 단지 악몽이었던 거야. 다음날 깨어나면 다 꺼져가는

 모닥불의 연기를 타고 사라지는 그런 악몽.

 알리스는 그 미소 그대로 경쾌하게 소리쳤다.

 "좋아, 그럼 출발하자고! 우선 아침부터 해결해야 겠어, 카프린!"

 "왜 거기서 내 이름이 나오는 거냐?"

 툴툴거리며 대답하기는 했지만 카프린의 얼굴 역시 밝아 보였다.

 자신의 기억을 되찾고 자신의 정체성을 나름대로 확인한 그는, 앞으로 더 이상의 

 미련없이 그의 옆에 서있는 소울 페어와 함께 걸어갈 것이다. 

 알리스는 크게 웃음을 터트리고 싶은 것을 참으며-그녀의 웃음소리에 놀라

 작은 짐승들이 달아나 버리면 아침꺼리가 없어지므로-카프린의 정강이를 겨냥해

 자신의 발을 휘둘렀다.

 잠시 후, 그들 카프린 용병대에게는 정겨운 모습이 재현되었다.

 즉, 언제나 처럼 알리스의 공격을 수월하게 피해낸 카프린의 다리와,

 목표물을 잃어버린 덕에 휘청거리는 알리스의 몸을 집어 수풀 속으로

 내던지는 갈색의 가느다란 팔이 짧은 시간 동안 교차한 것이다.

 야영한 날의 아침은 늘 그렇듯이, 수풀 속으로 던져진 알리스는 이슬로

 흠뻑 목욕과 빨래를 같이 한 모습으로, 손과 입에 각각 하얀 토끼 한 마리 씩을

 잡은 채 걸어나왔다.

 그리고 언제나 처럼 알리스는 흠뻑 젖었음에도 불구하고, 큰 소리로 웃어대며

 자신의 닻을 휘둘러 카프린이 있었던 자리를 향해 내려쳤다. 그녀의 얼굴엔

 예전의 그런 아침마다 지었던 미소보다 훨씬 밝아 보이는 미소가, 안도감과 함께 

 피어오르고 있었다.

 +                +               +

 사람은 불안하게 되면 무언가에 의지하려 들지요.

 헌의 경우는 아무것도 마음에 담아온 것이 없기때문에

 그토록 카프린에게 애착하는 것이고...

 알리스의 경우는...좀 설명하기 힘듭니다.

 글구 '도부수'는 누차 말씀드리지만 삼류 변태 호러 환타지를 지향합니다.

 문학성이나, 주제의 심오함이나, 전개의 화려함같은 것은 포기한지 오래...

 북녘을 다스리는 검은 물의 가라한이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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