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정령들이 머무는 정령계는 땅, 불, 바람, 물, 그리고 정신 계열의
다섯 지역으로 나뉘어 있다. 적어도 시리아스는 그렇게 알고 있었다.
땅은 어머니의 포근함으로 모든 것을 감싸안는다.
반면 지계의 정령왕인 베헤모스는 특유의 난폭함으로 모든 길짐승 위에 군림한다.
불은 땅과는 달리 아버지의 엄격함으로 모든 것을 징벌한다.
그리고 화계의 정령왕인 이프리트는 모든 사물 안에 자신의 일부를 숨겨두었다.
최후의 그날, 그들이 자신을 향해 타오를 수 있도록.
바람은 불이 태우고 난 재를 실어 멀리까지 날라준다.
풍계의 정령왕인 진은 그래서 정령왕들 중 가장 자유로울 수 있는 특권을 지녔다.
바람의 또다른 모습인 번개는, 날려온 재 속에서 예전의 불이었을 때의 모습을
상기하려 애쓰며 순간적으로 번쩍인다.
뇌계의 정령왕 지즈는 끊없는 변화를 통해 모든 날짐승 위에 군림한다.
물은 번개가 자기 자신을 사른 뒤 흘리는 눈물이다. 그 눈물로 어머니 대지를
촉촉하게 적시며 새로운 생명을 일어나게 한다.
수계의 정령왕 레비아탄은 모든 물짐승 위에 군림하며, 또한 모든 생명체의
종말을 지켜볼 의무를 지닌다.
물의 또다른 모습인 얼음은 차갑고 냉철함을 보여준다.
빙계의 정령왕 펜릴은 그 시린 송곳니로 종말에 다가오는 생명체들을 심판한다.
그리고 정신계. 위의 것들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것들. 물론 위에 열거한 것들
외에 임계가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땅과 물의 어울림 속에서 만들어진 것에
지나지 않는다.
반면 정신계는…세계를 이루고 있는 사대 원소에 속하지 않으면서도
세계를 이루는데 있어 빠져서는 안되는 중요한 원소.
그리고 정령왕이 존재하지 않는 유일한 정령계.
시리아스는 자신의 앞에서 말고삐를 쥐고 천천히 방향을 잡는 알리스의 허리를
단단히 껴안았다. 방금 전까지 자신이 이 여자의 손길 아래 자신의 몸을 맡겼다는
것이, 마치 꿈 속의 일처럼 생각되었다.
정신계의 정령들은 사람의 감정에 관여한다. 특히 엘프나 인간, 호비트같이
감정이 풍부한 종족들에게 그러하다. 그리고 시리아스 자신은 엘프, 그녀가
사랑하고 있는 이는 인간. 그가 사랑하고 있는 존재는 모든 감정을 꿈 속의
것으로 밖에 생각하지 않는 드래건, 아니….
시리아스는 고개를 휘휘 내저으며 알리스의 등에 자신의 얼굴을 파묻었다.
그가 어떤 존재이건 간에 이제 자신의 손에서 헌은 멀어져 갔다. 더 이상 그녀가
잡아줄 수 없는 곳으로 가서, 그 존재의 옆에 서는 것을 그는 원했다.
하지만…하지만 그가 자신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자신의 본분을 다하게 된다면…
만일 그런 날이 온다면 과연 저 소년은 계속 저대로 서있을 수 있을까.
시리아스는 처음 만난 그 날부터 쭉 마음에 두고 있었던 헌의 보라빛 머리칼과
눈동자를 주시하였다. 그리고 눈을 돌려 이번엔 카프린의 무색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만들어진 존재와 실체가 없는 존재…그 둘의 관계는 소울 페어, 영혼의 동반자.
우연? 아니면 필연일까?
시리아스는 더 이상 생각하기를 그만두었다. 최악의 경우, 그녀는 자신의 목숨과
바꿔서라도 그녀가 사랑하는 이를 지킬 수 있다. 그 후는 생각하지 않아도 좋았다.
그대로 시리아스는 자신의 얼굴을 스쳐 지나가는 바람을 느껴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요즘엔 왠지 실프들의 움직임이 점점 미약해져 간다는 것을 상기해내었다.
※ ※ ※
솔리아드는 세 번째로 카드를 배열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는 매우 숙달된
점술사이므로, 같은 주제를 갖고 여러번 점을 치는 따위의 일은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번 일의 경우는 상황이 달랐다. 세계의 일이 걸린 점이므로,
그는 자신의 점괘를 평소처럼 믿을 수 없었으며, 더욱이 지금같은 패를
얻었을 경우는 말할 것도 없었다.
솔리아드는 숨을 고르게 내쉬려고 노력하며, 아무 생각없이 카드를 나누었다.
그리고 나눈 두 무더기 중 한 곳에서 아무 카드나 뽑아 탁자에 놓았다.
카드를 뒤집는 그의 손이 약간 떨렸다.
솔리아드는 눈을 부릅떴다. 그는 이를 악물고 자신이 선택한, 그리고 이 세계의
운명을 말해주는 카드를 바라보았다.
똑같았다. 세 번 모두 똑같았다. 이젠 더 이상의 의심의 여지도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것이 이 세계의 운명이라니!
솔리아드는 조용히 자신이 뽑은 카드를 바라보았다. 불룩한 보따리를 등에
짊어지고, 우스운 복장을 한 채 걸어가고 있는 사람이 그려진 카드였다.
광대의 카드. 솔리아드가 금기를 어기면서까지 점의 횟수를 늘려 얻어낸 카드의
이름이었다. 그것의 비밀스러운 이름은 '조커', 즉 '전혀 뜻밖의 것으로 변할
수도 있는 상황'을 뜻한다.
솔리아드는 자신의 두손으로 이마에 늘어진 머리칼을 쓰다듬어 올렸다.
그 동작 하나만으로도 자신이 늙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솔리아드였다.
그는 피식 웃었다. 늙는다라…과연 그런 표현이 옳을까. 차라리 깊어졌다고 하는
표현이 맞겠지. 그토록 오랜 시간이 흘러갔어도 자신의 겉모습은 이천 팔백년
전에 비해 나이를 먹은 흔적이 절대 보이지 않았다.
"그래, 다만 눈동자 속에 그동안 살아온 세월의 깊이가 더욱 깊어졌을 뿐이지."
솔리아드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한달 전에 아즈탄 협곡에서 헤어진
그들을 찾아내려면 서둘러 움직이는 편이 좋다.
그는 오른손을 내밀어 자신의 배낭을 짊어진 후, 탁자 위에 널린 카드를
잘 갈무리해서 주머니 속에 넣었다. 그리고 자신이 묶었던 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음유시인으로 생활해 오며 배어버린 습관이었다.
침상 위까지 깨끗이 털어놓고, 마지막으로 의자를 탁자 옆에 가지런히 정돈한
솔리아드는 1골드 짜리 금화를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숨을 한번 크게
내쉰 후 그는 눈을 감았다.
잠시 동안 눈을 감고 서있는 그의 몸이 미미하게 떨려왔다. 무언가가 몸에 내려온
듯, 그의 몸에 난 털 하나 하나가 매우 격렬하게 움직였다.
새벽이 물러나고 햇빛이 창문을 두드릴 즈음, 솔리아드는 눈을 떴다.
단순히 느낌만인지도 모르지만 요즈음 들어서 초신술이 더 어려워지고
있는 것 같았다.
지금만 해도 운명의 길을 보는 안(하라 신계의 하늘신. 작가주)을 불러내는데
이렇게나 시간이 걸렸다. 이전만 해도 각 신계의 주신들을 불러내는데 단 10분도
소요하지 않은 그로서는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솔리아드는 잠시 그의 친구 파르미안이 한 말을 상기했다. 정말로 각 종족에게
멸망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는 것인가. 그리고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해,
그 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살아남기 위해, 엘시타이의 진노를 피하기 위해
인간을….
솔리아드는 방문을 나섰다. 그리고 하늘신 안이 보여준 장소를 향해 발을 옮기기
시작했다. 세상이 멸망하는 날이 오더라도 그들 종족은 살아남을 것이다. 그리고
또다시 올 세상의 유지 법칙을 만드는데 있어 참고가 되겠지. 이 얼마나 합당한
존재 이유인가.
그래, 그 때문에 부여받은 관조자의 의무…충실하게 이행해주겠어, 파르미안.
그리고 솔리아드는 콜화이트에서 리트마를 향해 내려오고 있는 헌 일행을 찾아
몸을 움직였다. 자신의 점괘를 확인하기 위해, 그리고 파멸의 시작을 관조하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