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 (58/65)

 #5. 

 해동의 스물 여섯 번째 '한'인 다리수는 다섯 번째 칸인 '물의 칸'에서

 막 일흔 두 번의 목각(목욕의 옛말. 작가주)을 마쳤다. 이로써 모두 세온 예순 번

 (360번. 작가주)의 목각을 마친 것이다.

 그리고 다리수는 목각터에서 걸어나왔다. 옆에 서있던 계집들이 재빨리 자신의

 몸을 닦아주며 하늘옷을 입혀주었다. 

 아사달 한 가운데에는 이미 '내림터(제단. 작가주)'가 만들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역시 방금 다섯 개의 칸을 다 돌아다니며 목각을 함으로써

 '하늘오름'을 할 채비를 마쳤다. 

 해동의 수도라 할 수 있는 아사달. 중원 사람들이 신시(神市)라 부르는 이곳은,

 지금 빛을 머금고 있다는 박달나무를 본딴 내림터와 그 곁을 둘러싸고 있는

 다섯 개의 작은 움막들로 들어차 있었다.

 첫 번째 움막, 나무의 칸. 푸른 미루(용. 작가주)가 다스리는 뻗침의 힘.

 두 번째 움막, 불의 칸. 붉은 나루(봉황. 작가주)가 다스리는 번짐의 힘.

 세 번째 움막, 흙의 칸. 누런 외뿔사슴(기린. 작가주)이 다스리는 어울림의 힘.

 네 번째 움막, 쇠의 칸. 허연 범이 다스리는 살림의 힘.

 다섯 번째 움막, 물의 칸. 검은 거북이 다스리는 죽음의 힘.

 각 칸마다 일흔 두 번의 목각을 함으로 해서, 다리수는 하늘의 동그라미를

 의미하는 세온 예순 번의 목각을 했다. 그것은 이제 그가 저 하늘 너머

 새로운 아사달에 계실 한 중의 한, 환단 가한께 '하늘오름짓'을 할 채비가

 되었다는 얘기이다.

 하늘옷을 입고, 각각 한 손에 방울달린 거울과 날없는 칼을 든 다리수는 내림터

 위로 올라갔다.  모여든 사람들을 한번 바라보던 올해 갓 스물된 다리수는,

 그들 가운데 자신의 세 스승인, '바람', '비', '구름' 어르신들이 있는 것을

 다시 보고 나서 하늘오름을 시작했다. 

 방울이 마구 흔들리며 거울에 비친 햇살이 눈부시게 빛났다. 그 햇살이 정확하게 

 내린터의 한 가운데를 가리킬 때, 다리수는 힘차게 칼을 들어올리며 해동의

 한들에게 내려오는 하늘 오름의 말을 외쳤다.   

 매우 높은 곳에 머무시며

 매우 깊은 곳까지 뚫어보시고

 어떤 어둠이라도 살라버리시며 

 어떤 빛보다도 밝은 빛이신

 한들 가운데 한, 환단 님께 

 배달의 곰 어머니 이름을 빌어

 여기 엎드려 바라옵나니

 모든 그릇된 것을 부술 해모수의 활을 내려주소서.

 나를 미워하는 이들이 곳곳에 가득하나이다.

 모든 참된 것을 바로 세울 치우의 칼을 내려주소서.

 나를 헐뜯는 이들이 곳곳에 숨어있나이다.

 한이시여, 나의 가한이시여.

 나를 내버려 두시리이까, 정녕 나를 버리시리이까.

 나를 건져주소서, 그 굳건한 팔로 나를 세워주소서. 

 그리하여 모든 이들 앞에 나를 드러내소서.

 한이시여, 나의 가한이시여!

 "커헉-!"

 마지막 말을 내뱉고서 다리수는 한모금 피를 토해내었다. 다리가 후들거려왔다.

 익히 들어 알고는 있었지만, 새 아사달에 계신 환단 가한께 하늘오름을 하는 것은

 많은 힘을 들이는 일이었다.

 그리고 다리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사람들의 얼굴

 속에 다시 자신의 세 스승들을 본 다리수가 마지막으로 느낀 것은,

 왜 환단 가한께서 끝내 자신의 하늘오름을 받아들이지 않으셨나 하는 것이었다.

※     ※     ※

 에페르타 산맥 깊숙한 곳에 자리잡고 있는 그 동굴에서, 허름한 로브를 걸친

 금발 사내가 걸어나왔다. 그는 황금빛 광채가 흘러나오는 눈동자를 들어

 무언가를 쳐다보는 듯 했다. 

 한참을 그렇게 서있던 그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조커의 패를…열 때가 되었다."

 그 말소리는 별로 크지는 않았지만 깊숙한 곳에서 울려나오는 메아리처럼 바람을

 타고 멀리 멀리까지 날아갔다. 그리고 마침내 바람은 매서운 얼음 폭풍이 되어

 콜화이트의 굳어버린 대지를 후려쳤다.

 잠시 후, 아무것도 살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이 극한의 대지 위로 다섯 명의

 사람들과 세 마리의 말이 나타났다. 카프린 용병대와 헌 일행이었다. 리트마를

 목적지로 삼았는지, 그들의 행로는 남쪽을 향해 있었다.

 매서운 추위에도 불구하고 일행은 그다지 영향을 받지 않는 듯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시리아스의 불의 정령력이 알리스와 마오를 감싸 안고 있었고,

 헌은 이제는 드래건인 것을 받아들인 카프린의 망토 안에 파묻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갑자기 일행의 걸음이 하필 그 자리에 멈춘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카프린은 말이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을 보고 땅으로 내려섰고,

 이어 말의 발굽 사이에 다 짓이겨진 꽃이 달라 붙어있는 것을 발견했다.

 극한의 대지에 사는 식물들은 살아남기 위해 나름대로의 생존전략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이 꽃의 경우는 으깨어졌을 때 나오는 점액을 이용해, 자신을 밟은

 생물의 행동을 방해하여 얼어죽게 한 다음, 그 시체 속에 기생하는 쪽을 택한

 것 같았다. 

 카프린은 어깨를 으쓱한 후, 헌을 향해 눈짓했다. 주변에 눈더미를 헤치고

 솟아나온, 같은 종류의 꽃들이 그의 추리가 타당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눈더미 속에서 삐져나온 손이나 짐승의 다리들은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헌이 달라붙은 말의 앞발을 조심스럽게 들어올렸다. 오우거 몸집만한 설인도

 빠져나오지 못하는 점액질이다. 헌은 그것이 자신의 몸과, 그리고 카프린의 몸에

 안 묻도록 주의했다.

 헌이 있는 힘을 다해 말의 앞발을 들어올리고 있는 사이, 카프린은 자신의 칼을

 꺼내어 늘어난 점액질들을 차근차근 제거했다. 

 그때였다. 헌은 어떤 날카로운 것이 자신의 뒤에서 솟아나오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 순간, 헌의 가슴을 뚫고 나온 검은 칼날은 카프린의 목까지 관통하고 있었다. 

 헌은 고꾸라질 것같은 아픔 속에서도 카프린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크흐윽-!"

 도대체 누가…하는 의문보다 카프린의 생사가 더 중요하게 다가왔다.

 헌은 있는 힘을 다해 손을 내뻗었다. 그러나 그 손은 결코 카프린의 얼굴에

 와닿지 않았다. 

 카프린, 그는 웃고 있었다. 도대체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던 그는,

 지금 웃고 있었다. 그리고 그 웃음은 칼에 꿰뚫린 헌의 가슴보다도 더 그를

 아프게 했다.

 "카프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를 불러야 하는데, 그를 멈추게 해야 하는데,

 그를 위로해 주어야 하는데, 그런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카…프린."

 헌은 다시 한번 있는 힘을 다 쥐어짜내어 그를 불러보려 했다. 그러나 카프린은

 이미 그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의 그런 태도가 다시 한번 헌을 아프게 했다.

 헌이 다시 한번 그의 이름을 부르려는 순간, 녹색의 거대한 그림자가 나타났다.

 그리고 바람이 한번 일었다. 

 시리아스가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하고서 소년에게 달려왔을 때, 카프린의 몸은

 지즈에게 들려 어딘가로 사라져 버린 후였다. 그리고 그때서야 비로써 헌은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카프린-!"

 +                    +                 +

 눈치채신 분들도 있으시겠지만...카프린의 진짜 정체는 드래건이 아닙니다.

 그럼 카프린은 무엇일까요? 알아맞추시는 분에게는 '도부수' 모음집을...퍽!

 헛소리였습니다...

 카프린에 대한 얘기는 십이장에서 계속 될 겁니다.

 카프린은 도대체 어떤 존재인지, 그리고 헌과의 관계는 도대체 무엇인지에 대해.

 북녘을 다스리는 검은 물의 가라한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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