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알리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일단 손을 거두어 들였다.
깔끔한 솜씨로 척추와 가슴뼈를 꿰뚫었기에 오히려 치료하기는 더 수월했다.
그런 면에 있어서 그 정체불명의 습격자에게 손이라도 모아
감사드려야 할 판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 소년의 몸 상태는 별로 좋지 않았다. 그 점에 있어,
알리스는 손들고 항복표시를 해보였다.
"다섯 시간 계속해서 치유마법을 걸어도 안 좋아지는건 순전히 자신에게
달린 문제라고."
알리스는 그렇게 말하며 약간 떨리고 있는 시리아스의 어깨를 감싸 안아보았지만
그녀는 반응하지 않았다. 그녀의 눈은 헌의 입에 고정되어 있었다.
가슴에서 피를 흘리면서도 그 소년은 있는 힘을 다해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 때문에 상처가 터져 피가 더 세게 흘러나왔지만, 그는 상관하지 않고
계속해서 그의 이름을 불러대었다.
게다가 그가 사라진 곳을 향해 뛰어 가려고 까지 했다. 그 몸을 하고서도 그토록
애타게 불렀지만 카프린은 돌아오지 않았고, 그래서 헌은 뛰기 시작했다.
결국 마오가 자신의 주먹으로 뒤통수를 쳐서 기절시킨 후에야, 알리스는 비로써
치유 마법을 걸 수 있었다. 그 상황에 대해 알리스는 단 한마디로 요약해버렸다.
"도대체 어떻게 된거야?"
그러나 그 질문에 답해줄 수 있는 이는 적어도 일행 중에는 없었다.
최소한 시리아스는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 알리스는, 궁금함을 듬뿍
담은 눈초리를 그녀에게 보내보았지만, 그녀는 줄곧 헌만을 바라볼 뿐 알리스에겐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알리스는 할 수 없이 마오의 목에 자신의 닻을 걸어보았지만, 마오 역시 묵묵히
손을 들어 그 닻을 치움으로 해서 자기 역시 모른다는 의사를 해보였다.
하긴 마오도 다음에 만들 '하늘의 작품'을 생각하느라 정신이 없어 보이긴 했다.
"기다리는 수밖에 없겠네…."
알리스는 결국 포기했다는 표정을 해보이며 제자리에 풀썩 주저앉았고,
마오의 동의도 얻지 않은채 그의 다리를 끌어다가 베개대신 베어버렸다.
그리고는 뺨에 와닿는 바람이 없는 곳으로 몸을 옮겨 잠을 청하기 시작했다.
※ ※ ※
"일을 완수했습니다…."
"수고했다, 카린."
예의 허름한 로브를 걸친 사내는 자신 앞에 놓인 잔을 들어 한 모금 목을 축였다.
그리고 자신의 뒤에 있는 그림자를 향해 다른 잔을 내밀었다.
"마시려는가?"
"…좋습니다."
그리고 그의 그림자 속에서 하나의 인영이 스르륵 흘러나왔다. 은색의 머리칼을
휘날리는 검은 피부의 엘프, 카린이었다.
그-또는 그녀는 금발 사내가 내밀고 있는 잔을 받아들어 자신의 입으로 가져갔다.
노란 호박색 빛이 감도는 액체가 그-또는 그녀의 목구멍 속으로 흘러들어갔다.
카린은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핥으며 금발 사내 앞에 앉았다.
"…금이로군요, 순수한 금을 녹여 술로 만들은 거로군요."
"알아냈군."
금발 사내의 목소리에 높낮이가 없었다. 아무리 폴리모프하고 있는 상태라
하더라도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겠지. 카린은 피식 웃으며 동굴 안을
한번 쓰윽 하고 훑어보았다. 골드의 일족답게 보석은 별로 보이지 않았다.
"그럼 보수를 주도록 하지."
카린은 그 말에 문득 정신을 차렸다. 드디어 보수를 받는다!
그 생각을 하자, 그-또는 그녀는 자신의 몸 구석구석에서 벼락이 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카린은 눈을 들어 금발 사내를 바라보았다.
이미 사내의 손은 희미한 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어느 순간 사내의 손이 카린의 몸에 닿았고, 손에서 빛나던 금빛 줄기는
그-또는 그녀의 몸 안으로 흘러들어갔다. 순간, 카린은 자신이 그토록 원하던
폴리모프의 법을 드디어 얻었음을 알 수 있었다.
※ ※ ※
중원의 황제는 침중한 안색으로 자신의 침상 머리맡에 놓여있던 편지를
집어들었다. 이런 방식으로 편지를 보내올 이는 이 넓은 쿠리안에
단 한 사람뿐이었다. 그 편지는 이렇게 시작하고 있었다.
'해동의 스물 여섯 번째 가한이 중원의 황제에게 인사보내오.'
해동. 해뜨는 곳에 있는 땅이라 하여 이름붙은 것이 해동.
자신들만의 글자인 가림토를 쓰며, 자신들만의 왕인 가한을 섬기고,
자신들만의 신계인 아사달 신계를 섬긴다.
쿠리안 내에서 자신의 명령이 통하지 않는 유일한 땅, 해동.
해동 옆에 '눈으로 보기엔 한 시간, 실제 가면은 나흘'걸린다는
기이한 강이 있고, 그 강 건너에 동영이란 나라가 있다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그러나 그 곳은 야만스럽고 미개한 곳이어서
굳이 정복할 필요조차 없었다. 문제는 해동이었다.
대신들의 열화와 같은 상소가 해동을 정복하고자 하는 자신의 욕구를
끊임없이 불태우면서도 끝내 그 일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해동은 건드리기에 너무 강했다. 어느 누구도 잠자고 있는 범을 깨우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해동이 그런 곳이었다. 하다 못해 갓 세 살난 아이들조차도
전쟁이 일어난다면 자신들의 나라를 위해 창칼을 잡을 나라, 그래서 무서운
해동이었다.
게다가 자신은 지금 그들과…. 황제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는 침상에서 몸을
일으켜 편지의 내용을 자세히 읽기 시작했다.
문득 그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언뜻 보기에 편지의 내용은 별로 특별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세상에 퍼진 기운이 심상치 않아 하늘오름짓을 했는데 환단
가한이 응답을 안 하더라…. 그게 내용의 전부였다.
하지만 해동의 가한이 별 것 아닌 일로 이런 편지를 보냈을 리는 없다.
적어도 그가 자신과 한 약속을 지킨다면…. 중원의 황제는 잡생각을
떨쳐버리려는 듯 고개를 한번 흔들고는 편지를 다시 한번 꼼꼼히 읽기 시작했다.
창 밖으로는 일찍 일어난 새들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간간히 바닥에 스쳐가는
시녀들의 옷자락이 소리를 내며 그 노래에 어울리고 있었다. 중원 황실의 여느때와
같은, 아니 약간은 특별한 새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