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 (60/65)

 #2.

 가지 말아요…. 가느다란 목소리가 그의 입에서 새어나오는 것을 보며,

 시리아스는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끝내 이 사람은 못 잊고 있는거야. 불쌍한 사람…. 믿을 수 없을만치 아름다운

 얼굴을 하고서, 나한테는 끝내 보여주지 않았던 그 미소를 짓고 있군요, 당신.

 시리아스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소년의 가슴팍에 새겨진 하얀 흉터를 쓰다듬어

 갔다. 문득 시리아스는 몸을 돌렸다. 알리스의 웃는 얼굴이 그녀의 눈동자에

 들어왔다.

 문득 그녀가 뒷머리를 긁적이더니 입을 열었다.

 "이제 슬슬 말해줘도 되지 않아?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시리아스는 살짝 고개를 숙여보였다. 

 "저도…자세하게는 알지 못해요. 단지 습격한 사람이 쉐도우 엘프라는 것정도

 밖에는…."

 "그건 나도 짐작하고 있었어."

 알리스는 소리나지 않게 주의하며 시리아스 옆으로 다가와 앉았다. 모포를

 둘러쓰고, 상처가 있는 부위까지 담요를 덮어 몸이 차가워지지 않게 해놓은

 소년의 몸. 하얗게 빛나는 그의 피부는 정말 고왔다. 

 카프린이 반해버린 것도 우연은 아니었군. 하지만 왜?

 알리스는 그런 의문을 품고 있다는 것을 잊지 않으려 노력하며,

 시리아스를 바라보았다.

 "그림자 속에서 튀어나와 공격하는 방식은 쉐도우 엘프, 그것도 남녀추니의

 몸이라는 카린이 즐겨 쓰는 거야. 그 외에 동영이란 곳의 닌자들이 쓴다지만

 그렇게 깔끔하게 칼날을 관통시킬 수 있는 이는 거의 없어. 오직 1500년 간의

 수명을 지닌 쉐도우 엘프들 뿐이지."

 알리스는 손을 들어 자신의 앞 머리칼을 움켜쥐며 말을 이었다.

 "내가 알고 싶은 것은…도대체 그 놈이 노린 것이 누구냐 하는 점이야.

 둘 다 노렸을 수도 있지만…카프린은 죽지 않았어. 만일 그를 노렸다면

 다시 덤벼들어 숨통을 끊어 놓았겠지."

 알리스의 손이 시리아스의 어깨를 잡아갔다. 그녀의 몸이 흠칫하며 벗어나려

 했지만 알리스는 놓아주지 않았다. 그대로 알리스는 얼굴을 들이대며 그녀에게

 물었다.

 "알고 있지? 넌 알고 있겠지? 어떤 상황에서도 조화를 이루어 내는 엘프이니

 알고 있는 것이 당연한가?"

 시리아스의 눈가에 눈물방울이 맺혔다. 알리스의 움켜쥔 손의 힘이 강해진

 것이다. 어깨가 아파왔지만, 알리스는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문득 갑작스럽게 알리스가 그녀의 가슴으로 얼굴을 파묻어 왔다. 그녀가 뿌리칠

 새도 없었다. 그 상태로 알리스는 흐느꼈다. 흐느끼며 그녀는 계속 말을 이으려

 애썼다.

 "가르쳐 줘, 제발…시리아스. 도대체 일이 어떻게 되어 가는거야…

왜 이렇게 마음이 불안한 거야. 말해줘, 시리아스 뮤프넬……!"

 시리아스는 팔을 들어 알리스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이 강해보이는 여자도 실은 

 두려웠던 거다. 정령왕들이 대담하는 자리를 보았고, 같이 지내온 용병 동료가

 드래건의 폴리모프, 아니 그럴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 모든 사실을 알고도 이 자리에 서있는 것만 해도 매우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결국 시리아스는 이 소녀라고 해야할 나이의 용병에게 모든걸 말해주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입을 열었다.

 "카프린은…아니 카프린이라고 불렸던 것은……."

※     ※     ※

 대신관은 회생제의 때나 입을 법한 잿빛 법의를 입고 제단 앞에 섰다.

 회색빛의 구체가 정면으로 들어왔다. 그 밑으로는 이미 성황청에서는

 금지되어 모든 성스러운 책들에서 삭제된 구절이 적혀있었다.

 '태초 이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 텅 빈 공간에 커다란 혼이 내려왔다.

 그 혼은 어느 빛보다도 밝게 빛나고 있었고,

 어느 어둠보다도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한 순간, 커다란 혼은 회색빛 구체가 되었다가

 밝은 부분과 어두운 부분으로 갈라졌다. 

 밝은 부분에서 빛의 파편들이 튀어나왔다. 그들은 영혼이 되었다.

 어두운 부분에서 어둠의 파편들이 튀어나왔다. 그들은 그림자가 되었다.

 그들의 밝기와 어둡기가 서로 달랐으므로,

 최초에 내려온 그 혼은 그들의 수련을 위해 땅을 창조하고

 자신의 조각들을 그곳에 내려보냈다. 

 처음에 땅에 도착한 빛의 조각들 중 그나마 밝기가 강한 것들은 신이 되었다.

 그들은 창조주가 보는 앞에서 자신들만의 신계를 만들고 그곳의 주신이 되었다.

 처음에 땅에 도착한 어둠의 조각들 중 그나마 어둡기가 강한 것들은 마가 되었다.

 그들은 창조주가 보는 앞에서 자신들만의 마계를 만들고 그곳의 마제가 되었다. 

 빛이 있어 그림자가 있고 그림자가 있어 빛이 있었지만

 그들은 그것을 알지 못했다.

 빛과 그림자는 서로를 미워했고,

 서로 자신들보다 더 작은 파편들을 불러모아

 자신들의 편으로 끌어들이는데 주력했다.

 그리고 드디어 전투가 시작되었다.

 주신들은 하위 신들을 부리며, 용들의 제왕과 함께 싸웠다.

 뇌계와 지계, 수계의 정령들이 거기에 가담했다.

 마제들은 하위 마족들을 부리며, 드래건들의 제왕과 함께 싸웠다.

 화계와 풍계, 빙계의 정령들이 거기에 가담했다. 

 정신계의 정령들이 중립을 선언한 가운데

 치열한 전투가 칠일 낮 칠일 밤으로 계속 되었다.

 낮에는 빛이 우세했고, 밤에는 그림자가 우세했다.

 그러나 각 빛마다 그림자를 갖고 있었고, 각 그림자마다 빛을 갖고 있었으므로,

 빛을 죽이면 그림자도 죽었고 그림자를 죽이면 빛도 죽었다.

 칠일 째 밤이 지나고 새벽이 올 무렵, 창조신 엘시타이가 개입했다.

 그는 자신의 천사들을 시켜 빛과 그림자들을 관리하게 하고,

 그들이 같이 어울릴 수 있는 그릇을 만들기로 결정했다.

 그것이 인간이었다.

 엘시타이의 천사들 중 최고위 세라핌인 광천사 루시펠이 빛을 빚어내었고,

 암천사 사마엘이 어둠을 빚어내었다. 그래서 인간이 만들어졌다.

 빛에도, 어둠에도 속하지 않았기에

 인간은 모든 종족들의 장점을 다 지닐 수 있는 특권을 지녔다.

 그리고 최후의 날이 오면 빛은 더 큰 빛으로, 어둠은 더 큰 어둠으로 돌아가

 또다시 엘시타이의 부분이 될 것이다.

 그 날이 언제인지는 주신들도 모르고 마제들도 모른다.

 허나 엘시타이께선 알고 계신다.

 처음의 처음부터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해뜨는 곳에서 해지는 곳까지

 그 분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 창조주 엘시타이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

 일반인들이 알면 동요할만한 내용이다. 아니 대번에 폭동이 일어날 것이 뻔하다.

 그들이 알고 있는 엘시타이는 자애로운 빛의 신으로써, 선의 궁극점에 달해 있는

 신이다. 선과 악을 한 몸에 지니고 있다는 말을 받아들일 수 있을리 없다. 

 성황청에서 이 구절을 삭제해버린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감출 수 있는

 비밀은 없는 법, 이제 엘시타이의 본질에 대한 것은 주신관 이상의 신관들

 사이에선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또 하나, 언제나 처럼의 월례 행사로 이번 달에 일어날 일들에 대해 신관들이

 질문을 던졌을 때, 천사들이 대답을 하지 않았다는 것까지 밖으로 새어나간다면,

 성황청을 비롯한 엘시타이의 신전들은 두려움에 대한 무분별한 분노에 가득 찬

 군중들에 의해 짓밟히리라.

 거기까지 생각한 대신관은 웃으며 중얼거렸다.

 "히메스…인가?"

 "그렇게 생각합니다, 대신관 님."

 그의 뒤에 서있는 젊은 주신관을 향해 돌아서며, 대신관은 다시 한번 중얼거렸다.

 "히메스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