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솔리아드는 눈을 들어 자신의 앞에 펼쳐진 설원을 바라보았다.
이곳에서 헌 일행의 자취가 잠시 끊겼다. 그것으로 보아 그들은 여기서
야영을 한 것이 틀림없었다. 희미하게 남아있는 재의 냄새가 그의 생각을
증명해주었다.
순간 그의 눈썹이 약간 찌푸려졌다. 긴급하게 달려온 듯한 발자국.
크기와 보폭을 보아 여성의 것이다. 아마도 그 소년과 함께 다니던 엘프겠지.
그리고 그의 눈은 정확히 근처에 떨어져 있는 핏자국 몇 개를 찾아내었다.
습격자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즉 공중에서 뛰어내려 공격했거나,
아공간에서 튀어나왔거나 둘 중의 하나 형태란 것이다.
이중 첫 번째 것은 그가 생각해도 이상해 보였다.
이미 상당한 실전 경험을 지니고 있는 소년이었다. 그렇게 움직임이 큰 상대를
내버려둘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두 번째 경우, 그것도….
"그림자 속에서 튀어나왔군…. 이미 조커의 패는 그 효력을 발휘하고 있었어,
후훗."
솔리아드는 피식 웃었다. 내가 늦어버렸군. 하지만 그의 최후를 지켜보는
것까지는 할 수 있겠지. 서둘러야겠어.
그리고 그는 발걸음을 다시 옮기기 시작했다. 그의 시선은 이미 콜화이트와
리트마 사이의 국경선 부근을 차분히 훑어보고 있었다.
※ ※ ※
레일리스는 조용히 소년의 마음 속으로 들어섰다. 예상했던 대로 이미 방어막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리고 레일리스는 예전에 자신이 보았던 소년의 의식 깊숙한
곳에 자리잡고 있는 호수를 볼 수 있었다.
호수는 죽어있었다. 아니 사라져 있었다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호수가 있던
자리엔 거뭇하게 변해버린 구덩이만이 남아있었다. 가운데에 서있었던 얼음 기둥
역시 그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레일리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릴리스 님의 말에 의하면, 드래건들은 한 죽어가는 블랙 드래건-그의 이름은
카프라치오였다-의 드래건 하트를 한 도플 갱어로 하여금 손에 넣게 했다고 한다.
그 블랙 드래건 카프라치오의 뇌를, [브레인 스토커] 주문을 사용해 그것의 기억
속에 덮어 씌워 버린 것이었다. 카프린이라고 하는 사내의 기억은 그렇게 조작된
것이었다.
조작된 기억으로 인해 만들어진 마리오네트. 드래건들은 그것을 이용해 가장
무감정한 상태의 인간 선우 헌의 정신 세계를 알고자 한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대한 관찰 자료를 이용해 인간의 정신에만 간섭하는 무기를, 그들은 만들어내었다.
인간이 이 대륙을, 젤리아드를 파멸로 이끌어 가고 있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들 인간들은 멍청하게도 다섯 번이나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마제들을
불러내었으며, 그 사이 기간들에는 끝없이 전쟁을 했다.
이 상태로 계속 나가다 보면 다른 종족들까지 멸망할 것은 분명하다…!
드래건들이 그렇게 결론을 내린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확실히 그 때문에 희생된 헌이란 소년에겐 안된 일인걸….
레일리스는 쓰게 웃다가 흠칫 놀랐다. 그러나 이내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내가 그를 걱정하고 있는건가?'
아니다. 레일리스는 힘있게 부정했다.
자신은 남자의 정기를 빨아먹고 사는 서큐부스, 벌써 그런 식으로 살아온 지는
삼백년이 넘었다. 그런 자신이 한낱 '남자'에 불과한 그를 신경쓸 이유가 없다.
'그래, 난 서큐부스의 일족, 레일리스다.'
그렇게 인정하고 나니 마음가닥이 잡혔다. 레일리스는 살짝 몸을 굽혀 달을
쳐다보며 남자의 냄새를 맡아보았다.
내가 너에게 진 빚은 갚지 못했지만, 인형을 갖고 계속 놀고 싶지는 않아.
그 도플 갱어 녀석덕분에 참 주도면밀하게도 망가뜨려져 버렸군.
그녀는 마지막으로 헌의 초점 없는 눈동자를 쳐다본 후, 한층 더 깊은
어둠 속으로 발을 내딛었다.
'달의 향기는 무릇 어둠의 족속들에 있어 최대의 만찬이다.'
그에게서 벗어나는 레일리스의 머릿속에 서큐부스들 사이에서 전해지는 잠언
하나가 떠올랐다.
레일리스는 예전의 그 고혹스런 미소를 다시 지어냈다.
'달의 향기는 무릇 어둠의 족속들에 있어….'
※ ※ ※
헌의 눈이 갑작스레 떠졌다. 그의 몸은 희열로 인해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시리아스의 슬픈 눈동자가 그를 붙잡으려 했지만, 헌은 말을 듣지 않았다.
그의 신경은 온통 다른 곳을 향해 곤두서 있었다.
문득 그의 입에서 새어나온 이름에, 알리스는 놀라 시리아스를 쳐다보았다.
뭐라고?
"카프린…."
카프린? 그가 어떻게 나타났다는 거지? 그는 이미 예전에 죽었다고….
알리스는 흠칫 몸을 떨며 천천히 시리아스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붉은 눈동자는 긍정을 표시하고 있었다.
그래, 소울 페어니까…실체가 없는 존재였긴 하지만, 그런 존재와
소울 페어였으니 그것의 기척을 알아채는 거로군. 잠깐…그렇다면?!!!
알리스는 갑작스럽게 자신의 머릿속을 스쳐가는 생각으로 인해 몸이 굳어버렸다.
그리고 천천히 마음을 가다듬으며 헌의 시선이 향하고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예전에 그 자신의 손에 의해 죽어버린 소녀와 대치하고 있는 마오의
모습이 있었다.
도플 갱어는…그래, 도플 갱어는 자신들이 잘 아는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서,
그렇게 해서…자신들 인간들이 내놓는 번민과 공포를 먹고 산다….
알리스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던 생각은 바로 그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제일 즐겨하는 것은….
"어떤 일행에 끼어들어 한 사람을 죽인 후, 그 사람의 대행을 하며 나머지
일행들을 혼란에 빠지게 하는 거라지…아마도……."
알리스는 허리춤에 찬 닻에 손을 가져가며, 마오 앞에 서서 예전의 알라우네를
연상케 하는 미소를 떠올리고 있는 소녀…아니, 소녀의 모습을 한 도플 갱어를
노려보았다.
잠시간의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마침내 마오의 망치가 움직였다.
그의 백이십 근 나가는 망치의 추가 소녀의 머리에 닿을 무렵,
알리스는 또 하나 도플 갱어에 대한 얘기를 떠올리고는 다급히 마오에게 외쳤다.
"안돼-! 마오, 실체를 공격해선 안돼-! 그것은…."
퍼억-! 알리스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소녀의 머리엔 이미 마오가 있는 힙을
다해 휘둘렀을 망치가 닿아있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마오의 머리통은 산산이
부서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