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만에 뵙습니다. 일단 새로운 작품들고 돌아왔는데, 아청법의 영향인지 친하게 지냈던 동료 작가님들이 안보이시네요. 무엇보다 바보만세님과 와핑돌이님.
사실 저도 문제가 될 소지가 있는 작품들을 부랴부랴 지우긴 했습니다. 대비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요.
지금 글을 올리는 것도 사실 조금 두렵긴 하네요. 야설을 기고하는것 자체가 문제가 되려나요?
다른 작가님들도 그러시겠지만, 전 정말 글 쓰는거 자체가 좋을 뿐이거든요.
암튼, 다시 돌아와서 인사드릴 수 있어 기쁘네요.
그나저나 바보만세님껜 연락을 드리려고 했더니 돌연 탈퇴를 하셔서;;;
도... 돌아와요 이 양반아 ㅜ.ㅜ
“이 곳이 제 작업실입니다.”
한무영이 끌고 들어온 곳은 별다를게 없어 보이는 사진관 촬영실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다만, 이 스튜디오에 들어오면서부터 꽤나 인테리어가 좋아 보인다는 느낌은 있었다. 촬영실 역시 깔끔한 느낌이 가득했다.
“알고 계시는 사진관 작업실과 사실 별다를게 없죠? 하지만, 작가들의 성향이나 특성에 따라서 미묘하게 분위기가 다르답니다.”
그냥 그러려니 했다. 어차피 아내나 나나 이 쪽 분야엔 문외한이나 다름없었다. 사진이래봐야 어쩌다가 찍는 3센치짜리 반명함판이 고작인 나에게, 사진이니 예술이니 하는 것 따위가 귀에 들어올리 없었다.
“오.. 예린씨 잠깐 거기 서 보세요.”
사진기를 만지작 거리고 있던 한무영이 대뜸 나의 와이프 이름을 불러대는 통에, 아내와 나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하늘하늘한 스커트 자락을 매만지고 있던 와이프가 당황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평소에 보기 힘든 표정인데.
솔직히 나도 조금 당황해서 머리를 긁적이며 한무영을 바라봤다. 그런데 한무영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사진기 파인더 너머로 연신 와이프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애써 태연한 척 웃어보이며 와이프에게 슬쩍 눈치를 줬다.
“확실히 비율이 좋으시네요.”
-네?
“모델로써의 비율이나 가능성이요.”
비율이라는 말에 화들짝 놀란 내가 한무영을 쏘아붙였다. 모델로써의 비율이라.
“예린씨. 거기에서 쭈뼛거리고 서 계시지 말고 잠깐 조명이 들어오는 곳으로 다가가 서 보세요”
한무영은 조금 흥분한 듯 와이프에게 무언가를 조금씩 요구하고 나섰다. 녀석의 ‘예린씨’라는 말투가 어딘지 듣기 거북했던 것이 사실이었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애써 태연하게 와이프에게 또 눈치를 줬다. 어색하게 발걸음을 옮긴 아내가 조명이 잔득 내리운 곳에 걸어가 뻣뻣하게 섰다. 찰칵 거리는 카메라 셔터소리가 어둠이 내려앉은 작업실에 차갑게 울려 퍼졌다.
한동안 옆에서 아내와 한무영을 바라보던 나는, 작업실 여기저기를 훔쳐보기 시작했다. 좁다면 좁고 또 넓다면 넓은 공간이다. 나는 연신 시끄럽게 울려퍼지는 셔터소리가 귀에 거슬려서 어슬렁 어슬렁 거리며 작업실 이곳 저곳을 걸어다녔다.
‘이 문은 뭐지?’
조심스럽게 작업실을 걸어다니는데, 작업실 한 켠에 반쯤 열려있는 조그마한 문이 눈에 들어왔다. 괜한 –혹은 쓸데없는- 호기심에 문 앞에 다가가서 섰을 때였다.
“아, 거기는 제 비밀 작업실입니다. 하하”
어느샌가 한무영이 ‘셔터질‘을 멈추고는 다가와 내 앞을 가로막았다. 흠칫 놀란 내가 뒷걸음질 치며 한무영을 바라봤다. 어쩐지 조금 당황한 기색이 역력해 보였다. 슬쩍 와이프를 보니 한쪽 팔에 나머지 팔을 가져다 댄 채로 나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머쓱해진 내가 와이프 쪽으로 다가가니 한무영이 그제야 그만 내려가자는 말을 했다. 한무영을 따라 다시 1층으로 내려가면서도 나는 슬쩍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비밀 작업실‘의 문을 훔쳐봤다.
“그럼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1층에 내려오자마자 한무영이 나에게 대답을 강요했다. 자리에 선 채로 와이프를 바라보며 눈치를 살폈다. 고개를 숙인 아내에게서 생각을 읽는건 도무지 불가능한 일처럼 보였다.
“솔직히 저는 예린씨가 모델이 되어주셨으면 합니다. 아까 2층에서 잠깐 사진을 찍어봤는데, 모델로써 너무 마음에 들어서.”
뜨뜨미지근한 나와 아내의 반응이 마음에 걸렸는지 한무영이 조용한 목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하지만 어쩐지 그 목소리에서 미세한 떨림이 전해졌다. 그리고 나와 눈이 마주친 한무영의 표정은 마치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지 않나?’ 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아내나 저나 이런일은 처음이라, 당신 생각은 어때?”
나는 비겁하게도 아내에게 결정을 떠넘겼다. 그러면서도 임곽수와 깍두기들의 얼굴과, 내가 갚아야 하는 2천만원이라는 돈이 눈앞에 둥둥 떠다니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솔직히 조금 마음이 놓이는 것도 사실이었다. 걱정과는 달리 정작 한무영이라는 작자를 대면하고 나서는 말하기 어려운 신뢰감이 생겨 버렸다. 고개를 숙인 와이프를 얼마간 바라보고 있는데 역시나 무표정해 보이는 와이프가 겨우 고개를 들고는 나와 한무영을 번갈아가며 쳐다봤다. 그 표정에선 알게 모르게 어떤 ‘결심’이 느껴졌다.
“궁금한게 하나 있는데.”
-네 말씀하세요.
“사진을 찍게 되면, 그 사진이 이 사진관에 걸린다거나 혹은 외부에 공개되기도 하는건가요?”
-아니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제가 예린씨를 모델로 사진을 찍는건 출품이나 다른 목적이 있는게 아닙니다. 다분히 제 사진 연습에 있거든요. 게다가 사실 여긴 사진관이라고 하기도 그래요. 그냥 제 작업실 쯤 되는 곳이죠. 그런게 걱정되시는 건가요?
한무영은 조금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와이프를 바라봤다. 아내는 금새 표정이 어두워 지는가 싶더니 다시 고개를 숙여버렸다.
‘하긴, 그러고보니....’
불현 듯 어떤 생각이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왔다. 지금의 나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미안하다는 말을 남기고 이 사진관을 빠져 나가야 할까? 일단 나는 묵묵히 아내를 바라봤다.
“..... 재밌을 것 같아요.”
한참을 기다린 후 아내의 입에서 의외의 한마디가 흘러 나왔다. 재미있을 것 같다. 나는 생각지도 못한 아내의 한 마디를 머릿속으로 곱씹어 보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입술 주변이 파르르 떨리고 있는 한무영의 표정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다행이네요. 혹시나 거절하시면 어쩔까 걱정했는데.”
설마. 임곽수와 미리 입을 맞췄다면, 뱉어낼 수 없는 말일거다. 혹시라도 아내가 방금전에 못하겠다는 말을 했다면 사정은 조금 달라졌을 수도 있겠지만.
“잠깐 앉으시겠어요? 평일엔 어차피 시간이 없으시겠지만, 저도 이런저런 일 때문에 시간 내기가 힘들 것 같습니다. 천사 주말에나 시간이 생길 것 같은데. 주말 내내 나오시는건 아무래도 힘드시겠죠?”
-네 뭐.
아내의 허락이 떨어지자 모든 일이 속전 속결로 진행되었다. 한무영은 무엇이 그리도 신이 났는지 나와 아내에게 –그마저도 아내쪽에 대한 비중이 더 커보였지만- 이런 저런 이야기를 쏟아냈다.
“그럼 매주 토요일이나 일요일에 한 번씩 나오시는 걸로 하고, 모델비는 회(回) 당 300만원.....”
-300만원이요??
맙소사. 노골적으로 돈에 탄력적인 반응을 보였다. 놀란 토끼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한무영 때문에 조금 무안해졌다. 괜한 헛기침을 한 번 하고 옆에 있는 아내의 눈치를 살폈다. 아닌게 아니라 아내역시 생각지도 못한 거액에 내심 놀란 눈치였다. 사실이 그랬다. 전문 모델도 아닌 아내가 모델로써 회당 300만원이나 하는 거액을 받는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적으신가요?”
-네?
그럴 리가 있나. 하지만 한무영의 그 말투엔 마치 무언가 ‘무시하는’ 느낌이 잔득 서려 있었다.
“페이를 얼마를 드려야 할지 고민했습니다. 6,7회정도 촬영하는 걸로 하고 회당 300만원씩이면 괜찮으실는지?”
-아 뭐.
6,7회에 300만원이라. 그러면 얼추 2000만원 남짓한 돈이 들어온다. 2000만원이라. 이제야 계산이 선다. 모르긴 몰라도 임곽수랑 모종의 커넥션이 있었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금액에 대해선 조금 이해가 갔다.
“그래도 300만원이라니, 제 쪽에선 조금 부담스러운데요.”
아뿔싸. 아내가 난데없이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고 나섰다. 뭐, 내 입장에선 여전히 할 말 없는게 사실이지만, 조금 굳어버린 한무영의 표정을 보아하니 어쩐지 조금 불안해졌다.
“제가 전문적인 모델도 아니고, 말씀하신것처럼 단순히 연습이 목적이시라면 더더욱 300만원이라는 거금을 들이면서까지...”
-부담가시나요?
“예. 솔직히 조금은요.”
-예린씨는 모델로써 가능성이 있으세요.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아까 작업실에서 파인더 너머로 예린씨를 봤을 때 솔직히 놀랄 정도였거든요. 처음이라 어색한 걸 감안하고서라도. 저도 목적은 단순한 연습이지만, 어디까지나 이건 하나의 과정이거든요. 프로모델을 쓰지 않는 이유도 사실 거기에 있구요. 부담감 같은거 갖지 마세요.
한무영이 나의 아내를 연신 ‘예린씨’라고 부르는 데에는 어쩐지 더 이상 신경이 쓰이질 않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300만원이라는 생각지도 못한 거금에 정신이 팔려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보다 내 와이프가 이렇게 말을 잘했었나?
“그런데 예린씨는 올해 나이가...?”
-네?
“아. 와이프는 서른넷이고, 저는 서른 아홉입니다.”
-와, 생각보다 상당히 어려보이시네요? 허투루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20대인줄 알았어요.
와이프가 어려보이는건 사실 맞는 말이긴 하지만, 이렇게 대놓고 하는 칭찬에 괜히 내가 몸둘 바를 모르겠다.
“저 근데. 저도 궁금한게 하나 있는데.”
-네.
“수위가... 얼마나 될려나.”
-네?
마땅한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기껏 머릿속에서 흘러나온 단어가 고작 저 따위였다. 아닌게 아니라 솔직히 내심 걱정이 된 것이, 모델비로 회당 300만원이나 받는데 사진작가라는 한무영이 원하는 수위가 어느정도일지 도통 감이 오질 않았기 때문이다.
“수위라 하심은...”
-..........
나는 내 자신이 한심해서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한무영이 그런 나를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쥐구멍이 있었으면 좋겠다.
“선생님께서 뭘..... 생각하시는지 모르겠네요..”
-.............
“괜히 제가 부끄러워지네요. 하하”
나는 아무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럼, 모델 해 주시는거죠?”
한무영이 끝내 자신이 듣길 원하는 대답을 요구하는 표정으로 아내를 바라봤다. 그리고 나도 아내를 슬쩍 바라봤다. 아내의 두 눈에 걸린 초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네.”
와이프의 입에서 새어나온 한마디에 한무영과 나는 비슷한 듯, 하지만 조금 달라 보이는 ‘한숨’을 지어 내쉬었다.
“그럼, 오늘은 이왕 오셨으니, 간단하게 몇 장 찍어봐도 될까요?”
-네? 사진이라면 아까.
“아, 그건 잠깐 파인더로 인물구도만 확인한 거라서. 한 30분 정도만 할애해 주시면 감사할 것 같은데. 이를테면 프로필 촬영 같은 느낌으로.”
-혹시 이것도 ‘페이’에 들어가는건가요?
노골적으로 한무영에게 돈 얘기를 해 버렸다. 이번엔 와이프도 조금 당황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아마도 괜한 이야기를 꺼낸 느낌이다.
“아. 비용은 다음주부터 계산하려고 했는데, 뭐 원하시면...”
-아.. 아닙니다. 당신은 괜찮겠어?
모르긴 몰라도 한무영의 잿빛이 금새 구겨진 느낌이 들었다. 나는 서둘러 한무영의 말을 받았다.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 필요는 없겠지.
“30분 정도라면.. 저야 뭐..”
-네. 감사합니다. 그럼 예린씨. 이 쪽으로.
“저, 저도...”
-아. 선생님도 같이 가시게요?
그러니까 아까서부터 나를 꼬박꼬박 선생님이라고 불러대는 –아내와는 너무나 대조적으로- 통에 조금 신경이 쓰였다. 기껏해야 서른아홉밖에 먹지 않았건만 선생님이라니. 하지만 어찌되었든, 한무영의 그 말은 마치 ‘너는 오지 않아도 될텐데’ 라는 말처럼 들렸다. 고민할 이유가 있을까? 이쯤되면 눈치껏 빠져줘야지.
“그럼, 전 여기서 기다리면 될까요?”
-네. 잠시만. 하하. 오래 안걸릴테니까요. 한 30분정도? 기본적인 표정이나 구도만 확인할 거니까요. 어차피 손님도 없으니까 맘 편안히 계셔도 좋으실 겁니다. 커피라도 한 잔 더 드릴까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애써 태연한척 웃어보였다. 한무영은 아내에게 손짓을 해 보이며 다시 2층으로 올라갔다. 아내는 조금 망설이는가 싶더니 한무영을 따라갔다. 그러면서 아내가 슬쩍 나를 쳐다봤다. 아내와 눈이 마주쳤을 때 나는 멍하니 아내의 얼굴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아내와 한무영이 2층 작업실로 올라가고 나서 나는 텅빈 스튜디오 안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여느 사진관이 그러하겠지만 건물 안 여기저기에 붙어있는 액자 사진들이 눈에 들어왔다. 산도 있고 바다도 있으며 이름 모를 가족들의 사진들도 눈에 들어왔다. 슬쩍 자리를 옮기며 사진들을 바라보는데, 방금전 아내의 얼굴이 떠올라 자리에 멈춰서 생각에 잠기고 말았다.
‘웃는 얼굴인가?’
아내, 그러니까 예린이가 나에게 웃는 얼굴을 보여준 건 정말이지 오랜만이었다. 3년전에 집 앞에서 처음 만났던 와이프. 몸을 웅크리고 있는 와이프의 어깨를 슬쩍 밀었을때, 와이프는 거짓말처럼 내 가슴에 쓰러졌다. 아직도 그날 밤을 생생히 기억한다. 머리는 푸석푸석했으며 얼굴색은 핏기없이 창백하게 보였다. 예쁘지만 초점을 잃어버린 두 눈을 타고 형언할 수 없는 묘한 슬픔이 전해져 왔다. 그것이 지금의 아내에 대한 나의 첫인상이었다.
“미안합니다.”
아내가 내게 처음으로 건낸 말을, 텅빈 사진관 안에 토해냈다. 괜찮냐는 나의 물음에 와이프가 내게 건낸 말은 고작 미안하다는 말, 그 한 마디가 전부였다. 그 땐 왜 그랬을까? 아니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을까? 도무지 모르겠지만, 30년 넘게 여자라곤 모르고 지내오던 내가 와이프의 손을 잡았었다. 그냥 잘은 모르겠지만, 그땐 그냥 그렇게 와이프를 보내면 안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었다.
그 날 이후였나? 가족이라곤 없는 내가, 그러니까 내 삶에 조금씩 변화가 생겼다. 어디서 나타났는지도, 이름이 무엇인지도 모를 여자 하나 때문에. 사람 사이엔 말 못할 것들이 많다고 생각한다. 말 못할 이끌림, 이유없는 충동. 내가 난생처음 여자를 집안으로 들인 그 순간에도 왜 인지 모를 알싸한 이끌림이 있었다. 처음 느껴보는 그런 느낌.
아내는 모든 일에 소극적이었으며 쉽게 경계를 풀지 않았다. 말하기 힘들지만, 사람을 믿지 못하는 느낌이 강했다. ‘서예린’이라는 자신의 이름 석자를 내게 말하기까지 정말 오랜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재미있는건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는 동안, 나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결코 조금도 힘들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재미없고 무료한 생활 속에서 무언가 그동안 내가 잊고 지냈던 것들을 겨우 찾아낸 느낌?
자랑은 아니지만, 무언가에 쫓기는 듯한, 그리고 감추려는 듯한 지금의 와이프를 정성을 다해 보살피고 또 사랑했다. 도박에 미쳐 지내던 내가 순식간에 변한 것도 어쩌면 그 때문이리라. -결국 다시 빌어먹을 도박 때문에 이 짓을 하게 되었지만.-
아내에게 처음으로 사랑한다는 내 속내를 전한게 불과 2년전의 일이다. 난생처음 해보는 사랑 고백에 정말 떨렸던 기억 뿐이다. 하지만 아내는 너무나 잔인하게도 나의 마음을 단칼에 거절해 버렸다. 자신은 사랑할,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여자라며. 나에겐 별다른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이 사람에게 어떤 과거가 있는지, 혹은 상처가 있는지. 나는 그냥 이 여자와 함께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 하나 뿐이었다.
결국 우린 ‘비공식‘적으로 부부가 됐다. 혼인신고도 하지 않았고, 결혼식은 당연히 올리지 않았다. 그저 벌써 3년째 내 집에서 두 식구가 조촐히 살아갈 뿐이다. 하지만 난 만족한다. 3년이라는 시간동안 ’와이프‘ 역시 변했으며, 바보같은 말일지 모르지만 그 변화는 나의 노력과 사랑에 대한 –어쩌면- 충분한 보상이나 댓가라고 생각한다.
[바람 불어와~~~ 내 몸이 날려~~]
얄궂은 생각에 잠시 잠겨있을 때, 전화벨이 시끄럽게 울렸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주섬주섬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확인 전화인가?’
휴대폰 액정에 뜬 임곽수라는 이름 세 글자가 거짓말처럼 기분을 잡치게 만들었다. 나는 헛기침을 한번 하고는 전화기를 귀에 가져다 댔다.
“어떻게 되었나?”
임곽수는 다짜고짜 내게 질문을 해댔다. 뭐 자신의 돈이 걸린 문제니까.
“지금 아이라인 스튜디옵니다. 와이프는 한무영씨랑 잠깐 촬영하러 들어갔구요.”
-오~!! 그 말은?!
“회당 300만원씩 7회분량을 찍는답니다. 그러니까...”
-아. 오케이 오케이. 알겠어요! 잘 됐구먼. 그럼 촬영이 끝날 때까지, 상환 기관을 연장해 줌세.
“네?”
-그럼 끊습니다!!
어라? 이놈이 왜 이렇게 관대하게 나서는거지? 모르긴 몰라도 역시나 임곽수 놈과 한무영이라는 작자가 사전에 미리 말을 맞춰놓은게 틀림에 없다. 그런 생각에 아까 나를 대하는 한무영의 태도가 떠올라 조금 몸서리가 쳐 졌다. 대체 어떤 놈일까?
“그럼, 다음주 토요일에 뵙는걸로 하지요. 오늘은 너무 고생하셨구요.”
2층에서 촬영을 마치고 내려온 한무영이 나와 아내를 보며 말했다. 그런데 기분탓인지는 모르겠지만 고개를 숙이고 있는 아내의 두 볼이 약간 붉게 물들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왜 이러지?’
내가 와이프에게 다가서자 한무영이 우리 부부쪽으로 다가와 말했다.
“아. 회당 촬영 시간은 12시간~ 14시간 정도로 잡고 있습니다.”
-네?
내가 놀라서 물었다. 12시간~ 14시간이라면, 자는 시간을 빼고 하루 종일이라고 해도 좋을만한 시간이 아닌가?
“네. 사실 1주일 분량을 하루에 몰아서 찍으려고 해서. 물론 식사는 제공할 거구요.”
-아. 그..
“어. 전 당연히 그렇게 하는게 맞다고 생각했는데..”
한무영이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빌어먹을. 회당 300만원이라더니. 결국 이정도는 감수해야 한단 말인가? 나는 아내가 신경이 쓰여 다시 아내의 표정을 살폈다. 계속 고개를 숙이고 있던 아내가 머리를 한번 쓸어 올리더니 나와 한무영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무영이 아내를 지그시 바로보며 씨익 웃어 보이는게 조금 기분이 나빴다.
한무영에게 형식적인 인사를 건내고 아내와 함께 스튜디오를 빠져 나왔다. 연식이 오래된 구형 아반떼에 올라타서 시동을 걸었다. 맘같아선 차라도 팔아보고 싶었지만, 이 놈 상태를 보아하니 이자돈도 안나오겠다 싶었다.
보조석에 앉은 아내의 안전벨트를 손수 챙겨주었다. 아내가 슬쩍 웃어보였다. 괜히 설레여서 와이프의 얼굴을 외면했다. 시동을 걸고 천천히 악셀을 밟았다.
정리를 하자면 임곽수와 한무영은 이미 모종의 커넥션을 마친 것 같았다. 그리고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이 부분이 조금 찝찝하긴 했지만- 한무영은 아내를 모델로 하는 댓가로 회당 300만원이라는 거금의 돈을 지불하기로 했다. 총 7회 정도 촬영을 하게되면 나는 그 돈을 사채업자인 임곽수에게 갚으면 된다. 결국 한무영이 임곽수에게 나대신 돈을 지급하는 꼴이다.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임곽수의 갑자기 변해버린 태도와, 유부녀를 모델로 하는 댓가로 고액의 돈을 주겠다고 나서는 한무영의 태도였다.
‘하. 별일 없겠지?’
운전대를 잡다가 슬쩍 보조석으로 고개를 돌렸다. 한동안 기척이 없길래 잠든 줄 알았던 아내가 자동차 창문 유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괜히 신경이 쓰인다. 아까 나를 두고 올라간 작업실에서 혹시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닐까? 나는 입을 열려다 그만두기로 하고 다시 앞을 보고 운전을 계속했다.
야속하게 1주일이라는 시간이 지나가고 있었다. 혹시 아내의 생각이 변한다거나 아니면 정말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진 않을까 하는 마음에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를 시간이었다. 회사에서는 이미 한 차례의 후폭풍이 거세게 지나간 덕분에 상사며 동료며 할 것 없이 눈치가 보여 아주 죽을 지경이었다. 이런 조직에서 쓸데없는 소문이 돌았다간 궁극적으로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 나는 단적으로 체감할 수 있었다.
어찌되었든 토요일이 돌아왔고, 아내와 나는 아침부터 정신없이 외출 준비를 서둘렀다. 한무영이 9시까지 오면 좋겠다고 말을 한 터라 나는 나대로, 그리고 와이프는 와이프대로 잠을 설쳤다. 혼자가도 된다는 아내의 말을 애써 무시하고 구형 아반테에 올라타 먼저 시동을 걸었다. 모르긴 몰라도 아직까지는 한무영이라는 인간을 완벽히 신뢰할 순 없다. 임곽수라는 놈과 무언가가 있는 이상에야.
“아. 같이 오셨어요?”
아이라인 스튜디오에 들어섰을 때, 나와 와이프를 보며 한무영이 말했다. 속이 빌빌 꼬인 나는 한무영의 그 말이 마치 ‘너는 쓸데없이 왜 왔냐?’ 하는 투로 들렸다.
“네. 그러면 안되나요?”
괜한 오기일까, 객기일까. 나도 모르게 조금은 퉁명스럽게 한무영을 쏘아붙였다. 하지만 한무영은 별로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살짝 웃어보이며 손사레를 치며 말했다.
“아니요. 그럴리가요. 그런데 하루종일 촬영해야 하는데, 선생님은 기다리시기 무료하실텐데요.”
-괜찮습니다. 그나저나 이따가 점심이나 저녁 식사할 때에는 와이프하고 따로 시간을 가져도 괜찮겠지요?
“아. 뭐. 식사는 따로 준비합니다만, 그게 편하시면.....”
말꼬리를 흘리는 한무영이 아내를 바라봤다. 그건 마치 대답은 당신이 하면 좋겠다라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와이프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나를 바라봤다. 한무영의 미간에 어쩐지 조금 주름이 새겨지는 것 같았다.
“그럼 예린씨. 이쪽으로 오시겠어요?”
한무영이 와이프에게 말하며 저번처럼 2층으로 올라갔다. 나는 안중에도 없는 그의 태도에 조금 당황했지만, 이젠 별 수 없겠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 스튜디오에 남아있기도 뭐해서 나는 그대로 밖으로 빠져나와 주차해 놓은 차 쪽으로 걸어갔다.
아내가 다시 스튜디오에서 빠져 나온건 정확히 세 시간쯤 지났을 무렵이었다. 아무일도 하지 않고 시간을 떼우는 일이 이렇게 힘겨운 일인지 나는 오늘에야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애꿎은 디엠비를 켰다가, 또 전화기를 매만졌다가. 스튜디오를 빠져나오는 아내가 그토록 반가울수가 없었다. 그런데, 뭔가 좀 이상하다?
“어, 당신. 옷이...”
-아. 이걸로 갈아입으라고 해서요.
아내도 내심 옷이 신경쓰였는지, 나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을 연신 만지작 거렸다. 분명 아침에 나올 때에는 예전에 ‘내가 사준’ 청바지에 분홍색 티셔츠였는데, 지금 와이프가 몸 위에 걸치고 있는 건 알록달록한 원피스에 검정색 스타킹 차림이다.
“탈의실이 있었어?”
-아. 네.
“저번에 왔을 때는 못 봤는데.”
-있더라구요.
정말이다. 저번주에 작업실에 올라갔을 땐, 탈의실은커녕 별다른 공간은 보이지 않았는데. 아. 한무영이 말한 ‘비밀 작업실’을 제외하곤.
“밥... 밥먹으러 가자.”
-네.
조금 지쳐보이는건지 어떤건지 모를 아내의 표정을 살피며 나는 아내와 함께 근처 식당으로 밥을 먹으러 갔다.
간단하게 밥을 먹고 나서 와이프는 다시 스튜디오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낯 선 원피스와 구두 차림이 여간 낯선게 아니었지만, 어쨌든 지금으로썬 별 도리가 없다.
오전 세 시간은 어떻게 견뎌봤지만, 저녁 식사까지 기다리는 여섯시간은 정말 죽을맛이었다. 차를 몰고 주변이라도 배회하다가 올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괜히 불안해서 자리만 지키고 스튜디오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재미있는 건, 스튜디오가 꽤나 후미진 곳에 위치하고 있는데다가 정말이지 하루종일 스튜디오에 발을 들이는 사람이 한명도 없다는 점이었다.
내가 스튜디오에 발을 들인 건, 5시 정도 되는 시간이었다. 그건 어떤 불안함 보다는 밀려오는 요의를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 선생님 아직 안가셨네요?”
-아. 네.
스튜디오 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2층에서 사진기를 들고 내려오는 한무영과 마주치고 말았다. 타이밍이 꽤나 절묘해서, 한무영이 마치 나를 기다리고 있던건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저기 죄송한데, 화장실 좀.”
-아 예. 저기 2층 옆에 화장실 있어요.
“고맙습니다.”
-별 말씀을.
나와는 대조적으로 한무영이 나를 보며 찡긋 웃어보였다. 저번주와는 다르게 어쩐지 조금 기분이 나쁜 느낌의 웃음이었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2층 화장실로 걸어갔다.
“후우. 이제 조금 살겠네.”
좁은 화장실에서 소변을 보고 나서 나는 세면대로 다가가 손을 씻었다.
겨우 볼 일을 보고 나서야, 아내 생각과 함께 아까 마주친 한무영의 얼굴이 떠올라 순간 멈칫하게 되었다.
‘하아. 내가 너무 쓸데없이 과민하게 생각하는건가?’
괜한 생각이 들어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 봤다. 거울속에 비친 내 얼굴이 아주 가관이었다. 애써 무시하며 손에 물기를 제거하려 휴지를 찾는데, 세면대 옆에 휴지가 없어서 비어있는 화장실 칸을 열었다.
“왠 구식.. 변기람..”
시대에 맞지 않는 변기를 보고 나도 모르게 너털 웃음을 지어 보였다. 대롱대롱 걸려있는 두루마리 휴지에 손을 뻗어 두세 칸 정도를 뜯어내 손을 닦아 냈다. 그리고 몸을 돌리려는데 구석에 있는 휴지통에 처박혀있는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슬쩍 몸을 틀어 휴지통 가까이 다가갔다.
“이... 이게...”
멈칫 멈칫 하다가 얼굴이 조금 붉어진 나는, 기어이 휴지통 속에 들어있는 그것을 슬쩍 올려들었다. 그리곤 나는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화장실 휴지통에 덩그러니 버려져 있는 여자 스타킹이라니. 그것도 검은색.
“이게.. 지금...”
나는 제대로 된 연산이 되질 않았다. 하지만 내가 놀랄 일은 -어쩌면 불행히도- 그것만이 아니었다.
‘제기랄.. 이.. 이게..’
정확히 - 그러니까 어떤이의 표현을 빌리자면- 스타킹 팁토 부분에 묻어있는 걸죽한 액체를 보고,
나는 손에 들린 스타킹을 반사적으로 휴지통에 던져 버릴 수밖에 없었다. 화장실, 휴지통, 여자 스타킹,
그리고 거기에 묻어있는 남자의 정액. 이 네 가지에서 나는 어떤 공통점을 찾아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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