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여는 굽신굽신!!!!
좋은 하루 되시고!!!!
“아 이거 미안하게 됐습니다. 처음보는 형씨”
-아... 이.. 이....
이상하다. 이.. 이상하다. 내가 생각한 시나리오는 이게 아닌데... 머리를 쥐어뜯고 손톱을 입에 물고 질겅질겅 씹어댈 때에는 이미 모든게 뒤엉켜버린 후였다. 이상하다.. 이상하다.. 이.. 이럴 리가 없는데. 이러면 안되는데.
“그럼, 다들 피곤해 보이니 오늘은 이만 판을 접도록..”
-아.. 안돼!!!
나는 방안에 앉아 절규했다. 불과 몇 시간만에 나에게 벌어져서는 안 될 일이 벌어져 버렸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꼴사납게도 두 손 가득 카드를 움켜쥐곤 오늘 처음 본 사내들이 이 방을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바지자락을 부여잡는 일 뿐이었다. 하지만 끝내 사내들은 하나 둘 방을 빠져 나갔다.
병신같이 두 볼을 타고 눈물이 흘렀다. 사람이 이성의 끈을 놓아버리는 건 정말 한 순간이구나. 지금에 와서 그런 생각을 해 본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나는 바닥에 꿇어앉아 정신없이 눈물을 쏟아냈다.
처음은 예상대로 진행됐다. 창용이가 주고 간 육백만원 덕분에 부담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그게 어쩌면 화근이었다. 일부러 져 주고, 그러면서 판돈을 올렸다. 내가 운 좋게 따는 것처럼 보이게 하면서. 그리고 나는 어느 순간 창용이가 주고간 6백만원의 3배 정도를 불릴 수 있었다. 거기서 멈췄어야 했다. 정말 나는 거기서 멈췄어야 했다. 하지만, 정말 그게 죽는 것 보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왜 나는 집에서 들고 나온 가방속에, 아내가 그동안 벌어다 준 하얀 봉투 다섯 개를 넣어가지고 왔던 걸까? 무엇이 불안했을까? 이제 나에게 남은 거라곤 손에 들린 카드가 전부였다. 나에겐 창용이가 준 6백만원도, 그리고 아내가 벌어다 준 천 오백만원도, 아무것도 없다.
정신을 차리고 맨션 밖을 빠져 나왔다. 그제야 시간을 확인할 수 있었고, 아내로부터 몇 통의 전화가 걸려왔었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새벽 두시.’
그렇게나 오래 앉아있었던 건가? 다시 두 볼을 타고 멈췄던 눈물이 주르륵 흘러 내렸다.
“이 병신!!! 이 병신새끼야!!!! 그 빌어먹을 도박 때문에 아내까지 팔았으면, 정신차려야지!!! 이 병신새끼야!!!!!”
나는 운전대를 붙잡고 다시 한번 절규했지만, 그런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무것도 없었다.
집근처에 차를 대고 비틀거리며 새벽 3시쯤 집으로 들어갔다. 당연히 자고 있을거라 생각했던 와이프가 현관에 나와 있었고, 나는 한동안 멍하니 와이프 얼굴을 바라봤다. 조금 피곤해 보이긴 했지만,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의 와이프는 나를 부축하며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왜 늦었느냐?”
-......
“어디에서 있었느냐?”
-......
“그런말... 그런말.... 그런말 정도는....”
술에 취한것도 아닌데, 아내의 팔에 매달려서는 횡설수설 하며 방으로 들어갔다. 애꿎은 아내에게 지랄이라니. 난 정말 꼴사나운 놈이다. 와이프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는가 싶더니 조용히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가버렸다.
괜한 억울함에 한숨도 자지 못했다. 침대에서 억지로 일어난건 일요일 아침 여덟시 쯤이었다. 옆에 아내가 없다는 어색함에 슬그머니 방문을 열고 나왔는데, 거실에 가만히 앉아있는 아내를 보고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아내도 인기척을 느꼈는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우리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나는 잘못을 저지른 어린 아이처럼 아내의 앞에 쭈뼛거리며 서 있을 뿐이었다. 그러면서도 곁눈질로 아내의 눈치를 살폈지만, 너무나 덤덤해 보이는 아내의 표정에선 아무것도 읽어낼 수 없었다. 그래서 괜히 불안했다.
“잠깐 얘기좀 해요.”
고맙게도 와이프가 먼저 말을 걸어 줬다. 나는 조금 고민하다가 아내의 옆에 다가가 앉았다.
한동안 말없이 아내의 눈치만 살폈다. 지난 3년간 아내가 먼저 나에게 말을 걸어온 일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무슨 말을 하려는걸까?
“다음주면 일이 끝나요.”
-....... 그렇지.
조금 뜻밖이었다. 나는 내심 간밤에 있었던 일들에 대해서 물어보리라 생각했건만, 아내의 입에서 흘러나온건 자신의 ‘일’에 관한 얘기였다.
“그래서.. 아.. 우선 이거요.”
-어?
아내는 하얀 봉투 하나를 나에게 건냈다. 난 쉽사리 받을 수 없어 그저 멀뚱멀뚱 아내의 손만 바라보고 있었다. 아내는 슬그머니 나의 허벅지 위에 봉투를 내려놓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어제 일 마치고 집에 돌아가려는데, 작가님이 제안을 해서요.”
-제안?
“네. 그게 제가 일하는거. 그거 조금 연장했으면 한다고.”
-연장?
나는 머리나쁜 앵무새처럼 아내의 말을 그대로 따라했다. 제안에 연장이라니. 아내는 숨을 한번 죽이곤 다시 말했다.
“네. 페이는 더 올려주신다는데, 대신 이번엔 평일에도 몇 번씩 나가야 하나봐요. 그리고 페이도 이젠 월 단위로 주시겠다고.”
-페.. 페이가 중요한게 아니라.
나는 와이프의 말을 막아섰다. 이유없이 머리가 지끈거렸다. 하지만 아내의 말에 반박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지난밤에 내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스스로가 잘 알고 있었기에. 그렇다면 남은건 아내의 선택뿐이겠지. 나는 한참을 고민하다 어렵싸리 아내를 바라봤다.
“당신... 당신 생각이나 의사가 중요한거지. 더 하고 싶은지 어떤지..”
-그게.
나는 침을 한번 꿀꺽 삼켜 넘겼다. 차라리 지금 상황에서 간밤에 있었던 일을 하나 둘 실토해 내야 할까? 내가 도박 때문에 당신 돈을 허공속에 날렸노라고? 하지만 도무지 용기가 나질 않았다.
“재미있어요”
아내가 나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나는 조금 당황해서 그냥 아내의 얼굴을 바라볼 뿐이었다. 아내의 덤덤한 표정에서 흘러나온 재미있다는 말은, 내가 그냥 잘 못 들은건 아닐까 싶은 착각마저 불러 일으켰다.
“겨우 적응하기도 했고, 적응하고 나니까 재미있기도 하고. 그리고 페이도 올려주신다 하니...”
-아니 페이 얘기는 하지말고....
“있잖아요.”
와이프가 내 말을 잘랐다. 그리고 내 눈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와이프가 이렇게 나와 많은 양의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꽤나 드문 일이었지만, 내 말을 중간에 자르는 것 역시 전에는 한번도 없던 일이었다.
“3년인가요? 벌써?”
-응.
참 신기한 노릇이다. 주어와 목적어가 빠져버린 완벽하지 않은 말인데, 그게 서로간에 대화가 됐다. 나는 잠자코 아내를 바라봤다.
“3년동안 서로 알고 지내오면서, 어떤 의미에선 항상 받기만 해서 죄송한 마음이 있었어요. 언제나 늘 항상.”
-그건..
“제 얘길 들어보세요. 당신은 참 뭐랄까. 이상하고 달라요.”
아내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에,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움찔 거렸다. 아내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천천히 말을 이었다.
“이런저런 욕심도 없고, 그렇다고 성격이 이중적이거나 어디가 모난것도 아니고. 게다가 지난 3년동안 고작 나한테 이것저것 주기만 했으니. 정말 바보라고 해도 좋지 않을까요? 당신이라는 남자. 왠지... 왠지.... ”
나는 한마디 하려다가 그만두기로 했다. 그리고 조금 당황해서는 그냥 말없이 고개를 숙여 버렸다. 아내의 눈에서 무언가가 보였기 때문이었다.
“3년만에, 이번에야 겨우 내가 당신에게 무언가 해 줄 일이 생겼는데, 그것마저 혹시 반대한다면 난 정말 속상할 것 같아요. 걱정할까봐 다시 말해두자면, 지금 일.. 재미있어요.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결국 질끈 감은 두 눈 사이로 눈물이 흘러나왔다. 빌어먹을. 나는 더 이상 자리를 지키고 앉아있을 자신이 없어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걸어갔다. 그리고 하루종일 나와 아내 사이에 더 이상의 대화는 오고가지 않았다.
다음날 회사에 출근을 했다. 주말에 있었던 일 들 때문에 발걸음이 유독 무겁게 느껴졌다. 3년만에 처음으로 나에게 눈물을 보인 아내의 얼굴과 창용이 녀석의 얼굴. 그리고 얄궂게도 임곽수의 얼굴이 나란히 떠올랐다.
“하아.. 이젠 정말 어떻게 한다!!!”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종국엔 막을 수 없이 크게 부풀어져 버린다. 지금의 내 꼴이 그랬다. 회사에 깍두기 때와 임곽수가 들이닥친 이후에, 회사에 나를 둘러싼 흉흉한 소문들이 돌기 시작했다. 1억이 넘는 사채를 빌려썼다느니, 곧 장기를 팔게 될지도 모른다느니, 하는 의미심장한 소문들이 가득이었다. 덕분에 회사에서 나는 늘 혼자였다.
점심을 혼자 먹고 조금 고민을 하다가, 임곽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왠지 한무영이 아내에게 연장계약을 제안한 사실을 알고 있지 않을까 하는 느낌, 아니 확신이 들었다. 변변한 화술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나는, 전화기를 손에 들고 몇 마디의 ‘대사’를 연습한 후에 임곽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이구, 정일무씨 오랜만입니다.”
-네.. 네.. 그.. 잘 지내셨죠?
생각지도 못한 임곽수의 존댓말에, 나는 놀라서 말을 더듬었다.
“그나저나 무슨 일로?”
-네.. 그.. 그...
나는 말을 더듬을 뿐, 쉽사리 말을 꺼낼 수 없었다. 대충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챘는지 임곽수가 헛기침을 한번 하더니 나에게 말을 걸었다.
“상환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건가?”
-그... 무.. 문제라기 보단.. 그...
“문제라기 보단?”
-기간을 조금만 더 늦춰 주셨으면 하는데요.
나는 침을 삼키고 어렵싸리 말을 뱉었다. 전화기 너머에선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질 않았다.
‘어차피... 어차피.. 너도 내 와이프가 일을 연장하리란 사실은 알고 있잖아?’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리고 얼마가지 않아 전화기 너머에서 임곽수의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상환기간을..... 늦춰... 달라? 당신 언젠가는 나한테 전화해서 호기좋게 금방 갚을 것처럼 얘기하더니.”
녀석의 말이 사실이라, 나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빌어먹을. 괜한 짓을 한 걸까?
“사람이 너무 좋아 보였나? 이것봐요 정일무씨. 당신 나를 아주 개호구로 보나본데...”
-어차피 당신도 내 와이프가 앞으로 모델 일을 계속 하리란건 알고 있잖아?
“뭐?”
-시치미 때지마. 한무영이한테 전해 들었을 것 아니야.
나답지 않게 순간적으로 크게 고함을 내질렀다. 상대방이 당황한건지 어쩐건지 알 길이 없었다. 하지만, 얼마가지 않아 내가 괜한 짓을 벌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깐만 전화 끊어봐.”
-여.. 여보... 여보세요?
임곽수는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반응이다. 미루어 짐작컨대 녀석은 한무영이한테서 아무런 이야기도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빌어먹을. 내가 괜히 쓸데없는 이야기를 꺼낸건 아닐까?
임곽수에게서 다시 전화가 걸려온 건, 한두시간 정도 지나서였다. 어쩐지 아까보다 조금 더 주눅든 목소리로 나는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흠... 일단.. 일단 알았어. 다만 기간이 연장되는 만큼 ...
“불어난 이자는 확실히 갚겠어...”
-참나... 이건 뭐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건지.. 그럼 좋아. 상환 기간은 당신 잘난 와이프가 일을 마무리 짓는 날까지로 연장해 주지. 일단... 일단 끊어. 나중에 다시 연락하도록 하지!!
이번에도 임곽수가 먼저 전화를 끊었다. 당장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이건 뭐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당췌 알 수가 없다.
오후 네시쯤 아내에게 전화가 왔다. 촬영 때문에 잠시 스튜디오에 다녀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어 버렸다. 이거야 원. 오늘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전화를 해서는 하고싶은 말만 남기곤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 어제 아내에게서 추가작업에 관한 일들에 대해 넌지시 전해 들었기 때문에 –평일에도 나갈지 모른다는- 나름 마음의 준비는 해두고 있었지만 당장 월요일부터라니. 괜히 씁쓸해 졌다. 아니 사실, 아내에게 그만두라는 말을 할 수 없는 내 신세 때문에 씁쓸한건지도 모르겠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포장마차에 들러 소주 한잔을 걸쳤다. 전화벨이 울리기에 살짝 전화기를 들었을 때 창용이의 이름이 보여 신경질적으로 전화기를 내려놨다. 빌어먹을 놈. 오늘은 하루종일 반가운 전화가 한 통도 걸려오질 않았다.
적당히 몇 잔 더 걸치고 집까지 걸어갔다. 어차피 퇴근길에 한 잔 걸칠 생각이었으므로 차는 회사에 두고 온 터였다. 이런 제길. 당장 내일은 아침 일찍 일어나 간만에 버스라도 잡아타야 할 처지에 놓여버렸다. 후우. 시원한 저녁 바람을 맞고 걸으려니 어쩐지 조금씩 달아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시간을 한 번 확인하고 아내에게 전화를 한 통 넣으려다가 그만두기로 했다. 미리 알렸다고는 해도 시간이 11시가 넘어가는데 전화 한 통 없다니. 조금 서운한 마음이 들어서 애꿎은 전화기를 만지작 거렸다. 집 근처까지 겨우 도착했을 때 아내에게 한 통 넣으려는 생각으로 익숙한 전화번호를 꾹꾹 누르고 있는데, 저기 멀리서 환한 자동차 헤드라이트가 보였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불빛이 보이는 곳을 슬쩍 한번 봤다가 나도 모르게 한 쪽 골목에 몸을 숨겼다.
‘내.. 내가 왜 숨는거지?’
지금 이 상황에서 내가 왜 숨는건지 나 자신도 모를 노릇이었다. 다만 자동차 불빛을 넘어 희미하게나마, 그리고 순간적으로, 나는 자동차 보조석에 앉아있는 와이프의 얼굴을 봐버렸다. 어두운 골목에 무릎을 꿇고 앉아 나는 숨을 죽였다. 그리고 자동차는 내 곁에, 아니 내 집 근처에 멈추어 섰다. 나와 꽤나 가까운 거리에 멈춰선 차를 나는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다.
‘비엠...’
나는 자동차를 한번 훔쳐보고 침을 꼴깍 넘겨 삼켰다. 평소에 내가 좋아하던 자동차 브랜드. 괜히 내 구형 아반떼가 떠올라 쓴맛을 다셨다. 하지만 나는 멈춰선 자동차에 시선을 구겨넣고 무슨일이 벌어질지 조용히 집중하기 시작했다.
“고맙습니다.”
보조석 문을 열고 누가 내리는가 싶더니 운전석에 앉아있는 누군가에게 대뜸 고맙다는 인사를 던지고 있었다. 어둠이 내려앉은 탓에 형체를 완전히 파악하긴 힘들었지만, 여리여리한 실루엣과 귓전을 파고드는 단조로운 음성만으로도 그것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아내였다.
“고맙긴 뭘.”
숨을 죽이고 몸을 숨기고 있는데, 운전석 문이 열리는가 싶더니 역시나 누군가가 내리는게 보였다. 기다란 머리카락을 보고 나는 그것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둘의 대화랄까? 암튼 주고받는 말을 듣다보니 어딘가 조금 의아했다.
“오늘 고생많았고, 내일이나 모레쯤 추가촬영 할 거니까 들어가서 푹 쉬고.”
-네.
“아 참.. 그리고 이거..”
-아.. 이거..
“착각하지말고 받아.. 선물이 아니라 다음 촬영할 때 입고 오라고 주는 거니까.”
-...
“받으라니까?”
-네...
“나 참. 대답좀 단답형으로 안할 수 없어?”
-.........
“큭. 후우. 오케이 오케이. 암튼 들어가.”
아내에게 이러저런 이야기를 쏟아내던 한무영은 다시 운전석에 올라탔다. 자동차 범퍼쪽에서 불빛이 새어나오는가 싶더니, 고급 외제차가 천천히 후진을 했다. 그리고 자동차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나와 아내는 각각의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그리고 나는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왜 한무영이 아내에게 반말로 지껄이는 거지?’
아내가 겨우 고개를 돌렸을 때, 나는 어둠속에서 걸어나왔다. 일부러 발자국 소리를 크게 해서 걸으려니 아내가 깜짝 놀라 나를 바라봤다. 어둠이 내려앉아서 아내의 표정이 어떤지 확인할 도리가 없었다. 뭐 변화가 없는 아내의 표정을 본다한들 무엇을 알아낼 수 있을까 싶었지만. 나를 보고 굳어있는 아내의 곁에 다가가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제... 와?”
아내는 한동안 멍하니 서 있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술을 분명 한잔 걸쳤는데, 어쩐지 정신이 멀쩡한 기분이 들었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할 것 같아서 쉴 새 없이 머리를 굴렸다. 그리고 얼마가지 않아 입밖으로 나온건 정말 엉뚱한 한 마디였다.
“한무영... 씨가 데려다 줬나봐?”
결국 나는 스스로 내가 아내를 훔쳐봤다는 사실을 고하고 서 있었다. 아차 싶었지만 얼마가지 않아 고개를 끄덕이는 아내를 보며 어떻게든 얼버무릴 심사로 다시 입을 열었다.
“훔쳐 들을 생각은 없었는데, 그러니까. 정말 그럴 생각은 없었는데, 갑자기 차가 들어오는 바람에. 근데... 저기... 한무영씨가 당신한테 말 놓기로 한거야?”
-........
아내는 다시 대답이 없었다. 나누고 있는 대화는, 내가 일방적으로 무엇인가를 물어보면 아내가 조금의 뜸을 들였다가 천천히 무언가를 답하는 형식이었다. 아내는 잠시 생각에 잠기는가 싶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네. 좀 더 친근한 분위기 속에서 좋은 사진이 나올 것 같다고. 그런데 전 아직....”
-아. 당신은 그냥 존댓말 쓰는...?
“네.”
-그건 뭐야?
내가 아내의 손에 들린 봉투를 가리키자, 아내가 짐짓 놀라는 –혹은 곤란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내심 궁금해진 내가 일부러 태연한 척 말을 아끼자, 아내가 다음 촬영 때 입을 옷이라고 짧게 대답했다. 솔직히 신경이 쓰였지만 티나지 않게 행동하려 노력했다.
한무영만 일방적으로 아내에게 반말을 지껄이는 건가보다. 아무리 일 때문이라고는 해도 남의 와이프에게 반말을 지껄이다니. 조금 언짢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내가 갚아야 할 돈을 생각하니 역시나 조금 이율배반적이게도 나 자신을 납득시킬 수밖에 없었다.
아내와 함께 집을 향해 걸었다. 그런데 아내와 함께 걷는데 아내에게서 이상한 향기가 났다. 분명 향수 냄샌데. 그것도 향이 아주 강한. 아내가 향수를 쓰는 일은 본 적이 없다. 조금 의아했지만 나는 코를 몇 번 킁킁거리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집으로 들어갔다.
역시나 시간은 빠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우리집과 좀체 어울리지 않는 고급 외제차가 왔던 날 밤 이후로 한 달 여 가까운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와이프가 말한대로 와이프는 모델일이 연장된 탓에, 주말은 물론 평일에도 두세번씩 스튜디오에 나가고 있었다. 주말에는 스튜디오까지 어떻게 데려다 준다고는 해도, 직장이 있는 이상 평일에는 아내를 데려다 줄 여유가 없었다. 작업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 데리러 갈까도 생각해 봤지만, 아내가 한사코 됐다고 말하는 통에 늘 먼저 집에가서 밤 늦게 들어오는 아내를 기다리는게 고작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둘 사이에 아이가 없는 탓에 딱히 가정적으로 불편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모델일을 마치고 돌아온 와이프가 내게 돈봉투를 건냈다. 씁쓸한 생각이 들어서 받는둥 마는둥 하고는 방으로 들어와 누워버렸다. 한 달전에 있었던 일들이 머릿속에 떠올라 나 자신이 한심하고 무책임하며 혐오스러워 견딜수가 없었다. 늘 그렇듯 아내는 자신의 모델료의 행방에 대해선 한마디도 묻지 않았다. 괜히 양심에 찔린 내가 먼저 아내에게 ‘급한일이 있어서 당신 돈 좀 어디다 썼다‘ 고 둘러댔다. 결과적으로 쓸데없는 일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가 ‘나 때문에’ 모델일을 시작하게 된지도 두 달을 넘어가고 있었다. 나의 사채 때문에 시작된 일이었지만, 원래대로라면 진즉에 그만둬도 그만뒀어야 할 일이다. 그 빌어먹을 도박 때문에. 후우. 나란놈은 마음이 복잡해서인지 요즘들어 감정의 기복이 심하게 변해 버렸다. 어떤 때는 아내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가슴이 답답했다가도, 어떤 때에는 죄책감은커녕 아무런 생각이 없을 때도 있었다. 그러니까 ‘후자’의 경우는 정확히, 눈에 띄게 변해버린 아내의 모습과 행동을 내 스스로가 캐치할 때였다.
두 달 동안 아내는 변해갔다. 그리고 조금씩 남모르게 변해가는 아내에게서 느껴지는 ‘이질감’은 어쩐지 너무 낯설었다. 처음엔 소극적이던 아내의 태도가 어쩐지 ‘남편’인 내가 느끼기에도 뭐랄까, -어울리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조금 적극적으로 바뀌었다고 해야할까? 암튼 그런 느낌이 들 때가 있었다. 무엇보다 정말이지 내가 처음보는 옷들이 알게모르게 늘어가고 있었다. 그럴 때 마다 아내에게 넌지시 물어봤지만, 아내의 대답은 늘 같았다.
“내일 촬영 때 입을 옷인데, 먼저 한 번 입어보라고....”
나는 일부러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솔직히 조금은 화가 나고 의아했다. 그 이유를 알 것 같으면서도 나는 일부러 외면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언젠가 집에 돌아온 아내에게서 또다시 짙은 향의 향수 냄새가 전해 왔을 때는 나도 모르게 아내를 쏘아붙이고 말았다.
“당신 요즘에 향수 뿌리나봐?”
-........ 네.
“그것도 모델일 때문에..?”
-... 아니.. 이건 그냥... 사주셨어요. 작가님이.
차라리 물어보지 말걸 그랬다. 바보같은 와이프가 차라리 거짓말이라도 해준다면 고마울 것을. 나는 질투심과 패배감 사이에서 묘한 줄다리기를 계속했다. 나는 꿈도 못 꿀 고급 외제차에 고급향수. 그리고 이런저런 옷가지들까지. 와이프가 그런 것에 현혹될 사람이 아닌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만 –아니 어쩌면 그럴거라 믿고 있지만- 그냥 표현하기 힘든 묘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 내가 화가 난 이유는 단 하나다. ‘무능력’.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맞지 않게 묘한 질투심이 늘어갔다. 지금 내가 놓인, 그리고 그동안 내가 벌인 일들을 생각하면 그런 생각조차 해서는 안되는 ‘사치’ 같은 건데,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와이프의 얼굴을 보면 어김없이 그런 생각과 기분들이 내 몸을 감싸곤 했다. 그런 생각이 들수록 아내의 일이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 많이 늦었는데, 언제 들어오나 하구.”
-지금 가고 있어요.
“데리러 갈까?”
아내에게 전화를 건건 어느 평일의 늦은 시간이었다. 아내가 한무영의 차를 타고 우리 집까지 왔던 그 날 이후로 나는 평일의 밤이 되면 당연한 듯 이렇게 전화를 하고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아내가 일을 나간 평일에는, 아내가 돌아오는 시간에 맞춰 집 앞에 나가 기다리는게 일종의 습관처럼 되어 버렸다. 다행인건 아내도 그 날 이후로는 한무영의 차를 얻어타고 오는 일이 없었다는 점이었다.
“아니요. 버스탔어요.”
-버스? 몇 번?
두 달 동안 변화가 생긴 건 아내만이 아닌 듯 했다. 뭐랄까. 집요하다고 해야 할까? 혹은 집착? 암튼 표현하기 어렵지만 아내를 대하는 내 태도도 조금씩 변해가고 있었다. 다만 누구나 그렇듯, 자기 자신의 변화는 스스로가 캐치하지 못하는 법이다. 아니면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건지도.
[다음 정류장은....]
“이제 다 와가요.”
-아.. 나.. 나가서 기다릴게.
나를 안심시킨건 다 와간다는 아내의 말이 아닌,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버스의 안내음성이었다. 전화기를 내려놓고 나는 점퍼를 하나 걸쳤다. 괜히 한숨이 새어 나오는건 왜일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