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6/9)

자.. 시작!

“정일무씨 퇴근 안해?”

-아.. 잠깐 처리할 일이 남았네요. 먼저 가세요.

별로 친하지 않은 동료 하나가 나에게 인사를 건내곤 사무실을 빠져 나갔다. 이제 사무실에 남은건 나 하난가? 

혹시나 하고 와이프에게 전화를 걸어 통화를 했다. 오늘은 촬영이 없는 모양이다. 역시나 와이프는 어젯밤에 나와 연락이 되지 않았던 사실에 대해선 조금도 언급하지 않았다. 이번엔 내 쪽에서 오늘 야근이라는 소리를 ‘덤덤하게’ 내던지고 전화를 끊어 버렸다. 

사무실에 적막이 내려앉길 기다렸다. 그만큼 나도 어떤 생각이 정리될 시간이 필요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면서도 속으론 usb에 담겨있는건, 사실 별볼일 없는 것 투성이 일거다 하는 생각도 놓지 않았다. 몇 분 째 멍하니 컴퓨터 화면만 노려보고 있었다. 그리고 겨우 마음의 정리를 마친 나는 usb를 내 데스크탑에 꽂았다. 

바탕화면에 날짜로 정리된 폴더들이 한꺼번에 나타났다. 모르긴 몰라도 얼추 아내가 그동안 촬영을 나간 횟수만큼은 되는 것 같았다. 나는 주위를 살피며 하나씩 폴더를 클릭했다.

‘두달 전 쯤인가?’

가장 먼저 클릭한 폴더에서 제법 많은 양의 사진들이 쏟아져 나왔다. 무엇부터 클릭해야 할지 엄두가 나질 않았다. 마음에 가는 파일 하나를 슬그머니 클릭해서 사진을 띄웠다. 검은색 스타킹 차림에 스커트를 입고 어색하게 서 있는 아내의 얼굴이 나타났다. 이 차림은 언젠가 본 적이 있다. 나는 방향키를 이용해서 나머지 사진들을 천천히 훑어봤다.

몇 분 정도 걸려서 사진들을 모두 다 살펴볼 수 있었다. 무엇을 생각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두려워’ 했던 사진은 한 장도 없었다. 그냥 평범한 아내의 얼굴이었고, 내가 익히 알고 있는 아내의 사진 뿐이었다. 나는 슬그머니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아직 사진이 많이 남아있다.

나는 차근차근 나머지 폴더들도 살펴봤다. 처음과 비슷한 양의 어마어마한 사진들이 각각의 폴더에서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하나같이 별다를게 없었다. 아내가 입고 있는 옷도 걱정과는 달리 평범해 보였다. 다만 사진에 관해선 문외한인 내가 느끼기에도 시간이 흐를수록 사진에 찍힌 아내의 표정 만큼은 그 시간에 비례해서 바뀌어져 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도무지 자신없어 보이고 의욕이 없어보이던 처음과는 달리 점점 얼굴에 자신감과 뭐랄까, -그러니까 나의 아내에게 이런 표현이 어울릴지 모르겠지만- ‘색정’ 적이랄까. 아니야 아니야. 하지만 도무지 다른 말을 생각해 내기 어려웠다. 나이에 맞지 않게 어려보이는 아내의 얼굴은 정말이지 색기가 가득 배어있었다. 지난 3년을 같이 살아온 나도 낯선, 그런 표정이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멍하니 컴퓨터 모니터를 바라보니 이제 내가 확인해야 할 폴더는 딱 두 개만 남아 있었다. 그 쯤 되니 나머지 폴더는 보지 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정말이지 아내의 사진만 가득했다. 나름의 수확이라면 아까도 말했지만, 사진을 통해 아내의 변해가는 표정과 얼굴을 지켜보는 것 뿐이었다. 슬쩍 시간을 한 번 확인했다. 시간이 아홉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후우. 하나만.. 하나만 더 보고 가자.’

시간도 너무 늦었고, 오랫동안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었더니 눈도 침침해 죽을 지경이다. 그냥 컴퓨터를 꺼버리고 집으로 갈까 하다가 맨 밑에서 두 번 째 폴더를 클릭했다.

‘이번에도 와이프 사진인가?’

역시나 적지않은 양의 사진 파일들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사진을 하나 클릭해 볼 생각도 하지 않고 마우스 휠을 움직였다. 

‘어? 직박구리?’

마우스 휠을 아래 위로 굴리고 있는데, 사진 제일 밑에 또 다른 폴더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폴더명을 보아하니, 별다른 생각 없이 만든 폴더 같았다. 나는 사진을 클릭하는 대신 그 묘한 이름의 폴더를 슬쩍 클릭했다.

“어?”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폴더 안에는 또 다른 폴더들이 들어 있었는데, 이번엔 폴더명이 왠지 낯이 익었다. 무엇보다, ‘임곽수’라는 폴더명이 그랬다. 임곽수라. 나는 불이 꺼져 있는 사무실의 주변을 훑었다. 이제야 무언가가 나올 것 같다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직박구리 폴더 안에는 총 3개의 폴더가 들어 있었다. 무엇보다 내 관심을 끈 건 ‘임곽수’라는 폴더였고, 나머지 두 개는 각각 ‘FINAL’과 ‘비밀’이라는 폴더였다. 나는 먼저 임곽수라는 폴더를 클릭했다.

“동영상?”

뜻밖이었다. 임곽수라는 폴더 안에는 몇 개의 동영상과 또 다른 폴더 하나가 들어 있었다. 그리고 이 파일들 역시 날짜 별로 정리되어 있었다.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무심히 파일 하나를 클릭했다. 

[딸깍]

동영상 하나를 클릭했을 때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카메라의 구도를 보아하니 카메라가 어딘가에 고정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어떤 공간일까? 하는 생각도 잠시 화면에 누군가가 보였다.

‘예... 예린이...’

와이프였다. 짐짓 놀랐지만 놀란 것도 잠시였다. 청바지에 분홍색 티셔츠. 너무나 익숙한 차림의 와이프는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주위를 살피는 듯 했다. 그리고 조금 긴장하는가 싶더니 천천히 옷을 벗기 시작했다.

‘무... 무슨?!’

나는 본능적으로 모니터를 손으로 가렸다. 그리고 주위를 살폈다. 당연한 얘기지만 불이 꺼진 사무실엔 나 이외엔 아무도 없었다. 심장이 두근 거렸다. 나는 다시 두 손을 치우고 모니터를 응시했다. 분홍색 티셔츠를 벗은 와이프의 커다란 젖가슴이 드러나 있었다. 

‘왜... 왜.. 이런..’

이제야 확신이 섰다. 이건 아내가 ‘탈의실’ 이라고 부른 공간에서 몰래 찍힌 영상이었다. 말하자면 몰카. 생전처음 보는 몰카에 놀랐을 뿐더러, 그 대상이 나의 와이프라는데 나는 할 말을 잃었다. 3분 남짓한 영상은 와이프가 청바지를 벗고 하얀색 팬티를 드러낸 이후에야 겨우 끝나버렸다. 

나는 할 말을 잃고 멍하니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이 동영상이 ‘임곽수’라는 폴더에 들어있는 걸까? 아니 한무영의 컴퓨터 안에 들어 있던 걸까? 나는 다른 동영상도 천천히 클릭했다.

나머지 동영상도 모두 같은 곳에서 찍힌 것처럼 보였다. 모두 아내가 주인공이었고, 아내가 옷을 갈아입는 장면이 고스란히 찍혀 있었다. 다만 동영상이 차례대로 넘어가면 넘어갈수록 와이프의 옷차림이 어쩐지 이상하게 변해갔다. 

“맙소사”

동영상을 볼수록 머릿속이 어지러워졌다. 시간이 흐를수록 옷을 갈아입는 아내의 복장이 눈에 거슬렸다. 스타킹 차림으로 들어온 아내가 스커트를 내렸을 때, 언젠가의 그 날 밤처럼 당연히 있어야 할 아내의 팬티가 보이질 않았다. 모니터를 뚫어져라 쳐다봤지만, 아내의 엉덩이 부근은 너무나 휑했다. 나는 나중에서야 아내가 입고 있던게 말로만 듣던 티팬티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고작 아내의 옷 갈아입는 모습일 뿐인데, 동영상을 보는 내내 내 볼이 빨갛게 물들기 시작했다. 그만큼 생전 처음 본 몰카는 생각보다 강렬했다. 그 대상이 나의 아내임에도 불구하고.

동영상이 계속 될수록 아내의 살색 노출은 계속됐다. 무엇보다 충격적이었던 건 종국에 가서는 옷을 갈아입는 아내의 브라와 팬티가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도대체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덕분에 아내의 풍만한 젖가슴과 젖꼭지, 그리고 거웃한 음모가 그대로 카메라에 담겨있었다. 

“하아..”

나는 서둘러 동영상을 껐다. 머리가 어지럽고 속이 울렁거려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은 생각이었다. 나오는 건 한 숨 뿐이었다. 

‘임곽수가 나에게 그토록 관대하게 대했던 건 결국...’

좋은 머리는 아니지만, 이 정도의 상황파악 능력은 있었다. 결국 한무영은 이 따위걸 찍어서 임곽수에게.... 나는 말없이 모니터를 바라봤다.

한참을 말없이 앉아있다가 동영상 아래에 놓인 폴더 하나를 클릭했다. 혹시나 또 무슨 몰카가 있는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번엔 아까와 마찬가지로 몇 장의 사진이 전부였다. 나는 천천히 사진 파일 하나를 클릭했다.

“이... 이건...”

아내가 찍힌 사진이었다. 사진이나 구도, 그리고 포즈 모두 아까 내가 수없이 보던 사진들과 모두 똑같았다. 다만 한 가지 다른게 있다면, 이번엔 아내가 몸 위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러니까 이건..... 아내의 누드사진이었다. 

나는 멍하니 아내의 사진을 바라봤다. 양 손으로 젖가슴과 자신의 은밀한 부분을 가린 사진도 있었고, 그리고.. 그렇지 않은 사진도 있었다. 거웃한 음모를 들어내고 다리를 벌린 채 찍은 사진, 풍만한 가슴을 드러낸 채 기지개를 펴고 있는 사진. 그 종류도 다양했다. 다만 조금 재미있고 의아한 건, 역시나 아내의 표정이었다. 역시나 ‘색정’적인 아내의 표정에선 일말의 부끄러움을 느낄 수 없었다. 그것도 전혀. 마치 프로모델인양, 아내의 표정과 자세에서는 자신감이 묻어나오고 있었다. 

솔직히 어느정도 예상, 혹은 각오는 했었다. 애초에 프로가 아닌 아마추어, 그것도 유부녀에게 300만원이나 주면서 모델을 시키는게 말이 안된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래서 한무영을 처음 만났을 때 조심스럽게 ‘수위’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던 거다. 빌어먹을.. 결국.. 결국...

나는 신경질적으로 백스페이스를 눌러 ‘임곽수‘ 폴더에서 빠져나왔다. 고작 아내의 사진을 몇 장 보고, 아내가 몰래 찍힌 동영상 몇 편을 본 게 다인데 내가 쉽게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던 것 같다. 말 못할 두통이 느껴졌다. 인상을 잔득 찡그리며 모니터를 바라봤다. 보통의 인간이라면 임곽수와 한무영에 대한 일말의 분노가 치밀어야 정상이겠지만, 나는 어쩐지 그렇지 않았다. 

“쓰레기 같은놈....”

그 한마디는 결국 나 스스로에게 던진 말이었다. 나는 밀려오는 두통을 참지못하고 책상위에 머리를 숙였다. 쓰레기 같은놈. 이 쓰레기 같은 새끼....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나에게 한 마디도 해주지 않은 와이프가 조금 원망스러웠다. 물론 누구보다 내가 그러면 안된다는 걸 잘 알고 있었지만.

잠시 시간을 두고 생각에 잠겼다. 지금 상황에서 제대로 된 연산이 가능할리 만무했다. 관자놀이를 꾸욱꾸욱 눌러가다가 나는 다시 마우스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천천히 ‘비밀’이라는 이름의 폴더를 클릭했다.

“또... 동영상인가..”

괜한 허무함이 몰려왔다. 비밀이라는 폴더 안에는 역시나 몇 편의 동영상이 있었다. 이번엔 또 어떤 게 있을까. 괜한 두려움이 밀려왔다. 나는 눈을 한번 질끈 감았다가 천천히 동영상 하나를 클릭했다.

[갔으니 나오세요.]

익숙한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너무나 익숙한 공간. 그것이 어딘지 파악하는덴 결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한무영의 작업실이었다. 이번에도 카메라는 고정되어 있는 듯 보였다. 그보다 익숙한 한무영의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어제처럼 ‘비밀 작업실’의 문이 열리는가 싶더니 누군가가 걸어나오는게 보였다. 인상을 찡그리고 그걸 보니, 체격이 제법 좋아보이는 중년의 남성이었다. 

[누... 누군가? 저 여자는?]

낯선 남성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그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저번에 스튜디오에서 본 그 사내.’

나는 말없이 동영상을 지켜보기로 했다.

[이번에 새로 온 촬영 모델입니다.]

[그래? 아가씨가 제법 예쁘구만 그래.]

[아가씨가 아니라 유부녑니다.]

[호오. 그래?]

대화를 들어보니 두 남자가 가리키는 여자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아마도 내 와이프를 두고 하는 말 같았다. 

[몇 살?]

[그건 왜 물어보시는 겁니까..]

[몇 살?]

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남자의 심기가 조금 불편해 보였다. 

[서른 넷이라고 하던데요.]

[서른 넷? 후후 그래?]

중년의 사내는 묘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앞으로 종종 놀러와야 겠네.]

[네? 그게 무슨?]

[아까도 말했지만, 자네, 사진을 계속 찍고 싶은 생각이라면 말야. 나에 대한 태도부터 고치는게 좋을거야. 그리고 내 말에 토달지마. 알겠나?]

[..............]

[그래, 저 아가씨, 아니 저 분은 언제 언제 오는거지?]

[매주 토요일에 한 번씩....]

[말이 짧군 그래. 자네]

[오기로 했습니다.]

등골에 차가운 한기가 느껴졌다. 내가 모르는 또 무언가가 분명 있으리라. 그리고 그건 ‘비밀’ 폴더 안의 동영상에 담겨 있을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중년 남자가 자리를 뜨고 있었다. 밝게 켜진 조명 사이로 걸어가는데, 나는 순간적으로 재생되는 동영상을 멈췄다. 

‘이.. 이 사람.. 어디서 분명 본 것 같은데..’

조명이 환하게 비추고 있는 사내의 얼굴을 나는 뚫어져라 쳐다봤다. 이목구비가 확연히 드러난 사내의 얼굴에서 나는 눈을 떼지 못했다. 분명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이다. 하지만 정확히 기억이 나질 않았다. 분명 기억에는 있는데.

나는 사내의 정체를 파악하는 걸 그만두기로 하고 다음 동영상을 클릭했다. 

이어지는 동영상에선 한무영의 얼굴이 보였다. 손놀림을 보아하니, 몰래 숨겨둔 카메라의 구도를 확인하는 것처럼 보였다. 덕분에 촬영장 안의 전반적인 화면이 눈에 들어왔다. 

[남편분이랑 같이 오실거라곤 솔직히 생각 못했는데.]

한참을 지났을 때 작업실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고, 한무영의 말소리가 들렸다. 나는 조금 긴장을 하고 동영상을 지켜봤다. 

[데려다 준다고 해서요. 뭐 잘못됐나요?] 

[아니요. 그럴리가요.]

[그럼, 일단 옷부터 갈아입으시겠어요?]

[...........]

청바지 차림의 아내는 한무영으로부터 옷을 건내받았다. 표정을 보아하니 조금 탐탁지 않아 보이는 표정이었다. 아내는 조금 망설이는가 싶더니 옷을 들고 한무영에게 말했다.

[탈의실은 어디에 있나요?]

[아, 탈의실은 촬영장 구석에 있어요. 잘 안보이실 텐데. 제가 안내해 드리죠.]

한무영은 아내를 탈의실로 안내해 주었다. 화면 구도에서 아내가 완전히 사라졌고, 한무영이 슬그머니 작업실 문을 열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문이 열렸다. 그리고 한무영과 함께 다시 그 낯선 중년남자가 촬영장 안으로 들어왔다. 

[하아. 역시 예쁘구만.]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일찍 오실거라곤 생각도 못했습니다.]

[하하. 화장실에 숨어있느라 모양 팔려 죽는줄 알았네.]

아마도 사내는 나와 와이프가 도착하기 전에 미리 스튜디오에 도착한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내 얘기는 했나?]

[어떻게 하겠습니까?]

[자네 그런식으로 나와봐야 좋을게 없을텐데? 자네가 누구 덕분에 여기에 사진관까지 차려놓고 예술가 행세를 할 수 있게 된 건지 벌써 잊은건가? 게다가 자네의 돌아가신 아버님 부탁 때문에 내가 어쩔 수 없이 자네한테 투자 아닌 투자를 하고 있다는 것도 결코 잊어서는....]

다시 분위기가 어두워졌다. 한무영은 사내를 똑바로 쳐다보고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그만하십쇼.]

[그래, 그래야지.]

대화를 들어보니 낯선 사내는 한무영의 ‘자금줄’ 같은 존재정도 되는 것 같아 보였다. 사내는 아내가 들어간 탈의실 쪽을 힐끔 쳐다보는가 싶더니 다시 한무영을 보며 말했다.

[그래, 이제 어떻게 할 건가?]

[저에게도 나름 생각이 있습니다. 단 부탁인데, 앞으론 이렇게 연락도 없이 제 작업실에 찾아오진 말아 주십쇼. 그리고 엄연히 제 작업시간이에는 어떤식으로도 방해하신다거나..]

[자네가 지금 나를 협박하는건가?]

[협박이 아니라 부탁입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제 작업실 안에서는 절대로...]

이번엔 한무영도 물러서지 않았다. 사내는 귀찮다는 듯 한무영에게 손을 들어 흔들어 보였다. 그리곤 구석에 놓인 의자 쪽에 다가가 털썩 주저 앉았다.

삐걱거리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얼마가지 않아 아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옷은 다 갈아입었는데....]

탈의실에서 걸어나온 아내를, 중년남자가 쳐다보고 있었다. 아내도 남자를 봤는지 그대로 말수가 줄어들었다. 

[예린씨 이쪽으로 오세요.]

[저분은 누구시죠?]

아내는 쉽게 경계를 풀지 않았다. 그도 그럴것이, 탈의실에 들어가기 전에는 보이지 않던 사내가 버젓이 자리를 잡고 앉아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일단 이쪽으로 오세요.]

[누구시죠?]

[남자 모델분이십니다.]

[남자 모델이요? 그런 말씀 없으셨잖아요.]

[남자 모델은 어쩌다 한 번씩 필요해서 미리 말씀 못 드렸습니다.]

[그게 말이 되나요?]

[예린씨...]

와이프와 한무영이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자리에 앉아있던 사내가 곤란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한무영은 당황하지 않고 사내를 돌아보며 잠시 자리를 비켜달라고 말했다. 멋쩍게 웃어보이던 중년남자는 아내 쪽을 슬쩍 바라보는가 싶더니 한무영의 작업실을 빠져 나갔다. 

[예린씨 잠깐 여기 앉아보세요.]

[돌아가겠습니다.]

[잠시만요. 여기 앉아 보세요.]

[돌아가겠어요.]

[당신 남편이 지금 어떤 상황인지 압니까?]

한무영이 아내를 불러세웠다. 역시나였다. 결국 한무영이 생각한 방법은 고작 저거였다. 나는 입술을 꾸욱 깨물었다. 아내는 자리에 멈춰서 있었다.

[잠깐만... 잠깐만 앉아보세요. 더 긴 얘기는 하지 않겠습니다.]

한무영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있던 아내가 작업실을 빠져나가지 못하고 그대로 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얼마가지 않아 고개를 돌려 조심스럽게 한무영에게 다가갔다. 이 빌어먹을.. 이 빌어먹을.. 다시 두통이 느껴졌다. 

자리를 잡고 앉은 와이프와 한무영은 한동안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마치 속삭이듯이 조용 조용 얘기하는 바람에, 스피커 볼륨을 아무리 켜도 둘의 대화는 잘 들리지 않았다. 

‘결국... 결국... 내가 아내를 팔아먹은 거구나...’

가슴깊이 묻어두고 있던 죄책감이 다시금 고개를 들고 일어섰다. 손톱을 입에 물고 잘근잘근 씹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동영상에선 눈을 땔 수 없었다. 한무영과 마주한 아내는 묵묵히 한무영의 말을 듣고 있었다. 

‘듣지마... 차라리 듣지마..’

나는 하릴없이 모니터의 와이프에게 말했다. 와이프는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다. 한무영은 무언가를 조심스럽게 와이프에게 계속 얘기하고 있었다. 죽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결국 임곽수가 한무영에게 모든 걸 말했겠지. 내가 얼마의 사채를 꾸어다 썼으며, 앞으로 얼마를 갚아야 하는지. 그리고 한무영은 지금 와이프에게 그걸 설명하고 있는 중일게다. 

와이프는 담담한 표정으로 한무영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런데 한무영이 가슴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와이프에게 보여줬을 때, 와이프가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화들짝 놀라는 게 보였다. 무슨일인가 싶었지만, 아마도 나와 관련된 일일 거라는 생각에 나는 눈을 감아 버렸다.

와이프와 한무영은 한동안 얘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모든 이야기가 끝났을 때, 한무영은 자리에서 일어나 촬영장 밖으로 크게 소리쳤다. 아마도 사내를 부르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아내는 조용히 자리에 앉아 있을 뿐이었다. 

[그럼 이제 촬영을 시작하는건가?]

촬영장으로 들어온 중년의 남자가 웃으며 말했다. 한무영은 애써 무시하고 카메라 쪽으로 걸어갔고, 검은 스타킹에 원피스 차림으로 앉아있던 와이프는 그제야 자리에서 힘없이 일어났다. 

‘미안... 미안...’

[예린씨. 좀 더 웃어봐요.]

한동안 촬영이 계속됐다. 한무영의 카메라를 마주하고 서 있던 아내는 모델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경직된 포즈로 –말 그대로- 서 있을 뿐이었다. 표정의 변화라곤 찾아볼 수 없는 창백한 얼굴로.

[예린씨. 이 쪽 보고..]

한무영만 정신없이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고 있었다. 자리를 잡고 앉아있던 중년남자는 계속 시계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간혹 한번씩 한무영을 꽤나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쳐다보곤 했다.

[자 예린씨. 다시 활짝 웃고.]

[이봐.]

한무영이 카메라를 들고 아내의 이름을 부를 때, 연식이 느껴지는 중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내와 나, 그리고 한무영이 거의 동시에 중년 남자를 쳐다봤다. 중년남자는 꽤나 머쓱했는지 금새 입을 다물었다. 한무영이 중년남자를 지그시 바라보다 손에 들린 카메라를 아래로 내려놓았다.

[예린씨. 표정이 너무 뻣뻣해요. 자세도 자연스럽지 않구요. 후우. 저기. 그럼. 남자 모델분이 예린씨 옆에 가서 한번 서 보세요]

한무영의 말이 끝나자 중년남자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겉옷을 벗더니 아내의 옆에 바짝 다가가 섰다. 아내가 당황한 표정으로 중년남성을 바라봤다. 한무영의 천연덕 스러운 태도에 나는 치를 떨었다.

[자.. 찍습니다. 자 자세 한 번 잡아보시고]

중년 남자는 아내의 곁에 바짝 다가가 섰다. 와이프는 그게 신경이 쓰였는지 슬쩍 슬쩍 몸을 틀곤했다. 하지만 중년남자는 아랑곳하지않고 아내의 몸에 자신의 몸을 밀착시켰다.

[남자 모델이 있으니 한 결 낫네요.]

[그.. 그렇지? 흐흐]

촬영은 계속됐다. 중년남자는 분주하게 움직이며 아내와 바싹 달라붙어 있었다. 한무영은 분주하게 카메라 셔터만 눌러댈 뿐이었다.

[이... 이러지 마세요..]

[뭘요?]

아내의 놀란 음성이 들려왔다. 동시에 어느샌가 아내의 엉덩이쪽에 다가가 있던 사내의 모습이 보였다. 당황한 표정의 아내와 한무영이 중년남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제야 나는 중년남자의 바지앞섶이 심하게 부풀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 이.. 죽일놈이...”

절로 욕이 튀어나왔다. 내가 누구를 욕할 수 있겠냐만은, 중년남자는 너무나 저급하게 행동하고 있었다. 중년남자는 무엇이 잘못되었다는 양 두팔을 공중으로 띄우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손에 카메라를 든 한무영이 아내의 곁에 다가가 귓속에 무언가를 속삭였다. 아내의 표정이 좋아보이질 않았다. 아내는 망설이는가 싶더니 –놀랍게도- 사내의 앞에 다시 가 섰다. 

‘예린아....’

아내의 뒤에 서 있던 사내가 싱글싱글 웃어보였다. 그리고 한무영이 다시 카메라를 들었을 때, 중년남자가 너무나 자연스럽게 아내의 몸쪽으로 자신의 몸을 밀착시키는게 보였다.

그렇게 긴 동영상 하나가 끝이 났다. 

나는 멍하니 컴퓨터 모니터를 바라봤다. 동영상 두 개가 끝이 났는데, 아직도 몇 개나 되는 동영상들이 남아 있었다. 이걸 다 봐야 하는 걸까? 내 자신 스스로가 이걸 견딜 수 있을까? 두 손의 깍지를 낀 나는, 마치 기도를 하듯이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나는 쉼호흡과 함께 천천히 세 번 째 동영상을 클릭했다. 

[죄송합니다. 잠깐 전화좀 받고 올게요.]

동영상을 클릭하자마자 한무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슬쩍 아내가 있는 곳을 바라보니 아까와 같은 옷차림의 아내와 중년남자가 그대로 앉아 있었다. 작업실 문이 열리는가 싶더니 화면에 한무영이 사라지고 없었다. 

[예쁘시네.]

한무영이 나가자마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중년남자가 아내에게 바싹 다가가며 말을 걸었다. 당황한 표정의 아내가 인상을 쓰며 몸을 뒤로 젖혔다. 하지만 중년남자가 아내의 팔을 낚아챘다. 

[빨통도 크시고]

나는 내가 무슨말을 들은건지 몰라서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그 남자가 아내의 어디가 크다고 한건지 알 수 있었다. 

[무슨 짓이에요?]

[가만 있어봐. 원래 여자들은 이렇게 격하게 대해주면 좋아하잖나?]

너무나 순식간이었다. 사내는 아내의 젖가슴을 움켜쥐고는 쉴새없이 주무르고 있었다. 완강하게 반항하던 아내가 사내를 겨우 밀쳐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바지앞섶이 부풀어 있던 중년남성이 작업실을 빠져 나가려는 아내를 보며 소리쳤다.

[한무영이한테서 아무 얘기도 못 들었나?]

남자의 말에 아내는 가만히 자리에 멈춰섰다.

[내가 모델처럼 보일리는 없을테고. 한무영이한테서 무슨 얘기 못들었나? 뭐 가령, 아가씨한테 나가게 될 돈은 나한테서 나가게 된다거나.]

여러모로 수준 낮은 놈이었다. 나는 손톱을 입에 물고는 잘근잘근 씹기 시작했다. 뒤돌아서 있던 아내는 아까와 마찬가지로 고개를 숙이고 자리에 서 있었다.

[이리와요.]

사내가 자신의 옆자리를 툭툭치며 말했다. 설마설마 했지만, 얼마안가 와이프가 천천히 사내의 곁에 다가가 앉는게 보였다. 

[옳지. 그래야지. 자 그럼]

사내는 이제야 안심이라는 표정으로 아내의 어깨에 팔을 올렸다. 그 순간 나는 동영상을 끌까 말까 몇 번이고 고민했다. 하지만 끝내 끄지 못했다. 떨리는 눈동자로 중년남자가 아내의 가슴이며 허벅지며 할 것 없이 희롱하는 걸 그냥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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