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화 〉7화
느닷없이 독설을 퍼부은 금발의 소녀를 떨떠름하게 바라보고 있자니, 그런 나를 보고서 생긋하고 웃어보였다. 뭔가 불안했다. 본능적으로 불안감을 느꼈지만 이 불안감이 어디서 기인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마치 내가 알몸으로 맹수가 사는 숲속에 덩그러니 놓인 듯 한 막연한 불안감을 느끼고 있을 때였다.
“우선... 옷부터 입는 게 좋겠네요.”
그렇게 말하고서 딱, 하고 금발의 소녀가 손가락을 튕기자 내 주변으로 빛이 반짝거리며 다가오더니 이내 옷이 생겨났다.
툭, 하고 발치에 떨어진 옷을, 나는 멍하니 바라봤다. 솔직히 빛이 갑자기 옷으로 바뀐다면 누구나 놀랄게 분명했다.
“조금 모자라 보이지만, 적어도 옷을 입는 법은 아시겠죠?”
“아, 응.”
갑자기 허공에서 옷이 튀어나온 것은 조금 놀랐지만, 생각해보니 그것보다 알몸에서 탈출할 수 있다는 것이 급했다. 나는 주섬주섬, 떨어진 옷을 주어다가 입었다. 처음 보는 낯선 디자인의 옷인데다가, 옷을 입는 순서 같은 것이 있었지만 이미 몇 번이나 입어봤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입을 수 있었다. 사실 옷을 입는 것보다는 옷을 입는 와중에도 빤히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일곱 쌍의 시선이 더 부담스러웠다.
그도 그럴게,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 세계의 의복들, 그것들의 종류나 입는 법 같은 지식이, 머릿속에서 자연스레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내가 어째서 그런걸 알고 있는 걸까, 그런 의문은 없었다. 나도 머리가 있고 생각이란 것이 가능했다. 정신을 잃기 전에 봤던 광경들. 그리고 머릿속에서 자연스레 떠올릴 수 있는 여러 가지의 낯선 지식들. 그리고 내가 눈을 뜬 이 방이, 내가 정신을 잃기 전에 봤던 광경 속에서 마지막으로 보았던 방과 똑같다는 것까지.
이제 대충 내가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이해가 가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 처한 것이 이해가 된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일단은 고마워. 딱 맞는걸.”
“별 말씀을. 흐음... 옷이 좋아서 그런지 그나마 아까보다는 보기 좋네요.”
미리 치수를 맞춰놓았던 것처럼 딱 맞는 옷에,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는 제쳐놓더라도 옷을 준 금발의 소녀에게 감사의 말을 하자 금발의 소녀는 내 말에 겸손의 말을 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다시 한 번 독설을 날렸다.
저런 성격이구나, 대충 눈앞의 소녀들이 어떤 성격인지도 알 것만 같았다. 어디까지나, 첫인상의 범주에서 알아낸 것이기는 하지만. 적어도 눈앞의 소녀가 나와 그렇게 잘 맞는 성격이 아니란 것은 알 것 같았다.
“그럼, 다시 소개드릴게요. 저는 루시아네스 파라모아. 현재로써는 유일무이한 금색용. 창공의 보옥을 지배하는 자. 앞으로 일생을 같이하실 분이시니 루시아, 라고 부르셔도 좋아요. 제가 특별히 허락해드릴게요.”
“...금색용? 보옥? 일생?”
용이라고 하면, 지금 내가 머릿속에 떠올린 그게 맞는 거지? 크아아앙, 숨결을 내뿜으면 산이 깎여나가고 땅이 뒤흔들리는 마법을 부리는... 정신을 잃기 전에 보았던, 그 드래곤이라고 불렸던 미남미녀와 같은... 아니, 어쩐지 이럴 것 같은 예감은 있었다. 그래서 거기까진 그렇게 놀랍지는 않았다. 나를 당황하게 만든 것은 루시아, 그렇게 불러달라고 한 금발의 소녀가 뒤이어서 얘기한 것이었다.
일생을 함께한다. 이쪽에서는 어떤 의미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있던 곳에서는 그런 말을 쓰는 경우는 한정되어 있었다. 여자가 남자에게 그렇게 말하는 경우, 혹은 그 반대의 경우라면 더더욱 그랬다. 그래서 더더욱 당황스러웠지만, 어째서 초면인 나한테 그런 말을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쪽의 이야기는 길어질 테니 나중에 하기로 할게요. 그리고 이쪽의 불만스러워 보이는 얼굴의 아이가 크리샤네아 슈페리아. 저와 마찬가지로 용, 역시나 마찬가지로 현재로써는 유일무이한 흑색용. 대지의 보옥을 지배하는 자. 저래보여도 누가 소환될지 제일 기대했던 아이니까 이해주시길. 솔직히 소환진에서 인간이 튀어나올 줄은 저희들도 몰랐으니까요.”
“잠깐! 뭘 멋대로 소개하는 거야?! 그, 그리고 기대 같은 거 안했거든?!”
“그러셨나요? 뭐, 상관없잖아요?”
“상관 많거든?!”
“그러신가요. 그리고 다음, 이쪽은...”
멋대로 넘어가지 말라고 크리샤라고 여러 차례 불렸던 소녀가 루시아의 뒤에서 날뛰려고 했지만 무슨 신경줄인지는 몰라도 루시아는 그런 크리샤를 가볍게 무시하고서, 이번에는 녹발의 소녀를 가리키며 말했다.
“응~ 일단은 처음이기도 하고~ 내 소개는 내가 해도 될까~?”
“그러시겠다면야.”
그런 루시아의 말을 끊고서, 녹발의 소녀가 그렇게 말하자 루시아는 그럼 그러시던지, 같은 태도로 한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후암~ 뭐라고 하려고 했더라~? 아~ 맞아. 내 이름은 아르카네아 브란시아. 숲의 보옥을 지배하고 있고~ 보시다시피, 남아있는 유일한 녹색용이야~ 그리고 이름 같은 건 아무렇게나 불러도 좋으니까 좋을 대로 해~”
“그럼 아르카로.”
“응~ 상관없어~ 다들 그렇게 부르기도 하고~?”
아무렇게나 부르라기에 다른 셋과 마찬가지로 앞의 발음만 따와서 그렇게 부르겠다고 하자 상관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처음 봤을 때도 느꼈지만, 여러 가지로 대충대충 하는 성격인 것 같았다. 어쩐지 앞의 셋보다는 친해지기 쉬울 것 같았다.
“샤르, 당신은 어쩌실래요?”
아르카가 소개를 마치자, 다시 루시아가 이번에는 은발의 소녀에게 그렇게 물었다. 그 말에 힐끔하고 나를 바라본 은발의 소녀와 눈이 마주쳤다. 금방 다시 시선을 돌려버려서 정말로 마주친 건지, 아니면 그냥 이쪽을 바라봤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루시아에게, 맡길게.”
“알겠어요. 그럼, 이쪽은 샤르비오나 크락시아. 저희들과 마찬가지로 유일하게 남아있는 은색용이에요. 생긴 것은 가장 어려보이지만, 사실 저와 크리샤, 아르카 다음으로 태어났답니다. 자매 중에서도 가장 막내로 보이기는 하지만요. 다들 샤르라고 부르니까, 그렇게 부르는 쪽이 좋을 거예요.”
“...우리들, 자매, 아니잖아.”
“자매같이 자랐으니까 상관없잖아요?”
“...그렇긴, 하지만.”
루시아의 말에, 아르카와는 다른 느낌으로 아무래도 좋다는 듯이 고개를 돌려버렸다. 아마 오늘내로 샤르, 라고 불리는 저 소녀에게서 다른 말을 듣기는 힘들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저런 성격, 많이 봤거든. 게임 속에지만 말이다.
“다음은...”
“나아, 내가 소개하고 싶은데, 상관없지이?”
“그야 당연하죠.”
이번에는 적발의 소녀가, 루시아의 말을 끊고서 앞으로 나왔다. 여태까지의 소개 순서로 봤을 때 뒤에 있는 청발의 쌍둥이가 막내인 듯 했다. 아니, 자매는 아니라고 했으니까 막내고 자시고 없겠지만...
“내 이름은 카르네오스 듀락시아. 유일한 적색용이자 홍염의 보옥을 지배하는 자. 일단은 다들 소개하니까 하는 거지만 말이지. 내 이름을 함부로 부르거나 하면 태워버릴 줄 알라구? 만약에라도 나를 부르고 싶다면, 카르네오스님하고 똑바로 부르도록 해.”
“저렇게 말하지만 사실 저희들 중에서는 제일 어리광이 많으니까 기억해두시길.”
“아, 응. 기억해둘게?”
기억해둬야 하는 건가 이거? 루시아의 말에 반사적으로 그렇게 대답은 했다지만 이걸 내가 기억해 둬야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왜 쓸데없는 말을 하는 거야아?!”
“글쎄요?”
또 다시 루시아가 화를 내는 카르네오스? 솔직히 너무 기니까 속으로는 그냥 카르네라고 부르기로 했다. 아무튼 카르네가 루시아에게 이것저것 따져 물고 있을 때, 여태까지 순서를 기다리는 것이 지루해 죽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던 청발의 쌍둥이가 내 앞으로 튀어나왔다.
“드디어 우리 차례네! 반가워~ 인간씨! 내 이름은 아샤네오나 아드리아. 물의 보옥을 지배하고 있고~ 아냐의 언니야! 아샤라고 불러줘~!”
“아냐세오스 아드리아, 아샤네오나 언니의 동생이야! 언니와 마찬가지로 물의 보옥을 지배하고 있고, 앞서 소개한 루시아 언니들과는 다르게, 유이하게 남아있는 청색용이야! 앞으로 잘 부탁해!”
그러고선 다짜고짜 내 손을 잡고 양쪽에서 마구 흔들어대는지라 당황스러웠지만 간신히 잘 부탁한다고 대답할 수 있었다.
그런 내 대답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흔들어대는 양 팔에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루시아가 제지해줘서 살았다. 토라진 얼굴로 내 팔을 놓아주는 둘을 보자 괜스레 미안해지기는 했지만, 조금 과장해서 팔이 뜯겨나가는 것 같았던 나로써는 다행인 일이였다.
어쨌거나 한숨 돌렸네, 그렇게 생각했다.
“그럼, 이번에는 그쪽의 소개를 들어도 될까요?”
...나도 해야 되는 거였어?
아니, 그렇지. 이런 흐름이면 자연스레 나도 자기소개를 하는 게 맞기는 하지.
문제는 내가 자기소개라는 것을 누가 아주 죽을 쒀서 입 앞에 떠줘도 못 먹는 그런 놈이라는 거였다. 대학 입시 때는 좋았지, 자기소개서로 어떻게든 됐으니까. 면접? 밤을 꼬박 새서 예상 질문 대답을 통째로 암기했다.
게다가 그때 내가 무슨 질문을 받았었고 뭐라고 대답했는지 기억도 나질 않았다. 일단 합격은 했지만.
그런 나에게 이렇게 갑작스런 자기소개는 너무 버거운 일이였다.
“음, 그러니까.”
우선 당황하지 말자. 자기소개, 분명 내가 못하는 거긴 하지만 그렇게 어려운 것도 아니잖아. 가볍게 이름부터 말하자.
“내 이름은...”
그 순간 지직, 하고 눈앞에 보이던 광경이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워낙 금방이였기에 별 신경 쓰지 않고 잘 못 본거라고 여겼다.
“이지경이라고 해.”
가끔 아버지가 내 이름을 이렇게 지어서 이지경이 됐다고 놀리고는 했었지. 계속 듣다보니 정말로 그런 것 같다고 여길 때도 있었다.
그때였다.
띠링~
[플레이어의 이름이 설정되었습니다!]
귓가에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듯 한 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리고 그 소리가 한번뿐으로 끝난 것도 아니었다.
띠링~
[플레이어의 ‘상태창’이 갱신되었습니다!]
띠링~
[플레이어와의 ‘관계창’에 새로운 관계도가 추가되었습니다!]
띠링~ 띠링~ 띠링~
계속해서 귓가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당황했다. 하지만 루시아를 비롯한 모두는 그런 나를 이상하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혹시, 들리지 않는 건가? 분명 작기는 했지만 들리지 않을 정도의 소리인 것도 아닌데?
“갑자기 왜 그러시나요? 환청이라도 들리는 것처럼.”
“그게... 갑자기 속이 좋지 않아져서.”
정말로 들린다고 하면 미친놈 취급할 것 같았다. 그래서 일단 그렇게 얘기하자 루시아가 잠깐 고민하는가 싶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인간은 저희들과 다르게 체력이 약하다고 했었죠. 이 정도일 줄은 몰랐지만. 일단은 휴식하는 것이 좋을까요?”
뭔가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그 오해를 정정해주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다.
띠링~
[‘루시아네스 파라모아’가 플레이어 ‘이지경’을 걱정합니다. 호감도가 1만큼 상승했습니다!]
띠링~
[‘크리샤네아 슈페리아’가 플레이어 ‘이지경’을 걱정합니다. 호감도가 1만큼 상승했습니다!]
띠링~
계속해서, 띠링띠링하고 머릿속에서 울려대는 소리랑 목소리에 정신이 나갈 것 같아서 그런 거였다.
그리고 지금의 소리를 어디선가 들어봤던 것 같다고 생각했던 것도,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여기에 오기 전에 마지막으로 붙잡고 있었던 게임. ‘라이프’에서 알림이 새로 뜰 때마다 나는 소리랑 똑같았던 것이다. 그때도 시도 때도 없이 울렸던 이 알림음 때문에 일부 중요한 것을 제외하고는 전부 제외했었던 것도 기억이 났다.
지금이랑 그때랑 다른 것은, 여긴 게임 속이 아니란 것과 설정창에서 알림음을 끄는 것이 불가능한 것 정도? 완벽할 정도로 모든 것이 봉쇄됐네.
“아니, 혹시...”
설마, 하는 마음이 더 컸지만 혹시나 싶어서 작게, 나는 중얼거렸다.
“상태창...?”
「상태창」
「이름 : 이지경」
「칭호 : 차원을 넘은 자」
「성별 : 남성」
「나이 : 27세」
「직업 : - 」
「종족 : 인간」
「근력 : 38(D)」
「민첩 : 50(C)」
「체력 : 40(D)」
「지력 : 79(B)」
「마력 : 0(F)」
「매력 : 30(D)」
「행운 : 91(A)」
「생명력 : 400/400」
「마나력 : 0/0」
「지구력 : 97%」
「고유 특성 : 차원을 넘은 자(SS), 개변자(S), 만인지상(S)」
「보유 특성 : 황금률(A)」
「보유 기능 : 안정(B)」
「상태 :혼란 (뭐야 이거?)」
그러자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하면서도 미묘하게 다른 상태창을 보였다. 마지막에 볼 수 있었던, 혼란 상태가 지금 내 심정이었다.
뭐야 이거.
지금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