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0화 〉20화 (20/370)



〈 20화 〉20화

뻔하다면 뻔한 전개.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였다. 예상할 수 있었지만 막을 수 없었던 루시아의 말을 듣고서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런 나를 보고서, 루시아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지경님? 괜찮으신가요?”

루시아의 말에 내가 한참동안이나 아무런 말도 없었다는 것을 눈치 챘다. 그리 많은 시간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침묵이란 것이 얼마나 괴로운 것인지 알게 된지 몇 분이나 지났다고 이 모양이었다.


기분 탓일까, 어쩐지 불안해 보이는 표정을 하고 있는 루시아가 보였다. 아니, 기분 탓이 아닐 것이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분명 루시아도 불안했을 것이다.

“미안. 잠깐만... 아주 잠깐만 생각할 시간을 줘.”


“...네, 그걸로 납득하실 수 있으시다면.”


“고마워, 루시아.”


그렇게 말하고서 아주 잠깐, 몇 초정도의 시간 동안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내가 한 설명을 듣고서도, 그런데도 자신의 정보창을 보라고 말하는 루시아를 보고서 뒤늦게 깨달았다. 내가 그녀의 정보창을 볼 용기가 없다는 사실을.


나는 단순한 겁쟁이에 불과했던 것이다. 루시아가 말했던 선인 같은 것이 아니었다. 나는 그저 단순한 겁쟁이였다.


‘저리 치워!’

한 소녀의 목소리가. 이제는 그 목소리의 형태조차도 흐릿한 기억 속의 소녀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오는 것 같았다.

악에 받쳐서, 나에게 소리치던 소녀의 목소리가, 선명히. 그 날처럼, 비가 내리던 그 날 보았던, 들었던 소녀의 목소리가 귓가에 박혀 들어오는 것 같았다.

‘내 몸에 손대지 마!’

알았다. 내가 겁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너한테 도움을 받을 바엔 차라리...!’

알겠다. 내가 겁을 먹었던 이유가 뭐였는지.

나는 너에게 미움 받는 게 싫었던 것이었다.

겁쟁이라서.

루시아가 내게 말했던 것처럼, 상냥하거나, 착해빠졌다거나, 선인이라거나, 그런 것이 아니었다.

단지 겁쟁이라서, 누군가에게 미움 받는 것이 무서운 겁쟁이라서. 나는 루시아의 정보창을 보고서, 혹시라도 보일지 모르는 그녀의 감정을. 진실된 감정을, 사실은 나를 싫어하는 것이 아닐까, 사실은 자신의 운명이 증오스러웠던 것이 아닐까, 그것을 보는 것이 아닐까 두려웠던 것이었다.

바보 같았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생각하는 것이었지만, 나는 무척, 바보 같은 인간이었다.

“...미안, 오래 기다렸지?”


“아뇨, 이제... 생각은 마치셨나요?”

루시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겁쟁이란  확실히 알았다. 그리고 적어도 각오는 다졌다. 미움 받더라도, 설령 또 다시 미움 받더라도 이번에는 포기하지 않을 각오를.

“그럼, 실례할게.”


고개를 끄덕이는 루시아를 보고서, 정보창, 그렇게 작게 속삭였다.


띠링~

[호감도가 부족하여 ‘루시아네스 파라모아’의 정보창의 일부만이 공개 됩니다.]



「정보창」
「이름 : 루시아네스 파라모아」
「칭호 : 보옥의 지배자, 창공의 용, 최후의 금색용, 광휘의 꽃」
「성별 : 여성」
「나이 : 41세」
「직업 : 보옥의 지배자」
「종족 : 인간(폴리모프)//드래곤」
「근력 : 102(S)//열람불가」
「민첩 : 98(A)//열람불가」
「체력 : 102(S)//열람불가」
「지력 : 132(SS)//열람불가」
「마력 : 201(SSS)//열람불가」
「매력 : 98(A)//열람불가」
「행운 : 72(B)」

「생명력 : 10200/10200//열람불가」
「마나력 : 201000/201000//열람불가」
「지구력 : 87%」


「고유 특성 : 보옥의 지배자(SS), 마도의 선구자(S), 절세가인(A), 이하 열람불가」
「보유 특성 : 금색용의 가호(S), 용의 분노(A), 이하 열람 불가」
「보유 기능 : 마도의 극의(S), 불요불굴(S). 이하 열람불가」

「상태 : 건강」

「호감도 : 16 (열람불가)」


귓가에 울리는 알림과 함께 눈앞에 보이는 황금빛의 정보창이, 내 것과는 다른 모습의 루시아의 정보창이 떠올랐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내 것과는 비교가  되는 수치를 보이고 있는 루시아의 능력치였다. 행운을 제외하고는 모든 능력치가 나보다 월등히 높았다. 특히 마력, 그리고 마나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높았다.

마법의 종주, 드래곤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능력치였다. 거기에 비교하면  마력은 0, 비교하는 것조차 부끄러웠다. 아니 애당초 비교가 불가능하구나. 없는 것을 아무리 더해도 결국 제로이니까. 그런데도 루시아의 정보창은 그게 끝이 아니라는 것처럼, 열람불가라는 표시가 떡하니 적혀져 있었다. 하나도 아니고, 행운을 제외한 모든 능력치가.

저 표시의 의미가 무엇인지는 대충 예상이 갔다.


예상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정보창에 다 나와 있으니까. 그러니까 지금 내가 보고 놀란 능력치는 루시아가 인간으로 폴리모프한 결과 그나마 낮아진 능력치라는 것이 말이다. 실제로 루시아가 얼마나 강한지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알고는 있었지만 상상 이상으로 종족의 격차가 크다는 것을 새삼스레 느꼈다.

그리고 그 다음, 내 눈에 보인 것은 루시아의 정보창, 그 가장 밑에 위치하고 있던 상태표시였다.

“하아...”


거기에 적혀져 있는 것을 보고 나와 버린 한숨에 루시아가 나를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그런 루시아에게 말했다.

“아니, 아무것도 아냐. 그냥... 조금 당황스러워서.”


“당황...인가요?”

“응, 생각했던 거랑 조금 달라서 말이지.”


기껏 한 각오가 무색하게도, 거기에는 열람불가라는 글자만이 보일 뿐이었다. 아니, 어쩌면 이러지 않을까, 그런 생각은 들었다. 실제로 내가 갖게 된 능력, 이 세계에 오기 전까지 즐겼던 게임 속 시스템을 꼭 닮아있는 이 능력이, 만약 정말로 그것을 닮은 것이라면 이러지 않을까, 그런 생각은 했었다. 그 게임 속에서도 일정 이상의 호감도와 관계, 적어도 30의 호감도와 우정 관계여야만 극히 일부를 제외한 능력들을 제외하고, 전부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루시아를 알게 된지도 고작 일주일, 그것도 갑작스런 일정으로 바빠진 나머지 얼마 대화도 나누지 못했던 루시아의 정보창을 본다고 해도 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혹시라도, 만에 하나라도. 그런 생각에 덜미를 붙잡혀서, 지레 겁부터 먹고 말았다. 한심한 모습이었다. 내가 봐도 한심한 모습이었다.


“그래서 어떠신가요? 저의 정보창은?”

루시아의 말에 다시  번 정보창을 살펴봤다. 어떻냐니 그거야 뭐...

“...굉장하다고 밖에 표현 못하겠는걸. 적어도, 나랑 비교하면 엄청나게 굉장해.”

사실 비교하기가 미안하다고 말해도 될 정도지만. 그 말만큼은 할  없었다.


“그런가요...”


내 말에 무언가 생각하는 표정을 짓던 루시아가 말했다.

“아주 잠깐 실험 해봐도 좋을까요?”


“실험?”

“네, 예를 들어서 이렇게...”

스르륵, 루시아의 모습이 바뀌어가는 것이 눈에 보였다. 금빛으로 찰랑거리던 머리카락이 짧아지고 매혹적으로 아름다웠던 얼굴은 아직 앳된 티가 남은 소녀라고 부를만한 사랑스러운 얼굴로 변했다.


루시아를, 평소보다 열 살 정도 어리게 하면 이렇지 않을까, 그런 모습이 된 루시아가 말했다.

“다른 형태로 폴리모프를 한다면, 이지경님의 정보창에는 어떻게 보이는지,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아, 잠깐만...”

루시아의 말에 아직 눈앞에 떠올라있는 정보창을 다시 한  바라봤다.




「정보창」
「이름 : 루시아네스 파라모아」
「칭호 : 보옥의 지배자, 창공의 용, 최후의 금색용, 광휘의 꽃」
「성별 : 여성」
「나이 : 41세」
「직업 : 보옥의 지배자」
「종족 : 인간(폴리모프)//드래곤」
「근력 : 52(C)//열람불가」
「민첩 : 73(B)//열람불가」
「체력 : 67(B)//열람불가」
「지력 : 132(SS)//열람불가」
「마력 : 154(SS)//열람불가」
「매력 : 92(A)//열람불가」
「행운 : 72(B)」


「생명력 : 670/670//열람불가」
「마나력 : 10400/15400//열람불가」
「지구력 : 63%」

「고유 특성 : 보옥의 지배자(SS), 마도의 선구자(S), 절세가인(A), 이하 열람불가」
「보유 기능 : 마도의 극의(S), 불요불굴(S). 이하 열람불가」


「상태 : 건강 (열람불가)」

「호감도 : 16」

“이건...?”

거의 절반가량 감소한 능력치와, 마찬가지로 비슷한 수치가 떨어진 마력이 보였다. 다만 눈에 띄게 변한 것은 생명력과 마나력이었다. 수치상으로는 몇  정도가 떨어졌을 뿐이었는데 반 토막은커녕 열배, 많게는 수십 배의 차이가 생겨있었다.


“어떠신가요? 변한 것이 있나요?”


루시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서 대답했다.

“능력치가 감소했어. 특히 마력이랑, 마나력이 엄청나게. 그리고 생명력도.”


“흐응... 이걸로 어느 정도, 이지경님의 능력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  있을 것 같네요.”

“내 능력의 정체?”

“네, 적어도 그 정보창이라는 능력에 대해서라면. 지금 저는 이중으로 형태변환 마법에 걸려있어요. 하나는 자연스레, 내가 만약 인간이었다면 어땠을까, 그런 느낌의 변환. 이것이 방금 전까지의 제 모습이죠. 본신보다는 못하지만 불편하다고 생각될 정도는 아닌 수준의 변환이죠. 인간식으로 말하자면, 조금 공을 들여서 꾸민 정도라고 해야 할까요?”


루시아의 말에 오랜만의 동창회에 나가기 위해 이것저것 빼입었던 어머니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내가 보기엔 불편해보였지만 어머니는 그렇지 않았었지. 오히려 팔팔 날라 다니셨다. 그런 느낌이라고 생각하면 좋으려나.

“거기에 이중으로, 거기에서 좀  어렸더라면,  더 약하게, 그런 느낌으로 다시 한 번 변환.  결과가 이런 모습이겠죠. 음, 제가 어려진다면 이런 느낌이었을까요? 이지경님이 보기엔 어떠신가요?”

“엄청 귀여운데.”

“...보기와는 다르게 보는 눈은 있으시네요. 흐음, 저도  모습이  마음에 들었어요.”

나도 모르게 나와 버린 대답에 루시아가 살짝 웃어 보이며 그렇게 말했다. 순간 말실수를 했다싶었지만 루시아가 좋아하는 것 같으니까 괜찮았다. 아무튼 괜찮았다.

괜찮은거... 맞지?


띠링~


['루시아네스 파라모아'의 호감도가 1만큼 상승했습니다!]


그래도 혹시 하고 조금 불안했던 것을 알림음이 너는 무죄다, 그렇게 말해오는 것처럼 귓가에 들려왔다. 노 길티. 사실 귀여운 걸 보고 귀엽다고 말한 거가지고 이렇게 쩔쩔  필요가 있나 싶지만.

그런 나를 보고서 루시아가 말했다.

“뭐, 그래도 이지경님의 취향이 이런 거라면 조금 곤란할지도 모르겠네요. 적어도, 샤르와 아샤, 아냐를 제외하면 전부 힘이 좀 들겠죠.”

“아니,  취향은 오히려 이전의 루시아에  가까운데.”


 말에 루시아가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 갑자기 왜 저러나 싶었지만, 금방 다시 돌아보고는 말했다.


“...음, 죄송해요. 이 이야기는 넘어가도록 할까요? 계속해서 설명해도 될까요?”

“아, 부탁할게.”


“흐흠... 방금 전에도 설명했으니 기억하고 계시겠지만, 이중변환. 특히나 지금과 같은 형태로 변하는 것은 드물어요. 사실 저도 이런 형태로 변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니까요. 이곳과 마찬가지로, 저희들의 성은 기본적으로 선조분들이 인간이나, 아인의 형태를 자주 취했던 만큼 인간이나 아인의 크기에 맞춰져 만들어져 있거든요. 덕분에 인간의 형태를 취한 적은 꽤 있었지만.”

그렇게 말한 루시아가 손바닥을 펴보이고는 손가락 하나하나 꼽아가며 말했다.


“거기에서 더욱 어리게, 더욱 약하게 변한다는 것은 생각도 안 해본 일이죠. 애당초 그럴 이유가 없으니까요. 유희를 위해서라면 단순한 형태변환으로도 가능하니까. 뭐, 드문 경험이지만 나쁘지는 않군요. 그렇지만,  모습에는  가지 단점이 있어요. 무슨 단점일거라고 생각하시나요?”


루시아의 말에 내가 말했다.


“...힘이 든다는 거?”


루시아의 정보창을 보면, 눈에 띄게 변한 능력치만큼이나, 지구력 또한 대폭으로 감소되어 있었다. 그 점을 지적하자, 루시아가 정답이라는 것처럼 손가락을 하나 펴며 말했다.


“맞았어요. 가장 먼저, 우선 힘이 들지요. 아까도 인간의 식으로 비유했으니... 말하자면 찢어지기 쉬운 옷을 입고, 거기에 몸에 맞지도 않는 장신구를 주렁주렁 매달은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요? 쉽게 말하자면  형태는 불안정해요. 작은 충격을 받으면 무너져버리겠죠. 적어도, 이 형태를 유지하는 것은 힘들어질 거예요. 덕분에 조심조심, 형태가 무너지지 않게 신경을 쓰다보니 그만큼 힘이 들지요. 거기에서 두 번째 단점이 생겨나요.”

“두 번째 단점?”

“형태변환의 단점이라고 봐도 좋겠네요. 이 모습을  상태로, 만약 제가 칼에 찔린다면 어떻게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미안, 잘 모르겠어.”


“아뇨, 이지경님이 미안할 필요 없어요. 정답은 작은 상처 본신에 비한다면 아주 작은 상처에 불과하더라도, 이 모습을  상태로 다치게 된다면 그리고 만에 하나 형태변환이 풀리고 제 본신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그것은 제 본신에 맞는 상처로 변한다는 거예요. 작은 상처라도,  본신에 맞춰져 아주 커다랗게, 치유도 더욱 까다로워지겠죠.”


그것이 두 번째 단점.


확실히 그것은 커다란 단점이었다. 본신의 루시아와 비교해도, 그리고 그것이 아니더라도 이전의 루시아랑 비교해도 지금의 루시아는 무척이나 약해진 상태였다. 그런데 지금의 상태에서 입은 상처가, 이전이나 본신으로 돌아갔을 때도 그만큼의 데미지로 남아있는 것이라면, 확실히 그건 단점이라고 부를만 했다.

그것도 아주 치명적인 단점.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이런 모습을 취하는 것은 예외 중의 예외, 흔한 일이 아니니까요.”


내 표정을 살핀 루시아가 그렇게 말했다.


“...그런데 그거랑 정보창이랑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야?”


“이지경님이 말씀하셨죠?  모습을 하고 있을 때와, 이전의 모습을 하고 있을 때. 정보창에 표시되고 있던 능력치가 바뀌었다고.”


루시아의 말에 곰곰이 생각해봤지만 도무지 그거랑 이거랑 어떤 연관이 있는지 모르겠다. 이것이 지력 132랑, 80의 차이인가... 아니, 지력의 문제라기보다는 단순히 이세계에 대한 무지함이 문제인 것 같기는 하지만. 어쨌거나 아무리 생각해도 정답을 알  없던 나는 루시아에게 물어봤다.

“그런데 그게 뭐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