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화 〉22화
그럭저럭 준비를 마치고나서 남은 시간 동안 책이라도 좀 읽어둘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책을 꺼내들려던 나를 만류하며 에루나가 말했다.
“주인님. 루시아 아가씨와 약속한 시간이 됐습니다.”
“뭐? 벌써?”
내 말에 에루나가 고개를 끄덕이고서 들고 있던 시계를 보여줬다. 나는 각각의, 드래곤을 표현한 듯한 모양의 바늘이 가리키고 있는 문양을 읽어냈다. 커다란 바늘이 태양을 의미하는 문양에, 그리고 작은 바늘은 바람과 숲을 의미하는 문양의 사이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걸 내 식으로 읽자면 대충 오전 7시정도? 확실히 루시아와 약속했던 시간이었다.
이세계에 와서 불편한 점 중에서 한 가지를 꼽자면 정확한 시간을 알아낼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물론 이세계 방식으로 시간을 알아내는 방법이야 있었다. 그리고 그 시간을 읽는 방법도, 드래곤들이 전해준 기억 속에 있었다. 그래도 알고 있는 것과 익숙한 것은 다른 법이었다. 자랑은 아니지만 이세계의 시간을 알아내는 방법을 나는 아직 완벽하게 다루지 못했다.
애당초 이세계에서 시간을 알아내는 방법이라고는 두 가지뿐이었다. 하나는 태양이 뜬 방향과 이 세계에 존재하는 또 다른 태양, 그 둘을 비교하는 방법. 그 두 개의 태양이 교차하는 시간이 에루나가 들고 있는 시계로 표현하자면 두 개의 바늘이 정확히 태양과 태양을 가리키는 시간이었다. 대충 12시정도라고 보면 됐다. 그 흔한 시계도 읽는 게 귀찮아서 디지털시계만 썼던 내가 이런 식으로 일일이 태양을 봐가며 시간을 알아내야하는 방식이 익숙해질 리가 없었다. 다른 하나는 에루나가 들고 있는 시계처럼 마법을 통해 시간을 알아내는 도구가 있기는 했지만... 뭘, 나는 마력이 0이었다. 사용이 아주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지만, 내가 들고 다니기엔 불편한 점이 있었다.
덕분에 시계는 항상 에루나가 소지하고 다녔다. 그것만이 아니라 마력을 필요로하는 각의각종의 편의도구들은 전부 에루나가 가지고 다녔다.
음,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에루나가 없으면 도대체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는 걸까 싶다. 마력이 없다는 것은 엄청나게 불편하구나. 듣기로는 이세계에서 마력이 ‘적다’는 것은 우리세계에서 신체의 일부가 없는 것과 비슷한 취급을 받는다고 했다. 확실히 생활에 필요한 여러 도구들마저 마력을 필요로 한다면 그럴 만 했다.
그렇다면 마력이 아예 없는 나는 대체 뭐가 되는 걸까.
아주 잠깐 세간이 바라볼 ‘나’에 대한 것을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요 일주일동안 어느 정도 익숙해진 태도로 양 팔을 벌리고 말했다.
“그럼 마무리를.”
“네, 실례하겠습니다.”
내 말에 에루나가 다가와 옷매무새를 고쳐주었다. 일단 혼자서 옷을 갈아입는데 익숙해져가고 있었지만, 그래도 나 혼자서는 옷의 세세한 부분이 구겨지거나, 볼썽사납게 변하고는 했다. 그래서 언제나 마무리는 에루나가 도와주었다. 애초에 이 옷들은 본래부터 시종의 도움을 받아 갈아입는 것들뿐이었다. 혼자서 입기에는 아예 불가능한 부분도 없지 않아 있었다.
옷을 갈아입는 것을 누군가가 도와준다. 이곳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상상도 못했던 이야기였다. 덕분에 처음에는 에루나의 도움을 받는 것이 엄청나게 어색했지만 지금은 그러려니 싶을 정도로 바뀌어 있었다. 사실 하루에 몇 번이나 도움을 받는 주제에 익숙해지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한 거였다.
그래도 아주 처음부터 갈아입는 것을 도와주는 것은 역시 꺼려졌다. 에루나가 골렘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더라도 겉으로 보기에는 미인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으니 말이다. 덕분에 에루나에게 도움을 받는 것은 언제나 마무리, 그리고 나 혼자서는 도저히 입지 못할만한 것들뿐이었다.
지금의 경우에는 이미 입어두었던 옷을 마무리만 부탁한 경우지만 말이다.
그런 나에게 에루나가 말했다.
“주인님, 오른 팔을.”
“응?”
“잠시만 내려주시겠습니까?”
“아, 그래. 이렇게?”
“예, 그걸로 충분합니다.”
감사의 의미를 담아서 살짝 고개를 숙여보였던 에루나는 다시 내 옷 매무새를 고치기 시작했다. 진지한 태도로 옷단장을 도와주는 에루나를 바라봤다. 입을 열면 항상 놀리는 것인지 아닌지 구분이 안가는 말만 내뱉는 에루나였지만 이런 에루나를 바라보면 도저히 그런 에루나와 지금의 에루나가 동일인, 아니 동일골렘으로 보이지가 않았다. 이럴 때의 모습은 그녀의 이름처럼, 완벽한 시종으로 밖에 보이지 않으니까.
에루나 투아레, 고대의 문자로 준비된 시종이라는 이름을 드래곤들로부터 부여받은, 나를 위한, 나만의 시종.
내가 대체 뭐라고 에루나에게 과할 정도의 충성을 받는지는, 나의 감성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질 않았지만 적어도 그런 그녀에게 최소한이라도 좋으니 걸맞은 주인이 되고자 노력하고 있었다. 이런 생각을 했다는 걸 들킨다면 에루나에게 또 놀림 받을 것 같지만.
“끝났습니다. 주인님.”
“응, 고마워. 에루나.”
“주인님.”
에루나가 나를 부르는 말에 이전에 에루나가 나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주인과 시종, 그에 걸맞는 태도에 대해서. 이것 역시 익숙해지는데 힘이 들것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나는 말을 고쳐서 말했다.
“음, 수고했어, 에루나.”
“제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숙여보이는 에루나에게 들키지 않게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내 심리를 어느 정도는 읽는 것이 가능한 에루나에게 이런 감정을 숨기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럼 주인님.”
“좋아, 가볼까.”
아직 이세계에 대해서 완전히 적응하려면 한참이나 걸리겠구나, 그런 감상을 품은 채로 앞장서는 에루나의 뒤를 쫓았다.
“오셨군요. 이지경님, 어젯밤은 편히 주무셨나요?”
“어, 음... 응.”
사실 꼬박 날밤을 새면서 옷을 골랐다고는 말할 수는 없어서 미소를 띤 얼굴로 그렇게 묻는 루시아에게 어색하게 웃으며 화답했다. 그런 나를 본 루시아가 한층 더 밝게 웃어보였다. 내가 어젯밤 뭘 했는지 알고 있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내 착각이겠지만.
“그나저나... 여기에서 뭘 어떻게 하는 거야?”
루시아의 말대로 이 곳, 천공성에서 가장 넓은 방, 그러니까 내가 가장 처음 소환되었을 때 있었던 방에 온 것 좋았지만 여기는 말 그대로 넓을 뿐이지 이렇다 할 것들이 없었다. 그 흔한 가구도 하나 없이, 그저 넓은 방일 뿐이었다. 한가지 이 방의 특징이라면, 바닥에 거대한 마법진이 새겨져있다는 것 정도일까. 루시아가 파라모아를 구경시켜주겠다는 말과, 이곳에 오라는 말에 오기는 했지만 도통 그 이유를 모르겠다.
그런 나의 표정을 살핀 루시아가 말했다.
“보통이라면, 이지경님과 함께 전이마법을 사용하면 그만이지만... 이지경님은 마력이 없으시잖아요?”
“그래, 그렇지. 혹시 마력이 없으면 전이 마법이라는 것이 불가능한 거야?”
“반쯤은 맞고, 반쯤은 틀렸어요.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다소의 준비가 필요하거든요.”
다소의 준비, 그 말에 방을 다시 둘러보자 눈에 띄는 것이 보였다. 방의 한 가운데에, 내가 소환되었을 당시에 있었던 마법진. 그 위에 기묘한 보석이 놓여 있었다.
“기본적으로 이 마법진은 공간이동, 즉 전이마법과 같은 근간을 두고 있는 마법진이에요. 물론 대마법을 위한 마법진이었던 만큼 규모라던가, 여러 가지로 다르겠지만요. 그래도 아주 조금, 마법진을 비트는 것으로 다른 식으로 이용할 수도 있죠. 즉, 보통의 방법으로는 전이가 불가능한 이지경님도, 이 마법진을 통한다면 어디든 전이 마법을 통해 이동할 수 있다는 뜻이랍니다.”
“헤에...”
루시아가 친절하게 그렇게 설명해주었지만 그게 뭐 어떻다는 건지 아무것도 모르겠다. 자신만만하게 말하는 루시아를 보니 뭔가 엄청 대단한 일인 것 같지만, 뭐가 대단한건지 아무것도 모르겠다고 해야할까.
아마 처음으로 전기를 발견한 사람이 사람들 앞에서 전기에 대해서 설명했을 때도 이러지 않았을까? 대단한 건 알겠는데 그게 뭐가 어떻게 대단한건지 감도 안 잡혔을 것이다.
그런 내 반응에 루시아는 조금 김이 샜다는 표정을 짓고는 말했다.
“뭐, 일일이 설명하는 것보다 직접 보시는 것이 좋겠네요. 이지경님, 그리고 에루나. 마법진 위에 서주시겠어요?”
루시아의 말에 나는 마법진의 위로 올라섰다. 그러자 반짝반짝, 마법진이 빛나기 시작했다.
“저는 둘을 먼저 보내고, 바로 뒤쫓아갈 테니 제가 보이지 않아도 걱정하지 말아주세요. 에루나, 이지경님을 부탁할게요. 그곳은 나의 영지, 감히 이지경님에게 해를 끼칠만한 존재가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겠지만...”
루시아의 말에 에루나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주인님께 불경한 모습을 보이는 자가 있으면 저, 에루나 투아레가 즉시 응징하겠습니다.”
“좋아요. 만약에라도 그런 자가 있다면, 에루나. 당신이 직접 처리하세요.”
...뭔가 엄청 살벌한 대화가 오간 것 같은데, 무서워서 도저히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물어볼 수가 없었다.
“그럼, 이지경님. 파라모아의 주인으로써.”
저의 영지에 오신 것을 환영해요.
그렇게 말하는 루시아의 말과 동시에, 눈앞이 한순간 희번뜩하고 빛무리와 함께 점멸했다.
그리고...
“이 곳, 파라모아에 오신 것을 저희 모두가 환영 드립니다. 고귀하신 꽃, 천상의 지배자이자 창공의 보옥의 주인이신 저희들의 지배자. 루시아네스 파라모아님의 반려자시여.”
수십, 아니 족히 수백 명이 넘는 인원이 내 앞에 무릎을 꿇은 채 그렇게 말하는 광경이 눈에 비쳤다.
“어. 응...?”
“주인님.”
아주 살짝, 고개를 숙이며 내게 인사해오는 이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에루나가 나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그제서야 갑작스런 상황에 벙해져있던 정신이 제정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에루나가 이런 일이 있을 때를 대비해서 내게 알려주었던 것을 떠올렸다. 나는 내 나름대로 최대한 꾸며낸 표정을 짓고, 위엄이라고는 쥐뿔도 없는 목소리를 최대한 쥐어짜내서 말했다.
“아아, 반갑다. 내 이름은 이지경이라고 한다. 짧은 시간동안이지만 잘 부탁하지.”
겨우겨우 쥐어짜낸 그 한마디에, 눈앞에 무릎 꿇고 있던 이들이 거의 동시에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이지경님을 모실 수 있다니, 저희 모두에게 자손대대의 영광이나이다!”
쿠웅!
누구는 너무 과하게 고개를 숙인 나머지 바닥에 이마까지 찧었을 정도였다. 아니, 소리만 듣자면 한두 명이 아닌 것 같았다.
“...에루나?”
“훌륭하셨습니다. 주인님.”
폭주, 아니 내 눈에는 반쯤 광기로 밖에 보이지 않는 그 광경에 심장이 쪼그라들어서 에루나를 불렀지만, 에루나는 그런 나에게 칭찬을 해왔다.
잘한 거야? 진짜로? 이게 보통인 거야? 정말로?
그런 감정을 담아서 에루나를 바라봤지만, 에루나는 그런 나를 보고서 뭐가 문제라도 있습니까? 하는 얼굴로 고개를 갸욱였다.
“......”
에라 모르겠다.
세세한 것은 신경 쓰지 말자고, 그렇게 다짐했다. 이게 이세계의 상식인거겠지. 그렇게 여기기로 했다.
그렇게 여기니 마음이 꽤 편해졌다. 생각해보니 루시아는 이 땅의 왕, 아니 왕보다 더한 존재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저들의 반응을 보자니 나는 그런 루시아의 반려, 그러니까... 이렇게 말하니 부끄럽지만 남편으로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즉, 나는 저들에게 왕의, 아니 여왕의 반려인 셈이었다. 다소 과한 반응을 보여도 이상할 것은 없을 것이다.
응, 그런 거겠지. 아마도.
“고개를 들도록.”
“네!”
내 한마디에 수백이 넘는 인원이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들어올린다. 그 모습에 가슴 한켠의 무언가가 꿈틀거리는 것 같았다.
목 뒤가 엄청 간지럽다. 부끄러움, 고양감, 희열, 다시 돌아가서 부끄러움. 이런저런 감정들이 뒤섞여서 엄청 간지럽다.
그래서 말해버렸다.
“한명만 남고 모두 물러가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