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6화 〉26화 (26/370)



〈 26화 〉26화

내 손을 감싸 쥔 루시아의 온기가 느껴졌다. 정말로 따듯해서, 무심코 눈에 힘을 빼면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조금 진정이 되셨나요?”

“아, 응... 고마워.”


상냥한 목소리. 내게 그렇게 물어온 루시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런 나를 보며 루시아가 살짝 미소 지었다. 나는 어째선지 그 미소를 보는 것이 부끄러워져서 고개를 돌려버렸다.

부끄러운 것이다. 루시아의 말대로 확실히 조금 진정이  무렵이었다. 머리에 피가 돌기 시작하니까 부끄러운걸 부끄럽다고 느낄만한 수준이 된 듯 했다.

그리고 그 말은 방금까지 내가 했던 짓을 냉정하게 판단할 정신머리가 됐다는 것을 의미했다. 나는 머리를 감싸 안고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고 싶은 것을 간신히 억눌렀다.


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한거냐? 응? 대체 무슨 짓을 한거냐고. 어째서 이지경이 된 거지 보통은 반대 아니냐고. 보통 이런 이야기는 남자 주인공이 울먹이는 여자 주인공을 위로하는 그런 멋진 장면이 나와야  텐데.


어째서 나는 이런 꼴이 된 걸까. 어째서 울먹이는 여자 주인공의 역할이 나인거냐고. 울지는 않았지만. 아니, 진짜로 울지는 않았지만! 울 뻔했지만 울지는 않았다고. 뭐 감정은 이해한다. 그럴만한 상황이었으니까. 오히려 내가 겪었던 상황을 똑같이 겪은 사람을 봤더라면 용케  울었구나 칭찬해줬을 것이다.

문제는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라는 거다. 아무리 부정하려고 해도 루시아의 앞에서 차마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모습을 보여준 것은 틀림없었다. 적어도 10년간은 이불을 걷어찰 만한 모습을 보여준 것만큼은 변하지 않았다.


아, 진짜 어쩌다 이런 지경이 된 거지. 정말로 이름 때문인가.


아버지가 농담 삼아서 했던 말에 신빙성이 생기는 듯 한 기분이 들었다. 분명 착각이겠지만.

“그나저나... 이래서야 오늘은 무리겠네요.”


루시아로서는 혼잣말을 한 모양이었지만, 나와 루시아는 지금 손을 잡고 있는 상황이였다. 작은 목소리였지만 확실히 들렸다.

“...무리라니, 뭐가?”

혹시 나 때문에 무슨 일이라도 잘못된 건가 싶어서 묻자 루시아는 살며시, 내 손을 붙잡고 있던 손을 놓으며 대답했다.

“실은 이지경님을 위해 간단한 환영파티를 준비하고 있었어요. 저의 영지에 오신 것을 기념하는 조촐한 파티를. 하지만 그런 것보다 이지경님이 더 중요하니까, 오늘은 일찍 쉬시는 것이 좋을 것 같네요.”


“미안. 애써 준비해준 건데.”


루시아의 말에 면목이 없어졌다. 하지만 괜찮다고 말하며 루시아가 준비했다는 환영파티를 즐길만한 상황이 아닌 것도 확실했다. 피곤하다고 해야 할까, 지금 당장 누워서 쉬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그런 나를 보며 루시아는 살짝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파티 같은 건 내일도,  다음날에도, 언제든지 준비할  있으니까요. 그럼 에루나, 이지경님을 부탁할게요. 카에네스, 당신은 이지경님과 에루나를 방으로 안내해주세요.”

“감사합니다. 루시아 아가씨. 그럼 주인님,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루시아의 말에 에루나가  옆으로 다가와 나의 손을 붙잡았다. 꾸욱, 하고 어쩐지 조금 힘이 들어간 에루나의 손길에 의아스러웠지만,  그러냐고 물을 새도 없이 에루나는 내 몸을 끌어당기더니 그대로 나를 안아 올렸다.

예의 공주님 안기라고 부르는 것이었다. 안긴 것은 공주님이 아니라 덩치 큰 남정네였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런 덩치 큰 남정네를 안은 것은 멋진 왕자님이 아니라 세련된 하녀복 차림의 보랏빛 머리카락을 가진 아름다운 소녀, 로만 보이는 골렘. 에루나고.

“어?”

 자꾸 역할이 반대가 되는 건데? 그런 생각이 머리에 스쳐지나갔다.

아니, 역할이 반대고 자시고 에루나가 갑자기  이러는 건지  수가 없었다. 봐, 카에네스도 갑자기 나를 들어 올린 에루나를 보고서 놀란 눈을 하고 있잖아.

그보다 이거 아직 루시아의 앞이었다. 루시아는  신경 안쓰는 모양이었지만 나는 엄청 부끄러우니까 좀 놓아줬으면 좋겠다. 그렇게 말하려고 할  에루나가 카에네스를 째릿, 하고 노려보며 말했다.

“뭐하십니까? 어서 안내를.”

“아, 아! 그럼 안내하겠습니다. 이쪽으로.”

나는 에루나가 카에네스를 노려보는 모습을 보고 얌전히 안겨있기로 했다.






이지경과 에루나, 그리고 그 둘을 안내하기 위해 자리를 비운 카에네스까지. 공동에 남아있던 모두가 밖으로 나가고 홀로 남게 된 루시아네스는 자신의 발밑을, 거기에 있는 그림자를 노려봤다.

만약 그런 루시아의 모습을 이지경이 봤더라면 금세 깨달았을 것이다. 이전, 루시아네스가 자신에게 보여줬던 그것은 노려본 축에도 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만큼 지금 루시아네스의 모습은 흉흉하기 그지없었다. 공기가 떨리고, 까드득하고 루시아네스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마력으로 바닥에 금이 갔다. 심약한 자라면 그런 루시아네스의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멎어버릴지도 몰랐다.

그리고 처음으로, 이지경이 이세계에 소환됐던 날 이래로 처음으로 화를 내며 루시아네스가 말했다.

“전부 당신이 꾸민 짓이죠? 크리샤.”

루시아네스의 말에 스르륵하고 그녀가 노려보고 있던 그림자가 꿈틀거리며 움직였다.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꾸물거리며 움직인 그림자는 곧 형태를 만들어가며 몸을 일으켜세웠다. 루시아네스, 그녀의 자매 중 하나이자 이세계의 유일하게 남은 흑색룡. 대지를 지배하는 보옥의 주인인 크리샤네아 파라모아의 형태를.

그림자는 흔들거리며, 마치 웃는 것처럼 흔들거리며 대답했다.

“내가 꾸민 짓이라니, 말이 너무 심한데. 나는 가벼운 장난을 친 것뿐인걸?”

“질문에 대답하세요. 크리샤. 당신이 꾸민 짓이냐고 물었어요.”

“내가 꾸몄다는 것이 네가 영지에 펼친 결계를 찢고, 이곳에 노예사냥꾼들을 들여보낸  말하는 거야? 그렇다면, 맞아. 내가  짓이야. 그래서? 그게 뭐 어쨌다고? 딱히 네가 기르던 엘프들이 죽거나, 잡혀간 것도 아니잖아?”

“크리샤네아!”


쩌적하고, 그림자가 베였다. 베였다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크리샤네아의 형태를 하고 있던 그림자는 반으로 갈라졌으니까.

하지만 그림자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다시 원래의 형태로 바뀌었다.

“그렇게 소리 지르지 마. 가벼운 장난이잖아? 그게 아니면 부끄러워서 그러는 거야? 하긴 그럴 만도 하네. ‘당신이 느끼는 그 책임, 저도 짊어져도 될까요?‘ 라니, 루시아. 네가 그런 말을 할 줄은 전혀 상상도 못했으니까.”

그렇게 말하는 그림자를 보고서, 루시아네스는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부서졌다. 산산조각이 나는 것처럼, 그림자가 흩어져서 부서졌다.

그러자 루시아네스의 뒤에서 새로운 그림자가 몸을 일으켜세웠다. 흩어져나간 그림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새롭게 생겨난 크리샤네아의 형상을 한 그림자가 루시아네스의 목덜미를 뜯으며 말했다.


주르륵, 루시아네스의 피부가 찢어지고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너무 화내지마. 루시아, 네가 새로 만든 결계가 워낙 뻑뻑해서 이걸 만들기도 꽤 힘들다고.”


“어째서 그런 짓을 한 건지 대답하세요! 지금 당장!”


그림자가 흔들흔들, 마치 웃는 것처럼 흔들리고는 대답했다.


“뭐, 가벼운 시험이었어. 인간인 그 녀석이 과연 어떤 반응을 보여줄지 궁금하잖아? 그래서 그랬어. 결과적으로, 꽤 다시 봤다고? 동족이 죽는 꼴을 잘도 무시하던걸? 놀랍지 않아? 우리는 고작 일곱밖에 남지 않아서 이렇게 쩔쩔 매는데.”


“그만! 그 이상 말하면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용서하지 않으면 어쩔 건데?”

크르르...


그림자가 루시아네스의 얼굴을 붙잡고, 이를 갈며 루시아네스를 노려봤다.

“나를 죽이기라도 할 거야? 불가능할걸? 너는 나를 죽이지 못해! 내가 훨씬, 너보다 훨씬 더 강하니까! 그리고 말이야, 전에도 말하고 싶었지만... 겨우 1년 먼저 태어났다고 언니 행세하지 마.”


루시아네스가 그림자를 향해 손을 휘두르자, 그림자는 유유히 그런 루시아네스의 손을 피하며 말했다.


“그리고 생각해보라고. 고작 1년이라고? 그 안에 우리들을 꼬시겠다고 장담한 인간이, 그런 남자가 겨우 이런 걸로 무너지겠어?”


스르륵, 하고 그림자가 루시아네스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런 그림자를 루시아네스가 쳐내자 흩어지며 깔깔하고 웃는 크리샤네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 잘만 하면 그대로 폐인이  뻔 했지만 말이야. 아쉽게 됐네. 차라리 그게 나았을 텐데. 어차피 아이만 가질 수 있으면 되는 거니까. 차라리 나도 그 쪽이 장난감을 쓰는 거라고 생각하면 되니까 나을지도 모르고?”


“나는, 분명히 경고했어요. 크리샤네아. 그걸 어긴 건 당신이고.”

쩌억, 하고 루시아네스의 금빛으로 빛나는 눈이 세로로 갈라졌다.

드래곤,  이름에 걸맞은 마력이 그녀의 손 안에 모이기 시작했다. 하물며 이곳은 그녀의 영지. 창공의 보옥의 영향 아래에 있는 땅이었다. 순식간에 모여진 거대한 마력에 그림자가 움찔하고 떨렸다.

“그렇다면 나도 경고 하나 할게.”

루시아네스의 손 안에 모인 거대한 마력이 이내 그림자를 지워버리기 시작하자, 크리샤네아의 형상을  그림자는 서서히 사라져가며 말했다.

“한  뒤에는 녀석이 어디에 오는지 기억하고 있지? 맞아, 내 영지야. 이걸 어째... 나보다 약한 네가, 하물며 내 영지 안에서 나를 막을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너는 잘나신 몸이니까, 내 말의 의미를 알겠지? 나는 분명히 경고했어. 루시아.”

쏴아아아...

그림자가 완전히 흩어지고 나자, 루시아네스는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크리샤...”


아주 만약, 만약의 일이지만...

루시아네스는 피가 흘러내리는 목을 더듬으며 생각했다.

“당신이 실수를 저지른다면, 그때 당신을 용서하지 않는 건 저뿐만이 아니란 걸 기억하시길 바라요. 크리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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