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33화 〉33화 (33/370)



〈 33화 〉33화

추욱, 하고 풀이 죽은 에네스타가 쭈그려 앉은 채로 바닥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는 것이 보였다.

이럴 줄은 몰랐는데, 정말로 몰랐는데.


“에네스타? 미안하다니까. 좀...”


그런 에네스타를 어떻게든 달래려고 하던 내 등 뒤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인님.”

나를 주인님이라고 부르는 존재는 이전의 세계와 이쪽의 세계를 통틀어서 단 한 명뿐이었다. 나는 장난을 들킨 아이처럼 화들짝 놀라서 뒤를 돌아봤다.

거기에는 여느 때처럼 태연한 얼굴로 서있는 에루나가 있었다.

“어, 언제 왔어?”

“언제라고 물으신다면 지금  이곳에 도착했습니다.”


다행이다. 그럼 내가 했던 짓은 보지 못했다는 말이 됐다.

“하지만 주인님께서 그것을 가지고서 에네스타에게 모종의 협박을 하고 있던 것은 알고 있습니다.”

내가 손에 들고 있던 마법도구를 가리키며 말하는 에루나를 보고서 나는 허겁지겁 대답했다.

“협박이라니?! 그냥 내일 수업은 조금 봐달라는 말만 했거든?”

“과연, 그래서 에네스타가 저러고 있던 모양이군요.”


에루나의 말에 나는  앞에 쭈그린 채, 저는 마법의 마도 모르는 힘만  바보입니다, 하고 중얼거리고 있는 에네스타를 바라봤다.

잠깐 눈을 돌린 사이에 아까보다 상태가 좋지 않아졌다.

 존엄을 걸고 말하지만, 내가 저렇게 만든 건 아니었다.

마법도구를 빌미로 내일 있을 수업에 대한 협상을 하다가, 그냥 장난삼아 했던 말에 저렇게 된 거였다.

다른 엘프들은 다들 마법도 잘 쓰고 정령도 소환하던데, 에네스타는 오히려 마법도구를 망가트리는 구나, 하고 무심코 했던 말에 저렇게 된 거였다.


음...? 이러면 내가 저렇게 만든 거잖아?

그래도 나도 할 말은 있었다. 내가 어떻게 알겠는가, 드래곤 다음으로 마법에 재능이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엘프로써, 마법의 마는커녕  반대인 투기를 익히고, 끝내 검주가  에네스타가 그것에 대한 열등감을 가지고 있는 줄은, 내가 무슨 수로 알 수 있을까?

내가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그야 정보창을 보면   있기야 하겠지만 정보창을 통해 알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것뿐이었다. 심층적으로 대상이 갖고 있는 트라우마나, 기억 같은 것을 읽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했다.

애당초 에네스타의 심리를 읽기에는 호감도가 부족했다.

변명으로 들릴지는 몰라도 내가 에네스타를 안지는 이제 겨우 나흘이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였다.

지금의 모습이, 제 3자인 에루나의 눈에 어떻게 비칠지는 뻔했다.


“어이, 에네스타? 좀 일어나서 뭐라고 좀 말해봐. 에네스타? 내가 잘 못 했으니까...”

기분 탓인지 차가워 보이는 에루나의 표정을 보고서 황급히 에네스타를 일으켜 세우려고 했지만 꿈쩍도 안했다. 다리를 땅에다가 꽂아놓은 것도 아닐 텐데 미동도 하질 않았다.


이래보여도 나흘간의 수행으로 늘어난 것은 기능과 라이어스 검술의 랭크만이 아니었다. 근력도, 체력도, 민첩도, 눈에 띄게 성장을 이뤄냈다.


그런데도 양 팔을 써서 움직이려 해봐도, 땅에 검지를 처박고 빙글빙글 돌리고 있는 에네스타의 작품만이 더욱 완성을 향해 다다를 뿐이었다.

아마도 자신을 그린 듯한 캐릭터가 콰쾅, 하는 이펙트와 함께 마법을 쓰고 있는 모습을 그리고 있는 에네스타의 작품은 생각 이상으로  그려서, 이러고 있는 모습과 평소의 에네스타를 떠올리면 괴리감이 있었다. 그리고 그 괴리감 때문에 에네스타의 꼴이 더욱 비참하게만 보였다.


검주가, 이 세계에 100명도 채 되지 않는다는 초인인 존재가 이럴 거라고 누가 생각이라도 할까 모르겠다.

그런 모습을 지금 나와 에루나에게 보여주고 있다는  문제였지만.


“에네스타...”


아무리 부르고 잡아당겨도 제정신을 차릴 줄을 모르는 에네스타를 부르던 나를 보고서 에루나가 입을 열었다.

“뭐, 주인님이 에네스타를 구워삶던, 어떻게 하던 상관없습니다만, 단지 시종인 자로써 조언을 드리자면 합방만큼은 적어도 아가씨들과 먼저 하신 후에 해주시길 바랄 뿐입니다. 듣자하니 인간의 정은 오크들이나 다른 종족들에 비해서 소모된다면 다시 건강한 새것이 나올 때까지 시간이 걸린다고 하... ”

“그럴 생각 추호도 없거든?!”

루시아가 들으면 큰일 날 소리를 하기 시작한 에루나의 말을 가로막으며 황급히 그렇게 말했다.

정말로, 루시아가 이런 모습을 본다면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다행히 루시아는 여기에 없었다. 내가 이러고 있는 걸  일도 없었다. 그건 정말로 다행이었다.

그런 나를 묘한 얼굴로 쳐다보던 에루나가 살짝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농담입니다. 적어도 주인님께 그럴 생각이 없다는 건 누구보다 제가 가장 잘 알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면 그런 농담은 하지 말아주라...”


“죄송합니다. 무심코 그만.”

그렇게 말한 에루나가 다가와서는 내가 들고 있던 추를 받아들었다.

“그리고 이건 고장 난 게 아니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부분만 새로 바꾸면 됩니다.”


“정말인가?!”

에루나의 말에 완성된 작품의 옆에 새로운 그림을 그리고 있던 에네스타가 벌떡 일으키며 외쳤다. 덕분에 바로 옆에 있던 내가 깜짝 놀랐다.

하지만 그런 급작스런 에네스타의 변화에도 에루나는 눈깜짝않고 에네스타의 물음에 대답했다.


“예, 정말입니다. 그러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그런가, 그런가... 음! 봤나? 드래곤의 반려. 내가 마법도구를 망가트릴 일이 있을 리가 없잖는가?”

그런 사람이 그렇게 풀이 죽어있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바닥에 있는 그림의 새로운 시리즈가 늘어날 것 같아 자중하며 말했다.

“응, 그래. 봤으니까 발밑에 그거나 지우고 말해라.”


“아, 음... 그래, 음... 이건 잊어주게...”


내 말에 얌전히 자신의 작품을 발로 비벼 지우는 에네스타를 뒤로하고서 나는 에루나를 보며 말했다.

“그나저나 루시아는? 같이 있던 거 아니었어?”


“사실 그 일로 말씀드릴게 있었습니다.”


그렇게 말한 에루나의 얼굴은, 처음 나를 만났을 때. 나에게 맹세의 말을 했었을 때처럼 진지한 얼굴이었다.


“...무슨 일인데? 루시아가 무슨 말이라도  거야?”


에루나가 저렇게 진지한 표정을 짓는 경우는 여태껏 딱  번 본적이 있었다.  번은 나와 예속 계약을 맺었을 때, 또 한 번은 저번에 있었던, 식당에서 루시아네스가 에루나를 내보내려고 했었을 때뿐이었다.


그리고 그 둘의 공통점은 이거였다.

나와 관련된, 무언가가 일어났을 경우였다. 그리고 이번도 그런 일일 것이다. 그런 예감이 들었다.

“네, 루시아 아가씨로부터 부탁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일을 위해서 잠시 주인님의 곁을 떠나야할  같습니다.”

“떠난다고?”

내가 이곳에  뒤로, 항상 내 곁에 있었던 에루나가 어딘가로 떠난다는 말에 조금 놀랐다. 말로만 항상이 아니라, 몸을 씻거나,  며칠 동안에 불과했지만 잠을 자는 시간 외에는 항상 내 옆에 에루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까놓고 말해서, 천공성에 있는 모든 조명이나, 목욕하기 위해 물을 데우는 것,  외에도 내 식사를 준비하던 것들 모두 에루나가 담당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일에는 하나같이 마력이 필요했다. 에루나가 없으면 나는 내 방에 불도  켜고, 몸도 마음대로 못 씻고, 밥도 못 챙겨먹는 신세였다.

그것을 루시아도, 그리고 그 누구보다도 에루나가 가장 잘 알고 있을게 분명했다.

그런데 그런 나를 두고, 사실상 이세상의 입장에서는 혼자 냅두면 안되는 생물의 1순위를 달릴 나를 두고서 어딘가로 떠나야한다는 에루나의 말에 의아심이 무럭무럭 자라났다.


그런 나를 보고서 에루나가 말했다.

“죄송합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다만,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길어야 일주일, 짧으면 3일 이내에는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내가 명령해도 이야기 할 수 없는 거야?”

혹시 몰라서 그렇게 묻자 에루나가 나를 빤히 바라봤다. 나 역시 그런 에루나의 눈을 빤히 바라봤다.


“물론  경우라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말씀드립니까?”


에루나의 말에 이전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아냐 됐어, 어쨌거나 그건 중요한 일인거지? 그리고, 나를 위한 일이고?”


“네, 저는 주인님의 시종, 주인님께 해가 가는 일은 결코 하지 않습니다.”

에루나의 대답을 듣고서, 나는 어깨에 힘을 풀었다.


“그럼 됐어. 난 또 무슨 큰일이라도 난 줄 알았네.”

“큰일이라면?”

“뭐, 그런 거 있잖아. 멀리서 내 새로운 선생님을 불러오는 일을 하러간다던가, 내가 해야  일이 더 늘어난다거나, 나는 그런 거라도 말하는 줄 알아서 놀랐다고.”


설마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말이다. 이미 하루의 절반 이상이 수행이었다. 이 이상으로 늘어나면...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사실 지금도 일반적으로 사람이  만한 짓은 아니었다. 식사시간을 제외하고서, 심지어 수면 시간도 필요 없는 나로써는 그야말로, 하루의 절반 이상을 통째로 훈련하고 있던 셈이었으니까.


뭐 그래도 그런 거라면 굳이 내게 비밀로 할 필요도 없는 이야기니까,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에루나를 바라봤다.

“...표정이 왜 그래?”

그리고 처음으로 놀란 표정을 지은 에루나의 얼굴을 봤다. 뭔가 불안했다. 그런 내 감정에 답하듯이, 천천히 에루나의 입술이 열렸다.


“...주인님께서는 예지 능력이 있으신 모양입니다.”


“잠깐만. 그거 무슨 뜻이야.”

“별거 아닙니다. 네, 아무것도 아닙니다. 제가 돌아올 무렵이면 주인님의 쉬는 시간이 다소 줄어들거나 그러겠지만, 그것만 빼면 별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거잖아?! 별 거잖아?! 아니, 그보다 여기서 더 뭘 줄인다고?”

“그럼 저는, 준비를 해둬야 하기 때문에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에루나? 에루나?!”

내 부름에도 불구하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가는 에루나가 보였다.


툭, 툭...

그런  어깨를 에네스타가 두드리며 말했다.


“안심하게나, 드래곤의 반려. 뭐, 하루 이틀 쯤이야 잠 안자도 꽤 버틸 만하다네.”


“......”

애당초 안 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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