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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6화 〉36화 (36/370)



〈 36화 〉36화

방으로 돌아온 나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다가,  입고 있던 옷을 하나 둘 벗어던졌다. 에루나가 있었을 때는 이런 짓을  엄두도 안 났는데, 지금은 에루나가 없으니까 내 맘대로  수 있었다.

약간의 해방감과 비슷한 것을 느끼면서, 오랜만에 입어보는 것 같은 잠옷으로 갈아입고서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쿡쿡, 하고 침대를 누르자, 침대의 한 가운데가 그런 내 손을 밀어내듯이 부풀어 오르는 것이 보였다. 솜이라고 생각하기엔 너무 푹신푹신하고 탄력이 있었다. 대체 이건 뭐로 만든 걸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별로 중요한 건 아니었다. 중요한건 정말로 오랜만에 이 침대라는 가구를 사용하게 됐다는 것이었다.

평소대로라면 지금쯤은 에루나가 가져와준 책을 읽으며 보냈을 시간이었지만, 약간의 피로를 느끼고 있는 몸을 보아하니 지구력도 꽤나 바닥이 나있는 것 같았다. 이 상태로, 에루나의 간식도 없이 밤샘을 했다가는 도중에 뻗을게 분명했다.


읽고 있던 책을 마저 읽지 못한다는  조금 아쉬웠지만 그래도 밤늦게 책을 읽다가 뻗는 것도 사양이었다.

아예 지구력이 바닥났을 때는 어떻게 되는지도 알 수 없고. 이전에 했던 게임 속에서는 지구력이 바닥이 나면 다음날은 하루 종일 잠만 잤었지만, 여기서도 그런다는 보장은 없었다.

“내일도 훈련이 있을 테니까, 얌전히 잠이나 잘까.”

지금 안자두면 내일은 더 고생일 테니까, 그런 생각을 하며 환히 빛나는 조명을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 저걸 끄긴 꺼야 되는데. 에루나가 있었다면 내가 이런 생각을 하기도 전에 미리 꺼뒀겠지만, 그런 에루나가 없으니 직접 끄거나, 대신 꺼줄 사람을 불러야했다.

마력이 없는 내가 직접 끌 수는 없으니, 오늘부터 내 시중을 들어주기로  에오시스 자매를 불러야했다.

“...어떻게 불러야 되는 거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을 때 똑똑, 하고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시선을 옮겨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향하자,  너머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 실례합니다. 나타라고 합니다.”

“아, 그래. 지금 열어주마.”


불을 꺼주러 왔나보다. 마침 잘 됐다. 나는 나타에게 대답하며 문을 열어주기 위해 다가갔다. 이왕 나타가 온 김에 다음에는 어떻게 부르면 되는지 알려달라고 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문고리를 붙잡고 문을 여는 순간이었다.

띠링~


스윽, 하고. 귓가에 울리는 알림과 문이 열리는 소리가 겹쳐 들려왔다.

[위기감지! 기능 위기감지가 플레이어 ‘이지경’님의 정조의 위기를 감지합니다!]

아까 발동해놨던 위기감지가 발동하는 소리였다.

“...정조라니.”


귓가에 들려온, 알림이 내뱉는 괴랄한 소리에 잠시 멈칫했다가, 열린  사이로 보인 나타의 모습에 뇌정지가 와버렸다.

“...어?”

잠깐 눈을 의심했지만, 내 눈은 멀쩡했다. 하지만 그런 멀쩡한 눈에 비친 광경은 멀쩡하지가 않았다.


알몸의 나타가, 멀쩡하다고 볼  없는 광경이 눈에 비쳐보였기 때문이었다.

“...그, 시중을 들기 위해 왔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나타가 푹 고개를 숙여보였다. 다시 보니까 알몸은 아니었다. 알몸은 아니었지만, 나타의 새하얀 속살이 훤히 비쳐 보이는 반투명한 네글리제로 된 속옷차림이었다.

알몸이나 알몸이 훤히 비쳐 보이는 속옷이나 매한가지지만 말이다.

그런 나타를 황망하게 바라보고 있던 내 귀에, 나타의 이어진 말이 들려왔다.

“아무쪼록, 오늘밤은 성심성의껏 베헤노스님을 모시겠습니다...!”

정조의 위기, 알림이 말했던 소리의 의미를 알아차린 순간이었다.

그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에루나가 내 시중을 들고서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의 일이었다.


그때만 해도 에루나는 내가 잠이 들었을 때 침대 위로 올라와서 ‘밤시중은 시종의 도리’라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는 했었다. 그리고  위협은 간식을 통해 지구력을 채워서 불면의 도핑효과를 누리기 전까지는 매일 밤 시달리고는 했었다.


그 기억이, 머리를 강타하는 기분이었다.

“저, 저기... 베헤노스님 그, 안으로, 들어가도 괜찮겠습니까?”

들려온 나타의 목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나타가 자신의 몸을 빤히 쳐다보고 있던, 사실은 공황상태에 빠진 터라 전혀 보지도 못하고 있었지만, 적어도 나타가 보기에는 빤히 쳐다본 거나 마찬가지인 나에게 그렇게 말하고 우물쭈물, 훤히 비쳐 보이는 자신의 몸을 가리는 것이 보였다. 얼굴을 새빨갛게 익은 토마토처럼 붉힌 채, 몸을 배배꼬고 있는 나타를 보고서, 나는 재빨리 몸을 움직였다.

바닥에 집어던지듯이 벗어두었던 옷이 선견지명이 될 줄은 몰랐는데. 나는 바닥에 떨어져있던 가죽으로 된 웃옷을 집어다가 나타의 몸 위로 걸쳐주었다. 나타랑 비교해서 머리 하나 이상은  내가 입어도 다소 넉넉한 품의 옷이었다. 나타에게 걸치니까, 눈에  좋은, 아니 좋지 않은 모습이 조금이나마 가려졌다.


“아...”

가죽으로 만든 옷인데다가 벗어던진 지  시간이 지나서 차가웠을 옷이  살이나 마찬가지인 속옷 위로 몸에 닿자 나타가 놀란 듯한 탄성을 내뱉었다. 옷을 입혀주기 위해 다가가 고개를 숙였던 내 귀에 정확히 내리꽂히는 탄성이었다.

머리가 얼얼했다. 나타를 보고서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면 이번에는 어퍼컷이 턱에 꽂힌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넋 놓고만 있지 않았다. 나는 나타의 몸을 최대한 보지 않도록 노력하면서, 옷의 단추까지 꼭꼭 여며가며 밖으로 보이는 살갗을 최대한 틀어막으며 속사포를 쏘아대는 것처럼 말했다.

“밤시중은 필요 없으니 돌아가도록. 그 옷은 내일 돌려주면 되니까 걱정 말고. 아, 가기 전에 불도 좀 꺼주고 가라.”

내 인생 역사상 가장 빠르게 말한 것 같았다. 그런 나를 보며, 나타가 꼼지락거리며, 내가 걸쳐준 옷을 손에 쥐고는 입을 열었다.


“허나... 베헤노스님의 취침을 돕는 것은 역시 저희들의 역할인데...”


이래서는 또 에루나 때처럼 밤새도록 고생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 사례가 있으니까 그 생각이 더더욱 그럴 듯 했다. 이래서야 자고 일어났더니 옆에 알몸의 나타가 있을 수도 있었다. 아니, 있을  했다.

“필요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너뿐만이 아니라 다른 자매들에게도 그렇게 전하도록.”


냉정하게  잘라 그렇게 말하고서, 나는 고개를 홱 돌렸다. 그러고서 속으로 열심히 멸공의 횃불을 열창했다. 머리끝까지 올라왔던 것 열기가 단숨에 식어 내려가는 것 같았다. 살아생전 도움이 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던 군가가 여기에서 활약을 할 줄이야.

“그, 그럼 불을... 꺼드리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까?”


그런 내 뒤로 나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아, 불만 끄면 되니까. 그 뒤에는 돌아가서 쉬도록.”

“...알겠습니다.”

그렇게 대답한 나타가 종종 걸음으로 나를 지나쳐가,  방을 밝히고 있던 조명을 향해 손을 뻗어, 에루나가 그랬듯이 불을 끄기 위한 주문을 읊는 것이 보였다.

한시름 놓았다. 그렇게 여겼던 내 귓가에, 훌쩍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의 정체를,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시, 실례했습니다. 그럼 돌아가 보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서 꾸벅하고 고개를 숙이는 나타의 눈가에 맺힌 눈물이, 창밖으로 들어오는 달빛에 비쳐 반짝이는 것을 봤기 때문이었다. 빠른 걸음으로 방 밖으로 나가려는 나타를 보면서, 한순간이었지만 머릿속에 많은 생각들이 스쳐지나갔다.

“잠깐만.  말이 더 있었다.”


“...네?”


내 말에 멈칫하는 나타에게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혹시나 오해가 있을까 말하는 건데, 내가 밤시중을 꺼리는 건 너희가 싫어서 그런  아니라는 것만 알아다오. 너희도 알다시피, 나는 루시아의...”

말을 하려다 말고 목에 뭔가 걸린 것처럼  단어가 잘 나오지 않았다. 나는 그런 나를 바라보는 나타를 보고는 헛기침을 하고는 말을 이었다.

“그, 반려지 않느냐? 그런 내가 아무리 시종들이라고 하더라도, 밤시중을 받는  영 꺼려져서 말이다. 응, 너희는 모르겠지만 내가 살던 곳에서는 그런 문화가 있었다. 그러니까, 결코 네가 매력적이지 않아서 거부한거라던가, 싫어서 그런 것이 아니니까 오해하지 말거라.”

“아, 네... 그 말은 즉... 제가 아니라 루시아님이었다면, 괜찮다는 말인가요?”


“괜찮다는  아니라... 아니, 응...  그런 셈이지.”

괜찮다는 것이라고 말하기엔 조금 아니었지만... 그런 내 말을 들은 나타가 스으윽, 하고 내게 다가왔다. 갑작스런 나타의 행동에 움찔, 하고 뒤로 물러나자 그런 나를 보고서, 나타가 금빛의 눈동자를 빛내며 손을 뻗는 것이 보였다.


“...금빛?”


나타의 눈동자는, 잘 기억은 안 나지만 분명 옅은 초록빛의, 막 피어난 새싹과 같은 빛깔이었다. 저렇게 선명하게, 황금빛의 눈동자는... 내가 알기로는 단 한 명뿐이었다.

띠링~ 하고, 머릿속에서 울리지도 않은 알림과 함께 위기! 위기라고! 하고 사이렌이 울리는 것 같았다. 직감적으로 무언가 잘 못 됐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이미 늦어버렸다는 것도 느껴버렸다.

“그렇다면... 나타가 아니라, 저라면 상관없다는, 그런 이야기로군요?”


프스스스, 그런 소리가 나는 것처럼, 눈앞에 나타로밖에 보이지 않았던 인물이, 내게 익숙한 여자로 바뀌어갔다.


나타의, 그녀의 눈동자를 보고서, 기시감처럼 머리에 떠올렸던 루시아로 바뀌어갔다.

어느 새인가, 완전히 루시아의 모습으로 바뀌어버린 나타... 아니, 루시아가 내 목덜미를 손가락으로 스치듯이 쓸어내리며 말했다.


“조금 장난을  생각이었는데. 의외의 결과였네요, 이지경님.”


“...루시아? 어째서?”


“평소였다면 이지경님의 처소는 에루나가 지키고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그 에루나는 오늘부터 당분간은 없잖아요?”

그걸 물어본 게 아닌데. 그런  눈길을 받은 루시아가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리고 오늘, 이지경님이 에오시스 자매를 보고서 말씀하셨잖아요? 그녀들을 보고서, 미인이라고.”


스륵, 스르륵하고 내가 입고 있던 잠옷의 단추를 끌어내리는 루시아를 보고서 몸을 움직이려고 했지만 온몸이 굳어버린 것처럼 옴짝달싹도 하지 않았다.

“한 가지 조언을 드리자면... 저희 드래곤들은 독점욕이 강하답니다. 네에, 이지경님은 조금 부당하다고 느낄지도 모르겠지만, 자신이 소개해주었을 터인 시종에게도 질투를 느낄 정도로, 저희는 독점욕이 무척 강하다고 할까요...”

루시아가 단추를 전부 끌어내리자, 드러난 가슴팍을 루시아가 어르듯이 만지며 말했다.


“그래서 조금 놀려주려고 했었죠. 이지경님은 이런 일을 꺼려한다는 걸 알고 있는 제가, 그녀들에게 밤시중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꺼라고 생각하셨던가요?”


“...내가 만약, 그, 나타로 변신한 네 말에 넘어갔으면...?”


내 말에 잠깐 멈칫하던 루시아가, 나를 올려다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어땠을 거라고 생각하나요?”


그녀의 말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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