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화 〉59화
아무튼, 논의 끝에 정해진 방침이라는 것은 각자 내게 간소화된 전이마법진이 새겨져있는 보석을 선물해주는 것이었다. 전이마법이라함은 즉, 언제 어디서라도 내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곧장 내가 있는 곳으로 전이해올 수 있도록 해두었다는 거였다. 잘은 모르겠지만, 천공성에서 요정향까지 오갔을 때 썼던 마법진의 축소판이라고 들었다. 비록 그것과는 다르게 겨우 보석에 새긴 것이라 한 번 쓰고 나면은 다시는 쓸 수 없게 된다고 했지만, 사실 만약을 위해 대비하기로 한 것이니까 그거면 충분했다.
애당초 내 이야기를 들었던 루시아가 제안했던 것과 별 다를 바 없던 것은, 그때 그 제안이 쟁쟁했던 다른 제안들을 죄다 쳐내고 일등상을 먹어서였다. 다시 이야기를 나눈 끝에, 일단은 그렇게 하는 편이 낫다고 여긴 모양이었다. 대신 크리샤의 의견대로 거기에 샤르가 제안한 것이 추가되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게 뭐냐고 물었더니 루시아가 말해주기를, 바로 내가 원할 때 언제, 어디서든 천공성으로 복귀하는 마법이었다.
요약하자면 이제부터 언제 어디서든지 내게 무슨 일이 생기면 일곱 명 중 누군가가 내 곁에 소환되고, 나는 곧장 천공성에 있는 내 방으로 귀환해서 피신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이었다. 물론, 거기에도 당연하다는 듯이 마력이 필요했고, 자고 일어나니까 루시아에게서 흡수했었던 마력의 쪼가리조차 남아있지 않은 나는 사용할 수 없는 마법들이었지만.
그것 역시 내가 처음부터 가지고 다니던, 에루나의 보석처럼 필요한 마력을 내가 아닌 내 곁에 소환된 다른 누군가가 지불하는 것으로 바꿔서 해결했다.
그렇게 정해지고 나니 루시아부터 시작해서, 각자 자신의 드레스에 장식되어 있던 보석을 하나 떼어내서 마법진을 새기더니 나에게 건네주기 시작했다. 그렇게 루시아의 금색의 보석부터, 아르카의 녹색의 보석, 크리샤의 검은 색의 보석, 카르네의 붉은 색의 보석, 샤르의 은색의 보석, 아냐와 아샤의 푸른 색의 보석. 거기에 에루나가 전에 주었던 보라색의 보석까지.
알록달록한 컬렉션이 늘어나버린 거다. 이제 에루나가 줬던 보석처럼 옷 주머니에 넣고 다니기도 뭐했다. 크리샤의 영지에서 살고 있다는 드워프에게 맡겨서 보석을 넣을 장신구를 만들어준다고 했으니까 챙기고 다니기엔 별 무리는 없겠다만... 응, 하나도 아니고 잔뜩 이니까 장신구로 만든다더라도 달고 다니기 귀찮겠다.
그래서, 이후에 어떻게 됐냐면...
“...아니, 에루나? 정말로 나 아무것도 없거든?”
나는 내 옆을 걷고 있는 에루나에게 그렇게 말했지만, 그런 내 말에 에루나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주인님을 믿습니다.”
믿음으로 해결이 되는 일이냐고 이쪽에서 묻고 싶었다.
“...뭐 좋아, 나만 좀 망신살 뻗치면 그만이니까. 그래서, 지금 어디 가는 건데?”
이제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그렇게 묻자 에루나가 대답했다.
“주인님이 깨어나는걸 기다린 것은, 아가씨들뿐만이 아니...”
“나는 저언~혀 안 기다렸거든?!”
에루나의 말에 돌연 옆에 있던 크리샤가 그렇게 말하고서 홱하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깜짝 놀랐네. 들렸으면 말 좀 하지.
아니, 들리지 않길 바라는 것도 무린가. 다과 때처럼 다들 쿠키에 정신이 팔려있는 것도 아니고, 더군다나 바로 옆에서 걷고 있으니까. 아무리 소근거린다더라도 드래곤의 귀에 들리지 않길 바라는건 욕심이였나 보다.
아무튼, 더 말하는 것도 뭐해서 얌전히 오랏줄을 받아든 죄인처럼 따라가자니, 천공성에 있는 수많은 방 중에서도, 내 침실 다음으로 커다란 방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
직접 들어가 본 적은 없었지만. 아니, 애당초 천공성은 그 이름 그대로 성이였다. 이것 말고도 많게는 수십 명이 적어도 수 명은 지낼 수 있는 크고 작은 방이 수십 개가 넘었다. 어차피 나야 여기서도 내 방에 틀어박혀서 책이나 읽으며 지냈을 뿐이니까 어딜 돌아다닌 적도 없고 말이다.
어쨌거나 막 도착한 문 앞에서 멈춰 서자, 에루나가 내 옆에 있던 마야와 니아에게 눈짓을 줬다.
“끄응~차!”
“으으~!”
에루나의 눈짓에 도도도, 문으로 다가간 마야와 니아가 귀여운 기합소리와 함께, 문을 열어젖히자, 문 너머에 있던 사람들과 눈이 마주쳤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나를 보자 무릎을 꿇는 바쿠와 바록, 그리고 스윽, 하고 대체 어느 새에 배운 건지는 몰라도 제법 멋지장하게 인사를 하는 슈슈가 보였으니 말이다. 그들 말고도 나를 보고서 우물쭈물, 고개를 숙여보이는 에오시스 자매 역시 보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제법 낯익다 못해 꿈에서라도 볼까 두려운, 나의 스승, 에네스타도 있었다.
“아, 드래곤의 반려. 몸은 좀 괜...”
반가운 얼굴로, 나와 눈이 마주친 에네스타가 그렇게 말하며 다가오다가, 이내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을 보더니 안색이 푸르게 변했다가, 시뻘개졌다가, 시꺼메지는 것이 보였다.
뭐 저렇게 당황한다냐. 한 눈에 봐도 나 당황했어요, 하는 티를 팍팍 내는 에네스타를 보니 신기했다. 저게 나를 그렇게 두들겨 패던 사람이란 말이지.
“요, 요정향의 검주, 에네스타 시오니스가 보옥의 지배자들. 드래곤들을 뵙습니다!”
쿠웅, 하는 소리가 날 정도로, 그대로 한쪽 무릎을 굽히고서 부복하는 에네스타를 보고서 나도 놀랐다. 루시아에게는 저렇게까지 한 적이 없었는데. 아니, 여기에 있는 사람 중에는 루시아도 포함되어 있기는 하다만.
“...에네스타? 당신은 이제 이지경님에게 충성을 맹세하셨지 않나요? 굳이 저희에게 예의를 갖출 필요는 없어요.”
그런 에네스타를 보고서, 루시아가 절레절레 고개를 젓고는 그렇게 말했다. 루시아의 말에 에네스타가 흘끔하고, 나와 루시아를 바라봤다가. 이내 그런 에네스타를 빤히 보고 있는 다른 드래곤들과 시선을 마주하더니 다시 안색이 시퍼래져서는 말했다.
“하, 하지만... 제가 감히...”
그런 에네스타의 시선이 멈춰선 곳, 다름 아닌 크리샤가 히죽, 하고 웃으며 말했다.
“헤에, 루시아. 통 크게 나왔는걸. 에네스타는 그래도 네가 갖추고 있는 가디언 중에서는 제법 쓸 만한 녀석 아니었어? 그걸 겨우 인간 따위한테 넘겨준 거야?”
그런 크리샤의 말에 루시아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인간 따위가 아니라 이지경님이에요. 그리고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제가 원해서 한 것이니까 그 이상은 저한테 하는 모욕으로 간주하겠어요.”
“뭐, 그러시겠지.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뻔~하니까.”
벌써 방금 먹은 쿠키의 당분이 다 떨어졌는지 으르렁거리기 시작한 루시아와 크리샤를 보고 있자니, 내 옆에 있던 에루나가 말했다.
“자, 이제 주인님의 능력을 보여주십시오.”
내가 뭘 어쩌라고.
에네스타도 있으니까 둘이서 칼춤이라도 출까? 그런 생각을 하며 에루나를 봤더니 그런 나에게 에루나가 말했다.
“어제 하셨던 대로 하시면 됩니다.”
“...어제 내가 뭘 어쨌다고?”
내 물음에 에루나가 살짝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저를 시녀장으로, 바록과 바쿠를 시종으로, 니아와 마야를 시녀로, 슈슈를 집사로, 로로를 암살자로, 주인님께서 임명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래, 그랬었지.
그러다가 로로때의 일이 떠올랐다. 좋지 않은 기억까지. 나는 무심코 에루나와 마찬가지로 내 옆에 있던 로로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내가 그러고 있자니 무슨 일이냐는 듯 나를 올려다보는 로로에게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해주고는, 계속해서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그때처럼 또 피토하는 건 아닐까 모르겠네.”
하라면 할 수야 있겠지만, 그러다가 또 그러지는 않을까 걱정됐다. 막말로 어째서 그렇게 됐는지 원인도 제대로 몰랐다. 또, 그때처럼 예의 편린이니 뭐시기니 하는 것이 튀어나온다면 난리가 날게 분명했다. 그런 내 말에 에루나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마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그러고선 빤히 나를 바라봤다. 대체 무슨 확신으로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에루나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뭐... 어차피 해야 하는 일이기도 했고.”
불안한 게 없잖아 있지만은 미뤄두기도 그랬다. 우선, 전에 생각했던 대로...
나는 한 걸음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런 나를 보고서 루시아가 걸음을 옮겨서 길을 비켜줬다. 크리샤도 어디 뭘 하는지 지켜보겠다는 듯이 순순히 길을 비켜줘서 무릎을 꿇은 채 어쩔 줄 몰라 하는 에네스타의 앞에 나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에네스타.”
에네스타의 이름을 부르자 그녀가 고개를 들어 올려 나를 바라봤다. 그나마 만만한 상대를 봐서일까 안심한 듯한 표정을 짓는 에네스타를 보고 뭔가 더 놀려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관두기로 했다.
나나 에네스타나 지금의 상황이 영 마땅치 않은 건 똑같으니까. 아무튼 갑자기 쓰러져서 걱정했을 에네스타에게 먼저 말을 꺼냈다.
“일단... 걱정하게해서 미안. 보시다시피 지금은 멀쩡해졌지만.”
"그건 다행이네만... 드래곤의 반려가 쓰러졌을 때는 다들 놀랐으니 말일세. 도중에 의식도 끝나버렸고… 드래곤의 반려가 깨어나면 재차 하기로 하고 다들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네만..."
흘끔하고 주위의 눈치를 본 에루나가 나를 쳐다봤다. 그녀의 시선에서 대체 여기에 다들 있는 이유가 뭐냐고 묻는 것이 느껴졌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내 옆에 에루나한테 물어보던가.
“자잘한 건 나중에 이야기하기로 하고. 우선 도중에 관뒀던 것부터 마무리 지어야겠지.”
“지금 말인가?”
“보여주라던데.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정말 모르니까 그건 묻지 말라고. 그런 시선으로 에네스타를 바라보자 푹, 하고 한숨을 내쉰 에네스타가 이내 가슴 위로 손을 얹고는 말했다.
“예를 갖추지 않고 의식을 결행하는 무례를 용서하소서. 나의 주. 검주 에네스타가 재차 드래곤의 반려께 충성을 맹세합니다. 저의 검을 받아주시겠습니까?”
스윽, 하고 검을 뽑아낸 에네스타가 그대로 돌려 양 손으로 받아 쥐더니 내게 내밀었다. 자신의 검을 바치는 에네스타를 보니 괜히 낯간지러웠다. 루시아와 에루나뿐이였을때는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지금은 눈이 너무 많았다. 아니, 그때도 바록이나 바쿠나, 눈이야 많기는 했지만 상황이 달랐다.
특히 우리 둘이 우습다는 듯이 쳐다보고 있는 크리샤나 재밌는 걸 보듯이 지켜보고 있는 아샤와 아냐가 있으니까 재롱이라도 부리는 것 같았다.
그래도 진지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는 에네스타를 보고서 마음을 고쳐 잡았다. 조금 부끄러워도 별 상관없는 일이었다. 방금까지 칼춤이라도 출까 생각도 했었으니까 그것보다 이쪽이 훨씬 나았다.
나는 에네스타가 건넨 검을 받고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천천히 검을 그러쥐었다가 다시 에네스타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에네스타 시오니스. 너를 나의 기사장으로 임명한다. 내게 맡긴 검을 도로 너에게 줄 터니 이 검을 받아 나에게 충성의 증거를 보여라.”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주종의 의식이었다. 지금 내가 한 것은 그것을 간단하게 한 약식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제대로 하려면 몇날 며칠을 준비해야하니까 거기까지 하기는 불가능했다. 그 사실을 에네스타 역시 알고 있기에, 그런 내 모습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제 검은 오로지 당신의 적을 베고, 그들로부터 당신을 지키기 위한 것이 될 것입니다.”
내게 도로 검을 돌려받은 에네스타가 꾸욱, 하고 검을 그러쥐고서 그렇게 말하는 순간이었다.
띠링~
['에네스타 시오니스'가 새로운 직업 '기사장'을 습득하였습니다. 직업 '기사장'은 주인이 된 자의 검들을 이끌고 나아가 싸워 주인의 명예와 힘을 증명하는 역활을 합니다. 직업 '기사장'의 효과로 '에네스타 시오니스'에게 일부 특성이 부여됩니다. 또한 플레이어 '이지경'님에 대한 충성심에 따라 일부 능력치에 보정을 받습니다. 이후 기사장을 통해 기사단을 꾸릴 수 있습니다.]
띠링~
[현재 ‘에네스타 시오니스’의 지휘력을 계산하겠습니다. 지휘력은 지력을 포함한 여러 능력치에 의해 결정됩니다. 현재 지휘력은 12입니다. ‘에네스타 시오니스’의 휘하로 12명의 기사를 배치하실 수 있습니다.]
띠링~
[플레이어 '이지경'님의 '가신'에 직별장이 새롭게 추가되었습니다. 현재 직별장에 포함되는 인물은 모두 2명입니다. 시녀장 : 에루나 투아레 기사장 : 에네스타 시오니스. 이하 직별장에 의하여 특수 기능 '명령'을 습득하셨습니다. 특수 기능 명령은 진격, 수비, 후퇴 이하 6가지의 명령어로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또한 특수 기능 '명령'을 임의의 직별장에게 넘겨주거나 변형하여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귓가에 그런 알림이 들려왔다. 불과 하루 전에도 이랬으니까 크게 다를 건 없다고 해도 좋았다. 하지만 그런 내 눈에 조금 다른 것이 보였다.
우우웅...
에네스타의 주변으로, 푸르스름한 무언가가 피어오르는 것이 말이다. 그것만이 아니라, 내게서도 그와 같은 것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나는 에네스타의 것과는 달리 푸르스름한 무언가와가 아니라 시커맸지만. 이윽고 그 둘이 교차하면서 그 색이 바뀌어가는 것이 보였다.
다름 아니라 내 오른쪽 눈으로.
그걸 보였다고 하기에도 그랬지만 말이다. 어디까지나, 희뿌옇게... 멀쩡한 왼쪽 눈에 비쳐 보인 것에 겹쳐서 보인 것이니까.
하지만, 그렇게 에네스타에게서 피어오르던 푸르스름한 것이 완전하게 색이 바뀌는 순간이었다.
띠링~
[플레이어 ‘이지경’님의 칭호 ‘부덕의 군주’에 의해 가신 ‘에네스타 시오니스’의 정보가 일부 개변되었습니다. 이미 습득한 ‘군주’의 칭호에 의하여 가신 ‘에네스타 시오니스’의 충성도가 50만큼 상승했습니다.]
그 알림소리가 나를 황당하게 만든 건 당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