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화 〉60화
아니, 기껏 로로에게서 ‘부덕의 아이’라는 걸 떼어낸 지가 얼마나 됐다고 이번에는 부덕의 군주가지고 또 부덕 타령이냐고,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 뒤이어 들려온 충성도가 올라갔다는 소리에 어이가 없었던 것이었다. 순간 황당해서 말이 안 나왔다.
“나의 주,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
그리고 그런 나를 보고서, 방금 막 나에게 기사장으로 임명된 에네스타가 그렇게 물었다. 겉보기에는 평소의 에네스타와 마찬가지로만 보였지만, 벌써부터 다른 것이 하나 있었다.
호칭이였다.
아무리 편하게 부르라고 이야기해도, 기어코 바뀌지 않았던 드래곤의 반려에서 나의 주라는 오글거리다 못해 근질거리는 호칭으로 바뀐 것이었다.
방금은 의식 차에서 그렇다 칠 수도 있다지만, 이건 아니었다.
그리고 그 이유도 알 수 있었다.
이 빌어먹을 ‘군주’ 때문이었다. 어젯밤에 내가 얻어버린 ‘군주’가 붙어있는 칭호, 부덕의 군주 말이다.
라이프에서도 이것과 같은 칭호가 몇 개 있었다. 예를 들어서, 무슨 지배자, 어디의 왕, 이딴 식의 칭호를 가진 NPC가 있기는 있었다.
그리고 그런 칭호의 효과는 어마어마한 것들이었다. 바로 휘하에 있는 부하들이나, 같은 클랜이나 동맹 따위들에게 알아서 이런저런 버프를 부여하거나 복종하게 만드는 힘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게임의 밸런스상 그런 것도 있을 뿐이었다. 자유도가 원체 높은 라이프라는 게임의 특성 탓에 매력만 잔뜩 높인 플레이어의 캐릭터가 초장부터 게임의 시나리오상 중요한 인물을 꼬시거나 하는 일을 막기 위해서, 몇몇 NPC만이 가지고 있는 특권 같은 칭호였다. 덕분에 플레이어들은 그 같은 루니 플레이를 할 수 없었다. 아니, 할 수는 있기야 했지만 수지가 안 맞으니 안하는 게 나았다.
그런데 부덕의 군주 역시 그런 칭호와 같은 효과를 지니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효과는, 칭호에서는 볼 수 없었지만 지금의 상황을 미루어볼 때 내 휘하에 든, 즉 가신이 된 자들에게 충성도를 어마어마하게 부여하는 효과가 말이다.
이건 반칙이었다!
아니, 애당초 호감도를 50이나 부여하는 가신부터가 반칙이기는 했지만, 충성도는 그것과 별개였다. 호감도야 막말로 어떻게든 올릴 수야 있다 쳐도 충성도는 내가 클랜원들에게, 아니 이 경우에는 가신들에게 가주로써 위엄이나, 업적을 보여야지 간신히 1, 2가 오를까 말까하는 거였으니까. 그만큼 충성도가 주는 효과도 꽤나 대단하고.
그런걸 단숨에 50이나 올려주다니. 그런건 밸붕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니지, 밸붕이 아니였다. 밸붕이란 단어는 게임에서나 쓰는 거지 현실에서 쓰는 단어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건 현실이었다.
현실인데도 이따위 호칭 하나로 사람의 감정이란 것이 지 멋대로 바뀐 것이다. 빌어 처먹을 욕이 안 나올 리가 없었다. 가신 때도 그랬다. 그렇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호감도에 작용하는 것이었다. 막말로 호감도가 100이 아닌 이상은 그 사람이 나 때문에 죽기까지나 할까. 하지만 충성도는 예외였다.
“혹시 어제의 일 때문에 아직도 몸이 편치 않은 건가?”
걱정스레 그렇게 물어오는 에네스타를 보고서 나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리고서,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듯이 서있는 에루나를 보고서, 어째서 에루나가 그렇게 확신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하룻밤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생겼는지 군기가 바짝 들어있는 바록이나 바쿠, 그리고 별안간 진짜 집사라도 된 것 마냥 굴던 슈슈가 어째서 저렇게 됐는지도 이해할 수 있었다.
충성도가 오른 탓이리라. 내가 뻗어있느라 전혀 알지도 못한 사이에, 지 멋대로 부덕의 군주라는 칭호 하나만으로 죄다 충성도가 천장을 뚫고 치솟은 거였다. 아니, 천장은 최대치인 100. 에루나와 같은 수치를 기록해야하는 거지만, 50만으로도 간이고 쓸개고 다 바칠 기세로 충성할 테니 이미 천장이었다.
처음부터 100을 찍은 에루나가 이상한 거라고.
일어나니까 별안간 마야와 니아, 그리고 로로가 알몸으로 내 침실에 있던 것도 퍽이나 이해가 갔다. 호감도 50이야 아무리 해봤자 연인 이하의 관계다. 그런데도 알몸으로 남정네의 침대에 기어오를 여자가 세상에 몇이나 있을까. 그런데 여기에서 충성도까지 기여한다면?
남녀의 정은 둘째치더라도 신하나 하인으로써의 다른 것까지 작용하면 모를 일 인거다. 거기에 에루나의 꾐까지 끼어들어간다면 말할 여지도 없고.
“주인님, 남은 에오시스 자매들에게도 직무를 맡기셔야 하지 않습니까?”
“내가 미쳤냐?”
스윽, 하고 내게 다가와서 그렇게 말하는 에루나에게 그렇게 대답했다.
그 말대로 이건 미친 짓이나 다름없었다. 몰랐을 때야 그렇다 쳐도 알아버린 이상 함부로 옛다, 하고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이게 세뇌나 똑같으면 똑같지 다른 게 뭐가 있냐고.
“둘이서 뭘 그리 숙덕거리는 건데?”
그렇게 말하며 크리샤가 내게 다가왔을 때였다.
스릉, 하는 소리와 함께 에네스타가 들고 있던 검을 뽑는 소리가 들려왔다. 거의 동시라고 할 수 있을 만큼, 크리샤 역시 표정을 굳히고는 두 눈을 커다랗게 떴다.
“뭐야? 지금 나한테 검을 뽑으려 든 거야?”
그렇게 말하는 크리샤의 눈이 세로로 갈라지는 것이 보였다. 짐승의 눈. 단 한 번, 루시아에게서 봤던 그 눈이었다. 동시에 검은 그림자들이 크리샤의 어깻죽지부터 뻗어 나왔다. 그림자들이 크르르, 하고 포효하듯이 당장에라도 에네스타에게 달려들 듯 요동쳤다.
“멈춰! 에네스타.”
내 외침에, 뽑혀 나왔던 검을 다시 검집에 집어넣은 에네스타가 내게 고개를 숙이고는 말했다.
“...알겠습니다. 나의 주.”
사람이 바뀌었다. 전적으로, 무언가가 바뀌었다. 방금까지 벌벌 떨던 에네스타는 어디로 간 거냐고 묻고 싶었다.
위험하다. 이건 위험하다고, 머릿속에서 경종이 울려댔다.
울려대기는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에네스타만이 아니었다. 아직 열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는 숫자기는 했지만, 한 명만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근데 어떻게 해야 할지 감도 안 잡혔다.
“...에루나의 말 대로네. 과연, 이 모습을 보면 걱정할 필요 없겠어. 그 낙시안 녀석들도, 전부 이런걸 했다 이거지?”
에네스타가 검을 집어넣자, 크리샤 역시 뻗어 나왔던 그림자들을 갈무리하고는 그렇게 말했다. 그러고서는 내게 다가와서, 내 뺨을 간지럽히듯 손가락을 놀리며 말했다.
“제법이잖아. 바보 같은 소리나 하던 것치고는. 응, 제법인걸.”
꾸욱, 내 뺨을 크리샤의 손가락이 눌렀다. 날카롭게 선 손톱이 그대로 후벼 파는 게 아닐까 싶었지만, 다행히 그럴 일은 없었다.
“크리샤 아가씨.”
“알아~ 나도 알고 있다고. 일단, 지금은 이 인간이 무~지 중요한 인간인 것쯤은...”
에루나의 말에 그렇게 말하고서 물러난 크리샤가 양 손을 펴 보이며 말했다. 항복이라는 듯이, 양 손을 설레설레 흔드는 크리샤의 모습에 안도했다. 다행히 에네스타가 보인 행동을 넘어가 주려나보다, 그렇게 생각했다.
꾸물거리듯이, 크리샤의 손끝에서부터 거뭇한 마력이 보이기 전까지는.
띠링~
[플레이어 ‘이지경’님이 기능 ‘즉각 반응’을 발동합니다.]
“하지만 너는 아니지.”
중얼거리듯이, 크리샤의 말과 함께 그녀의 손에서 무언가가 뻗쳐 나오는 것이 보였다.
콰악!
‘즉각 반응’이 발동했다는 알림 소리와 함께 크리샤의 손목을 붙잡았다. 나도 모르게 붙잡고 본 크리샤의 손끝에서부터 파열음과 함께 무언가가 쏘아져나갔다. 에네스타의 바로 옆으로. 스쳐지나가듯이 지나간 검은 그림자로 이루어진 칼날이 갈가리 찢듯이 주위를 난자했다.
그와 동시에 크리샤의 주위로 모여든 루시아를 비롯한 나머지 드래곤들이 그런 크리샤에게 손을 뻗었다.
“크리샤! 움직이지 마세요.”
“이야~ 어째 불안하다 싶었는데~ 결국 사고 쳤네~?”
“...실수. 미리 막을 수도 있었는데...”
당장에라도, 마법을 발동하려는 듯 마력을 피어 올리는 루시아와 아르카, 그리고 샤르가 그렇게 말했다. 그런 그녀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어깨를 으쓱인 크리샤가 나를 바라봤다.
“...용케 알아차렸네?”
손목을 붙잡힌 크리샤가 그렇게 이죽거렸다. 크리샤의 말 대로였다. 용케도 막았다. 아니, 막았다기보단 겨우 방향을 튼 정도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그것마저도 순전히 우연이었던 것이다. 꿈틀거리듯이, 크리샤의 안에서 움직이던 마력이 보이지 않았더라면, 그것에 ‘즉각 반응’이 발동하지 않았더라면.
방금 전의 그건, 그대로 에네스타를 맞췄을 게 분명했다.
에네스타 역시, 나보다 뒤늦게 반응해놓고서 검을 뽑아들고서 곧바로 방어 자세를 취했지만 방금 전의 그게 막는다고 막아졌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한순간에 휑하니, 방에 구멍이 뚫렸으니까.
그 뚫렸다는 것이, 단순히 구멍이 좀 난 것이었다면 이렇게까지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쉽게 풀릴 일이 아니었다.
천공성.
그 이름 그대로, 천공에 위치한 성. 하늘을 날아다니는, 마법으로 만들어진 성이었다. 즉, 천공성의 바로 밖은, 하늘이라는 것이 됐다.
휑하니 뚫린 구멍 너머로, 그 하늘이 보이고 있었다.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족히 수십 겹으로 이루어진 벽을 꿰뚫고서, 그대로 구멍을 내버렸다. 그냥 낸 것도 아니고 사람 한두 명은 거뜬히 통과할 만큼 커다란 구멍을 말이다.
고치는데도 장난이 아닐게 분명했지만, 그딴 것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방을 이 꼴로 만든걸, 다름 아니라 에네스타에게 쏘아 보내려고 했던 거니까. 아무리 검주인 에네스타라고 해도 이런걸 맞아서 멀쩡했을까? 장담할 수 없었다.
“크리샤...”
“그렇게 쳐다보지 말라고? 방에 구멍을 낸 건 뭐, 미안하다고 생각은 하고 있어. 하지만 반쯤은 네 탓이니까 말이지. 제대로 맞췄더라면 이런 일도 없었을 테고.”
그리고 그렇게 말하는 크리샤의 말을 듣는 순간이었다. 나도 모르게 손이 들어 올려졌다.
짜악!
귓가에 날카롭게 들려온 소리와 함께, 옆으로 고개가 젖혀진 크리샤의 얼굴이 보였다. 그리고 그 옆에서 팔랑팔랑, 붉게 달아오르고 있는 손바닥을 흔들고 있는 에루나의 모습도. 귀에 들려온 소리에, 순간 저질러버렸다고 생각했었는데 아무래도 그건 아니었나보다.
“실례했습니다. 크리샤 아가씨. 아직까지 저는 아가씨들의 교육을 담당하는 입장이기에.”
그렇게 말하고서 자그맣게 고개를 숙여보이는 에루나의 모습을 보고서, 크리샤가 느릿하게 손을 들어 올려서 그제야 발갛게 물들기 시작하는 뺨에 가져다댔다.
“...나, 나를 때렸어? 에루나가...?”
더듬더듬,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에루나에게 맞은 뺨을 만지던 크리샤가 표독스럽게 나를 쳐다보더니, 이내 내가 잡고 있던 손을 뿌리치고는 몸을 돌렸다.
그러고선 방금 막 자신의 손으로 뚫어버린 구멍으로 훌쩍 뛰어내렸다.
"크리샤!"
뒤늦게 그런 크리샤를 쫓았지만, 그런 내 눈에 보인 것은 검은 피막으로 이루어진 날개를 펼쳐 보이는 크리샤의 뒷모습이었다.
촤아악!
크게 날개를 휘두른 크리샤가 흘끗 나를 돌아다보더니 중얼거렸다. 벌써 저만치에 떨어져있는 크리샤였는데. 어째서인지 그녀가 뭐라고 중얼거리는지 바로 귀에 속삭이는 것처럼, 알아들을 수 있었다.
"...인간 따위가."
그렇게 말하고서, 다시 뒤도 돌아보지 않고서 날개를 휘두르며 날아가는 크리샤를, 나는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