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화 〉65화 [고결한 대지]
슈페리아라는 오랜 이름을 갖고 있는 이 땅에 테 베르나, 드워프들의 마을이 자리 잡은 지 수백 년이란 시간이 지났다. 그리고 그들과 인간들이 본격적으로 거래를 시작한 것은 백년이 훌쩍 지난 과거의 일이었다. 하지만 처음인 것이다. 백년이란 시간을 통틀어서, 드워프들의 마을이 인간 상인을 위해 문을 열고, 그들의 상단을 안으로 들인 것이 말이다.
작은 상단을 이끌고서, 그 내로라하는 상단들을 포함해서, 수많은 경쟁자들과 물밑으로, 혹은 물위에서 드워프들과의 거래라는 기득권을 쥐기 위해 경쟁하고, 승리한 것이 바론이었다.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작은 상단을 이끌고, 지금처럼 나름대로 이름 있는 상단을 일꾼 것 역시 바론이었다. 결코 무능하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바론의 머릿속에는 처음으로 드워프들의 마을에 진입했다는 명예를, 어떻게 써먹으면 좋을지를 생각하고 있었다.
단순히 처음으로 테 베르나의 문을 열고, 그 안에서 드워프의 장로를 만났다는 사실만으로도 천금의 가치가 있었다. 앞으로 바론에게 따라붙을, 최초로 드워프들의 마을 안으로 들어간 인간이라는 이름. 그 이름만으로 바론의 상단과 거래를 트기 위해 움직이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이용하는 것에 따라서, 어떻게 잘만하면 자신이 이끄는 상단을 라이어스 제국에서도 손에 꼽을만한 상단으로 만들 수도 있겠다 싶으니 바론의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하지만 바론은 상인이었다. 그리고 유능했다. 바론은 스스로, 자신의 가치가 생각보다 대단치 않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수많은 경쟁자들과 겨루어 이겼다고는 했지만, 바론이 따낸 기득권이라 함은 드워프들과 불과 몇 십 점의 무구와, 그 가치와 엇비슷한 양의 식량을 교환하는 것뿐이니 말이다.
오늘도 그랬다. 바론이 가져온 것은 약 천 여명의 드워프들이 당분간 먹을 수 있을 만큼의 식료와, 소금뿐이었다. 언제나와 마찬가지인 양에 불과한 식료뿐이란 것이었다. 그런데 오늘, 돌연 문을 열고 이렇게 환영한다? 보통은 젊은 드워프들이 테 베르나의 밖까지 들고 온 무구들과 바론이 가져온 식료를 교환하고서, 서로 헤어지는 것이 전부인데, 테 베르나의 장로라는 레무르까지 나왔으니 인간으로 치면 일개 상인을 맞이하기 위해, 그 땅의 영주가 나온 셈이었다.
이걸 환영이라고 부르지 않으면 대체 뭐라고 부를 수 있을까. 하지만 자신에게 변한 것이 하나도 없는데, 갑작스런 환영을 받는 것은 역시나 꺼려졌다. 만약 바론의 눈앞에 선 것이 드워프가 아니라, 정말로 인간들의 땅에 사는, 인간들의 지배자인 영주 같은 것이였다면 당장 줄행랑을 쳤으리라.
돈도 돈이지만, 목숨만큼 중요한 것은 없으니 말이다. 다만, 다행스럽게도 바론의 눈앞에 선 것은 드워프였다. 바론 역시 인간이기는 했지만, 바론이 생각하기에는 인간보다는 드워프가 훨씬 믿고 거래할 수 있는 존재였다.
그렇기에 바론은 조금 미심쩍은 부분은 넘어가기로 했다. 물론 경계를 하는 것은 잊지 않았지만 그걸 겉으로 티내지는 않았다. 무슨 이유가 있던 간에, 자신이 테 베르나에 들어오게 된 것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상인이란 것은 따라서는 목숨의 위험쯤이야 얼마든지 감수하고서 돈이 되는 일을 하는 족속이었다.
“이야기를 돌리죠. 거래를 계속해야하지 않습니까?”
“흠. 그도 그렇지. 어디 자네가 가져온 것들을 한 번 봄세.”
그렇기에 바론은 철저하게 자신의 표정을 꾸몄다. 테 베르나에 들어오게 되어 못내 기쁜 것을 감추지 못하는 어리숙한 상인의 얼굴로. 그리고서, 조금이라도 이득이 되는 것을 찾는 듯이, 레무르의 표정을 살펴봤다.
욕심으로 가득한 인간인 것처럼 자신을 꾸민 것이었다. 보통, 이런 식으로 상대에게 자신을 얕잡아보이게 하거나, 안좋은 감정을 가지게 할 수도 있는 짓은 안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인간과 인간의 거래일 때만 그런 것이었다.
인간은 욕심이 많은 인간을 신뢰하지 않지만, 인간이 아닌 다른 종족들은 욕심이 많은 인간을 그렇지 않은 인간보다 신뢰했다. 그들이 보기에는 그런 인간에게는 그만큼의 가치가 되는 것들을 쥐어주면 만족하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었다.
드워프와 거래의 물꼬를 튼지도 어언 10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오늘처럼 바론이 직접 상단을 이끈 적은 몇 번 없지만, 그동안 드워프들의 습성이 어떤지 알아두지 않을 정도로 멍청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굳이 탐욕적인, 하지만 욕심으로 인해 거위의 배를 가를 정도로 냉정한 인간이 아니라, 조금은 어리숙하고 바보 같은 척을 한 것이다. 아, 이 녀석 돈 좀 쥐어주면 뭐든 하겠구나, 하고 여길 수 있게.
대체 무슨 연유로 자신을 여기까지 들인 것인지 전혀 모르니까, 드워프들이 무슨 일을 부탁하더라도 자신이 그걸 받아들일 것이라는 것을, 말을 대신해서 표현한 셈이었다.
아무리 레무르가 백 수십 년을 산 드워프라고 할지라도, 그런 바론의 표정을 꿰뚫고, 그의 마음을 눈치 챌 수는 없었다. 그저 바론의 뜻대로, 저 인간이라면 일을 그르치지는 않겠구나 여기게 한 정도였다.
레무르는 바론이 가져온 마차 수십 대 분량의 식료들을 보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레무르가 눈짓을 주자, 젊은 드워프들이 이내 미리 준비해두었던 무구들을 가져왔다.
철커럭, 금속끼리 부딪히며 나는 소리를 내며 드워프들이 들고 온 무구들을 본 바론은 화색이 되었다.
바론이 수많은 경쟁자들과, 말 그대로 금화를 무기로 겨루어 테 베르나와의 거래를 위한 권리를 얻기 위해 노력한 것이, 바로 저 무구들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바론과 드워프들의 거래란 앞서 말했던 대로, 바론이 가져온 식료와 드워프들의 무구를 맞교환하는 것이었다. 동일한 가치로. 하지만 이 동일한 가치란 것은 어디까지나 드워프들의 생각이었다.
바론이 가져온 식료들을 전부 합쳐도, 사실상 드워프들이 내준 검 한 자루, 갑옷 한 벌도 살까 말까한 것이었다. 그만큼 드워프들이 만들어낸 무기와 갑옷의 가치는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그런데 드워프들이 보기에, 바론이 가져온 식료의 가격으로 책정한 것은 무려 검 네 자루와 갑옷 세 벌이었다. 거진 일곱 배, 거의 열 배에 가까운 이득을 본 셈이었다.
하지만 아직 너무 기쁜 티를 내면 안된다. 그리고 이쯤 가서는 적당히 욕심도 있지만 적당히 주제를 아는 모습도 보여줘야 했다. 바론은 기쁜 티를 내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처럼 입꼬리를 꿈틀거렸다.
그런 바론의 표정을 본 레무르는 내심 안도했다. 인간의 상인이 만족한 듯 했기 때문이었다. 숨기려고 들기는 했지만, 입꼬리가 부들거리는 것이 보이니. 물론, 그건 바론이 꾸민 표정이기는 했지만 레무르는 감쪽같이 속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저 정도면, 부탁 하나 쯤은 어련히 들어주겠거니, 하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바로 말하기는 그러니 밑밥을 깔기로 했다. 레무르 역시 테 베르나의 장로가 된 지도 어언 수십 년이었다. 정치와는 거리가 먼 것이 드워프들의 삶이었지만, 나름 정치를 하며 살다보니 어느 정도 눈치와 어느 정도 술수는 부릴 수 있게 되었다.
그렇기에 뭐든 부탁하기에 앞서 밑밥을 뿌려둬야하는 것정도는 알고 있었다.
“가격은 여느 때처럼 이것들로 대신 할 셈이네만, 괜찮겠나?”
“저희들이야 드워프분들의 결정을 언제나 존중할 뿐입니다.”
고개를 숙이며, 그렇게 말하는 바론에게 레무르는 큼, 하고 헛기침을 하고는 콧수염을 쓰다듬었다.
“자네와 우리가 거래한지도 벌써...”
막상 말을 꺼내려들었던 레무르는 말을 흐렸다. 막말로 그가 거래를 하는 상단에 대해 아는 게 얼마나 될까. 거래를 담당하는 것은 그가 아니라 젊은 드워프들이었다. 더군다나 십수 개가 넘는 상단들과 각자 언제부터 거래했는지 알턱이 없었다.
그런 레무르를 본 바론은 눈치 있게 넙죽, 더욱 고개를 깊이 숙여보이며 말했다.
“저희가 드워프분들께 도움을 받은 지도 벌써 10년이나 흘렀군요. 세월이란 것이 참... 돌이켜보니 감개무량합니다.”
“그래, 그래. 10년이나 지났지. 그간 일도 있고 해서, 평소보다 조금 더 값을 쳐주었네만. 어떤가?”
레무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바론은 뻔히 들여다보였다. 바론은 막 걸음마를 뗄 적부터 아버지의 상단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접했고,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그 자리를, 상단을 물려받은 뒤로 온갖 경험을 쌓은 이였다.
그렇기에 바론은 생각했다. 대체 무슨 부탁을 하려고 저렇게 생색을 내는지, 그렇다면 대체 어떤걸 뜯어낼 수 있을지. 바론의 머리가 팽팽하게 돌아갔다. 어떻게 보면 이건 기회였다. 일확천금, 아니 이미 천금을 벌었으니 만금의 기회.
“혹, 저희에게 부탁하실 것이 있으십니까?”
이쯤에서는 적당히 유능하다는 티도 내야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바론은 레무르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듯, 먼저 그렇게 말했다. 바론의 말에 레무르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헛기침을 했다.
“흐흠... 부탁이랄 것은 아니네만. 우리끼리 결정하기 힘든 것이 있어서 말일세. 일단 자네도 보는 것이 좋겠구먼. 자, 따라오게.”
그렇게 말하고서 앞장 서 걸어가는 레무르를 바론이 따라갔다. 바론을 따라온 상단의 호위들이 그런 바론에게 따라붙으려고 했지만 이를 바론은 부득불 말렸다. 대체 드워프들이 자신에게 무엇을 부탁하려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혹시라도 다른 이들에게 보여서 좋을 것이 없는 것일지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호위들은 믿을만한 자들을 뽑기는 했지만, 그래도 욕심이란 것이 있으니 혹시 모를 일을 굳이 끌어들일 바보는 아니었다.
“자, 여기일세.”
그렇게, 바론이 레무르를 따라온 곳은, 작은 집이 있는 곳이었다. 주변의 다른 집과 비교해도 별 차이가 없는, 키가 작은 드워프들이 사는 집이기에 비교적 작은 집.
“여기에 대체 뭐가 있다는 말입니까?”
고개를 갸웃한 바론이 그렇게 말했다. 속으로 대체 뭘 보여주려고 저러나 온갖 고민을 했던 바론이였기에, 평범한 집으로밖에는 보이지 않는 곳에 도착하고나니 의문이 생긴 것이었다.
“안으로 들어가면 알 수 있네.”
그런 바론에게, 토는 달지 말고 어서 들어가라는 듯이 등을 떠민 레무르 덕분에 바론은 엉거주춤,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집 밖에서 난 소리에 크리샤네아는 옷매무새를 고치고는, 드워프들이 준비해준 침대 위에 얌전히 몸을 눕히고는 두 눈을 감았다. 방 안에 대뜸 침대만 있고, 거기에 누워있는 꼴이었지만 크리샤네아는 그런 것에 대해 별 걱정은 하지 않았다.
어차피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은 유희를 내는 기분만 내는 것이었다. 약간 연기를 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길게는 인간의 수명이 다할만한 시간. 백년간을 유희에 갖다 바치는 것이 드래곤인 것을 생각하면, 자신이 하려는 것은 고작 놀이에 불과했다.
하루 이틀 정도, 인간을 근처에서 구경하기 위한 것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 것치고는 공을 꽤 들였지만 말이다. 조금 허술한 것은, 부자연스럽게 집 한 가운데에 대뜸 있는 침대일 뿐, 크리샤네아가 입고 있는 옷은 새로 꺼낸 나들이 옷이었고, 꽤 고급스러운 장신구도 몇 개인가 착용하고 있었다.
크리샤네아가 이번에 잡은 유희... 아니, 놀이의 설정이 운이 나쁘게도, 드워프들의 마을 근처를 지나가던 귀족가의 여식이 호위를 잃고 홀로 떨어졌다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인간들에 대한 지식은 있지만, 경험이라고는 없는 크리샤네아였기에 거기에 그 탓에 기억을 잃고 백치가 되었다는 것까지 추가했다.
일부로 백치인 척 한다는 것은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이것도 나름 재미있겠거니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침대에 누워 잠에 든 척을 하던 크리샤네아는 이내 문을 열고 들어오는 기척에 흘끔, 눈을 떴다.
그런 크리샤네아의 눈에 당황한 얼굴에 바론이 비쳐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