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화 〉66화 [고결한 대지]
인기척에 깨기라도 한 걸까. 천천히 눈을 뜨고서, 자신을 바라보는 소녀. 크리샤네아를 본 바론은 심장이 두근거렸다. 마치 밤하늘을 그대로 가둬둔 것처럼. 검은 눈동자가 별빛처럼 반짝였다. 이를 본 바론의 심장이 미칠 듯이 뛰기 시작한 것이었다. 하지만 요동치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바론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속으로 나지막이, 가문의 가훈을 읊었다. 냉정은 수천 금에 견줄 지어다. 속으로 가문의 금언을 외운 바론은 빠르게 냉정을 되찾았다.
어린 아이 시절부터, 훈련하다시피 읊어온 금언은 차가운 냉수를 머리 위에 들이부은 듯, 달아오르던 바론의 이성을 식혔다. 이윽고 잦아드는 자신의 심장소리를 들으며 바론은 쓴웃음을 지었다.
자신이 어떻게 됐던 모양이었다. 눈앞의 소녀는, 바론의 인생을 통틀어서도 본적이 없을 만큼 빼어난 미모를 갖고 있었지만, 그래봤자 어린 소녀였던 것이다.
때때로 어린 소녀들에게만 성욕을 느낀다는 변태들의 이야기야, 물론 바론도 들어본 적은 있었다. 하지만 바론에게는 그런 취미는 없었다. 그런데 한순간이라지만, 음심이 동했던 스스로가 한심스럽다고 생각했다. 물론 십년, 아니 적어도 수년 뒤라면... 이야기가 달라졌을지도 모르겠지만.
“...크흠, 레무르 장로님. 이 소녀를 저에게 보여주시는 까닭이 대체... 게다가, 이 소녀는 인간이 아닙니까?”
그리 멀지 않은 미래를, 수년 뒤에 성장했을 모습의 소녀를 떠올렸던 바론은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지워버리려는 듯, 헛기침을 하고는 레무르에게 그렇게 물었다.
그런 바론의 말에 레무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고개를 모로 꺾었다.
뭐라고 하라 하셨더라, 워낙 급하게 머릿속에 때려 넣은지라 제대로 기억이 나질 않는 것을, 레무르는 기억을 더듬어가며 말했다.
“실은, 자네가 오기 얼마 전에... 이 근처를 지나가던 인간들이 있었다네.”
“이 근처를 말입니까?”
레무르의 말에 바론은 의아했다. 이 험지를 드워프들과 거래를 하는 상인이 아닌 이상은 누가 올까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바론의 당연한 의구심을, 레무르가 못 알아차렸을 리가 없었다. 레무르는 그런 바론에게 툭, 하니 말했다.
“아아, 자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고 있네. 그들도 일부로 여기까지 들어온 게 아닐 테니 말일세.”
“그 말은...?”
일부로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니다. 그 말에 바론이 떠올린 것은 한 가지였다.
“그래, 몬스터들에게 쫓기고 있었네.”
몬스터.
그것은 마력을 몸에 품고, 그것을 자신의 힘으로써 다루는 마수들이나, 혹은 머나먼 과거, 마계에서 올라온 괴물들의 후손들. 그것도 아니면 또 머나먼 과거에서 만들어졌던 마도생물들을 아우르는 총칭이었다.
세세하게 구분하면 워낙 복잡해서 말로 이루기도 힘들었지만, 간단하게 표현하자면 인간을 비롯해서, 지성과 이성을 갖고 있는 종족 외의 것들을 부르는 말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런 몬스터들의 대부분의 특징은 이랬다. 태어날 때부터 본능적으로 자신 외의 다른 생물들, 종족들에 적의를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설령 같은 종족이라 하더라도, 일부 종족을 제외한 몬스터들은 개인 외에는 모두가 적이라는 듯이 투쟁을 업으로 삼았다.
레무르의 말과, 홀로 침대 위에서 멍하니 있는 소녀, 크리샤네아를 본 바론은 대충 소녀가 어떤 일로 이곳까지 오게 된 것인지 알 수 있었다.
"허면… 이 소녀가 그, 이곳을 지나가던 인간들의 일행 중 한 명이었다는 이야기입니까?"
바론의 물음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레무르가 말했다.
"내, 설명해줌세. 그러니까… 일주일 전이었나?"
자신의 말이, 정확히는 크리샤네아가 레무르에게 그렇게 이르라고 했던 말이 바론에게 통한 듯 보이자 레무르는 쐐기를 박듯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 이야기란 예의, 크리샤네아가 계획한 유희가 아닌 유희의 일장의 설정이었다.
약 30분에 걸쳐진 장대한 레무르의 설명을 들은 바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가엽게도...”
인간으로써, 몬스터에게 쫓겨 이 험지까지 몰린 끝에, 홀로 살아남았다는 소녀를 바론은 동정했다.
하지만 상인으로써의 바론은 달랐다.
바론은 소녀를 보고서, 가엽다고 말하면서도 그 눈은 냉정히 그녀의 옷차림을 살펴보고 있었다.
‘은사, 그것도 순은으로 된 허리띠인가. 게다가 세공은 드워프의 것이고...’
제일 먼저 살펴본 것은, 그녀의 허리춤에 있는 허리띠였다. 소녀라고는 했지만, 그녀 또한 여성이었다. 여성이 자신의 외모를, 몸을 꾸미는 것은 나이가 어리고 아니고를 따지지 않는 법이었다. 특히나, 어느 정도 부를 갖춘 이들이라면... 타인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오기 마련인 외견을 위해서라도, 자신을 꾸미는 것에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무릇 많은 책에서는, 외견은 하잘 것 없고 중요한 것은 마음이니 뭐니 하는 이야기들을 열설하고는 하지만, 세상이란 그렇게 이상적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님을, 상인인 바론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실제로 지금의 바론도, 겸소하고 재물을 아끼는 성격과는 달리 외견만큼은, 그러니까 옷차림에서만큼은 꽤나 많은 공을 들이고 있기 때문이었다.
상단을 이끄는 장으로써 젊다싶은 얼굴에는 공을 들여 기른 수염으로 위엄을 더하고, 윗몸에 걸친 조끼는 최상급의 곰 가죽으로 만든 것들이었다.
남들에게 보여주지 않는 것들, 예를 들어 개인적으로 사용하는 식기 따위에는 금화 한 장도 아끼는 바론이였지만 이런 것에는 수백 금을 아끼지 않았다.
그만큼 외견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막말로, 거래를 하고자하는 상대가 거지꼴을 하고 있으면 대체 누가 신뢰를 주고, 그와 거래를 할 수 있을까. 당연한 이치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론 역시, 소녀의 외견을 가장 먼저 살펴 본 것이었다. 빼어난 외모의 소녀를 보고서 덕분에 혼이 빠질 뻔했지만. 냉정을 되찾은 바론은 천천히, 소녀에게서 살펴볼 수 있는 것들을 조목조목 따져봤다.
그런 바론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은사로 된 허리띠는 누가 보더라도 명품이라고 할 만한 것이었다. 애초에 은사란 것을 뽑아낼 수 있는 장인의 수는 무척이나 적었다. 거기에 곁들여진 보석 장식들은 드워프가 세공한 듯한 물건... 어쩌면 은사 자체도, 드워프가 뽑아낸 것일지도 몰랐다.
드워프가 뽑아낸 은사만으로도 어마어마한 가치를 지녔다. 거기에 큼지막한 보석에 세밀한 세공까지 마쳐진 허리띠라. 그 가격이 어머어마할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것은 그런 것을 몸에 걸치고 있는 소녀의 역시, 그에 걸맞은 존재라는 의미였다.
‘아무리 많은 부를 갖춘 상인이라도 저런 것들을 딸에게 줄 리는 없다. 필시 저 소녀 역시 귀족이겠지.’
허리띠뿐만이 아니었다. 소녀의 가느다란 목에 둘러있는 목걸이며, 반지며, 무엇하나 고급품, 그것도 초호화의 물건들이었다. 아마 저것들을 사려고 한다면... 아마 바론이 오늘 벌어들인 걸로는 택도 없을 것이 분명했다.
‘백작, 아니... 후작가의 여식일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그보다 높은 자들... 하지만, 왕족은 아닐 터.’
라이어스 제국의 왕족들은, 정확히는 직계의 왕족들은 그들을 구별할만한 특징이 있었다. 하지만, 소녀에게서는 그런 특징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다면 직계왕족은 아니란 것이다. 다만, 저런 장신구들을 갖추고 있는 것을 보면 낮은 가문의 여식이라는 것도 아니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따지고 보자면 의아스러운 점이 한 둘이 아니었다. 제일 먼저 든 의구심은, 그런 신분의 여식이 이곳까지 왔다는 것이었다. 하물며 몬스터에게 쫓겼다고 할지라도.
애당초 그 정도의 가문이라면, 몬스터 한두 마리에게 쫓길만한 일을 없을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굳이 위험한 성벽의 밖으로 나올 일도 없을 테고.
거기에, 소녀의 외모가 문제였다. 그녀처럼 빼어난 미모를 가진 귀족가의 여식이라면, 바론이라도 소문정도는 들어봤을 것이 분명하니까.
‘그렇다면 일부로 감춰진 채 길러진 걸까? 아니지, 그렇다면 어째서 굳이 이곳까지...’
바론은 머릿속으로 빠르게 계산했다. 소녀를 귀족, 그것도 고위의 귀족의 여식이라는 것을 가정했을 때의 일을 말이다. 거기에 몇 가지 단서가 붙기는 했지만, 가능한 얻어낸 정보들을 취합해서 추론해갔다.
소녀가 귀족가의 여식. 그리고 사교계에 소문이 나지 않을 정도로, 일부로 꽁꽁 감추듯이 기른 존재라면 이곳에서 발견되는 것은 분명 이상한 일이었다.
감추고서 길렀다는 것은, 이를 숨기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런 자를 성벽 밖으로 내보냈다니, 말이 맞질 않았다. 소녀를 죽이기 위해서 그런 것이라면, 더욱 쉬운 방법이 있었을 테니까. 그렇다면 소녀가 위험을 감수해가며, 결국 그 위험으로 인해 여기까지 이르게 된 이유가 있다는 것이었다. 모든 일에는 원인과 과정, 그리고 결과가 있는 법이니까.
결국, 마침내 바론이 떠올릴 수 있던 것은, 오래 전부터 아는 사람들은 아는 한가지의 소문이었다.
나라가 건국된 지도 이미 천년이 지난 라이어스 제국은, 그만큼 많은 역사와, 그만큼 많은 구설수에 올랐던 가문들이 있었다.
그 중 필두는 드네와 공작가문이었다. 과거, 라이어스 제국의 왕 중 하나였던, 용사왕 제임스의 딸들. 그 중 하나가 이꾼 가문의 이름이었다. 그리고 드네와 공작가는 기이하게도 그 후손들이 오롯이 여자들밖에 태어나지 않는다고 했다.
덕분에, 그들의 가문은 여성들이 필두에 서서 움직여왔다.
물론 그들이 필두에 서서 움직여왔다고는 하더라도, 오롯이 여성으로만 가문의 모든 것을 집권했다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라이어스 제국은 성별에 따라 차별을 하는 나라가 아니였다. 물론 아주 없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다른 왕국들에 비하면 없다고 해도 좋았다.
실력만 있다면 여자의 몸으로도 얼마든지 출세를 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신분에 따라 한계는 있겠지만 말이다. 다만, 라이어스 제국에 존재하는 종교에서는 여성은 가정에 봉사하는 것을 당연하다고 여겼다.
그 생각이 멍청하다는 것은, 바론은 알고 있었다. 성별이 다르다고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 말이다. 굳이 사람을 나눈다면 두 가지의 종류로 나눌 수 있다고, 바론은 생각하고 있었다.
유능한 자와 그렇지 않은 자. 극단적으로는 그렇게 말할 수 있다고, 바론은 생각해왔다. 바론은 라이어스 제국에서 믿는 종교보다도, 라이어스 제국 자체가 갖고 있는 가치관에 가까운 인물인 셈인 거다. 그리고, 그런 바론이 보기에 드네와 공작가는 매우 유능한 가문이었다.
드네와 공작가문의 여자들은, 예로부터 신분에 아랑곳하지 않고 뛰어난 자들을 섭렵해왔다. 남들이 보기엔 하잘것없다고 여겨지는 재주를 갖고 있는 자라도, 무엇이든 탁월한 재주를 가지고 있는 자들과 연줄을 대오던 가문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가문에도 이름 높은 장군이며, 정치가들이 드네와 공작가의 데릴사위로 들어가서, 가문의 이름을 이어왔었다.
후계자는 오직 여자였지만, 그들은 다른 가문의 뛰어난 남성들을 남편으로 삼아, 가문을 이어왔던 것이다.
그런 가문인 만큼, 몇 가지 소문이 있기는 했었다.
예를 들어, 후계를 잇지 못한 여식들은, 이런 저런 가문들과 혼인을 맺어, 자신들의 권력을 강화한다는 이야기 같은 것이 말이다.
다만, 그건 어디까지나 소문이라고만 여겨져 왔다. 왜냐하면, 드네와 공작가의 밖으로 나간 여자들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언제나 암중에서 움직여왔다. 정치에 관여하는 것은, 드네와 공작가의 후계자와 이어진 역대 데릴사위들뿐이었지, 결코 드네와 가문의 정통 후계자들인 여자들이 겉으로 모습을 내보인 적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물며 그들의 가문에, 대체 얼마나 되는 일원이 있는지도 알려져 있는 것은 없었다.
‘혹시나... 이 소녀가?’
아무것도 알려진 것이 없는 가문인 만큼, 바론이 소녀에 대해서 아무런 소문을 듣지 못했다는 것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