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74화 〉74화 (74/370)



〈 74화 〉74화

적어도, 만에 하나라도 그런 일이 벌어졌을 때, 그러니까 내가 사고를 쳤을 때. 내가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른다는 것쯤은, 그 무슨 일이 결코 좋은 꼴이 아닐 거라는 것쯤은, 에루나도 알고 있을 텐데 말이다.

“아, 그리고 하나 예외가 있다면 제가 있습니다. 저야 주인님의 소유인 몸이니 제 몸을 언제든지 안으시더라도 아무런 피해도 없을 겁니다. 주인님이, 주인님을 위한, 자신의 도구를 써서 자기위로를 하는 셈이니 아가씨들도 질투할 수 없으니 말입니다.”


“.....”

왜 이게 갑자기 떠오르고 난리야. 아니지. 내 직감은 이상한데서  얻어맞고는 했었다. 그리고 그건 지금에 와서 이런저런 기능의 보조 때문인지 직감이 단순히 직감만으로 끝나는 게 아니게 된 경우도 허다하게 있었다.

뭔가 쌔하다 싶었더니 문 앞에 에루나가 있다던가, 그런 경우 말이다. 왜 에루나가 있다는 걸로 쌔해지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느닷없이 이런 것이 떠오른 것도 그런 경우가 아닐까...


그게 왜 하필이면 마지막에, 에루나를 마야와 니아를 핑계 삼아 떼어놓을 때 에루나가 귓가에 속삭였던 것이 떠오르는 형태인지는 어떤 식으로도 이해하고 싶지는 않지만. 아무튼 간에 도통 책을 읽을 만한 상황이 아닌 것 같았다.


지금 책을 읽어봤자 내용이 머릿속에 제대로 들어올지도 모르겠고. 하는  없이 책을 덮어버린 나는 무심코 마실 것을 찾아 에루나를 부르려다가 이내 지끈하고 아파오는 머리를 부둥켜안았다.


또 이런다. 내가 떼어놓고서 금방 에루나를 찾다니. 바보 같은 짓이었다. 그만큼 내가 에루나에게 익숙해졌다는 것도 되겠지만. 그게 아니면, 다른 이유에서라도. 이것만이 아니라 최근에는 머리도 아파왔다. 아마 스트레스 때문일 거다.

항상 최상의 상태로 몸의 상태를 유지시켜주는 특성인 개변자가 없었더라면 스트레스로 머리가 죄다 빠졌을 것 같았다.

최근 들어 너무 머리를 쥐어뜯어대는 듯하기도 하고. 그것도 원인이 죄다 에루나인 것 같지만.


아니, 같은 게 아니라 에루나가 원인이었다. 특히나 요즘 두통이 심해진 것도 대부분은 에루나의 덕분이었다. 원래도 그런 경향이 없잖아 있기는 했지만, 요즘 에루나는 더욱 심해진  같았다. 잠깐  보던 사이에 뭐가 어떻게 되기라도 했나. 방금 있었던 일도 그렇고, 어제 있었던 일도 그렇고...

기분 탓일지도 모르겠지만...

거기에 말은 또 왜 그렇게 하는 건지 모르겠다. 도구니까 상관없다느니, 소유된 몸이니 괜찮다느니, 그런 말이나 하고 말이다.

조금 자신을 소중히 여겨줬으면 좋겠다. 물론 이 세계에서 골렘이 어떤 존재인지, 그들의 의미가 무엇인지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나도 골렘 작성이라는 기능이 있었다. 당연히 그와 관련된 책을 읽어서 얻은 기능이었다.

드래곤들이 직접 넣어준 기억이나 지식과는 달리 내가 책을 통해 얻은 거니 별로 대단한건 없지만, 대충 골렘이 어떤 존재인지는 알고는 있다는 거였다.


대다수의 골렘은 에루나처럼 인간을 빼다 박게 생겼거나, 스스로 생각을 하며 움직이거나, 주인을 놀려먹거나 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오히려 에루나가 했던 말 대로, 도구에 가깝게 쓰이는 존재들이었다.


마법사들이 자신의 몸이나, 물건 따위를 지키기 위해. 혹은 단순한 심부름이나 힘을 써야하는 일에 써먹기 위해. 간단히 만들어서 간단히 부려먹고 끝내는, 골렘이라는 이름을  도구. 간단하게 만들어져 간단하게 버려지는 물건처럼 쓰이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래도 그런 골렘과 에루나를 동일시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야 당연했다. 에루나는 골렘이지만, 에루나였다. 이걸 뭐라고 표현해야할지 모르겠다. 그냥 그랬다. 내게 에루나는 골렘인 에루나보다는 그냥 에루나였다. 날 놀리는 걸 엄청 좋아하는 듯한 성격이 나쁜 녀석. 딱히 의식하지 않는 이상은 에루나가 골렘이라는 것조차 종종 잊어먹고는 했으니까 말이다.


머리로는 골렘이라는걸 알고 있는데, 감각적으로는 성격 나쁜 친구나, 혹은 가족에 준하는 존재를 보는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그래도 조금 성격이 나쁜 것뿐이지 나쁜 녀석은 아니었다. 차라리 나빴으면 좋겠다 싶을 때도 없지는 않지만. 차라리 그랬더라면 아예 멀리 떨어져있으라고 딱 잘라 말할 수도 있고...


어쨌거나 에루나가 자신을 도구니, 물건이니 하면서 말하는 것은 아무래도 듣기 싫었다. 에루나가 스스로를 도구라고 지칭하면서 거리낌 없이 사용해달라니 뭐니  때마다 나까지 이상해지는 기분이고. 드래곤의 기억때문인지 나도 가끔 정말로 에루나를 편히 다룰  있는 무언가로 생각할 때도 있고 말이다.

애당초 자기는 제외니까 마음대로 해도 좋다는 사실을 내게 말해서 뭘 어쩌란 건지도 모르겠다. 나보고 어쩌란 건데?

물론 에루나가 무슨 생각으로 그런 얘기를 했는지 모른다는 건 당연히 아니었다. 딱히 알고 싶지 않지만 알 수는 있었다. 그래도 나는 어디까지나 거절해야하는 쪽에 가까웠다. 내가 에루나가 싫어서 그렇다는 건 아니었다. 그리고 에루나가 못났다는 이야기도 아니었다.

옅은 보랏빛 머리카락. 언제, 어디에서, 어느 각도로 보던 간에 완벽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단정한 자태. 그러면서도 묘하게 색기가 감도는 몸짓까지. 딱히 에루나가 시녀복이나, 얼마 전에 봤던 옷 외의 다른 옷을 입거나, 꾸미거나하는 것을 본 적은 없었지만. 이미 지금도 에루나는 그 자체로 충분히 아름다웠다.

처음에 에루나를 만났을 때를 떠올려봤다. 그때도 에루나가 입을 열기 전까지만 해도 에루나를 보면서 참 예쁘게도 생겼다고 생각했었다. 바로 전에 루시아를 비롯해서, 이게 정말 인간인가 싶은 미소녀들을 잔뜩 봤는데도 그런 생각을 했던 것이다. 에루나가 입을 열자마자 그런 이미지가 와장창 깨져버리기는 했지마는. 어찌됐건 에루나도 외모로는 뒤처질만한 존재가 아니란 것이었다.

그런 에루나를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 확실히 매력적인 제안이였다. 하지만 그런 유혹에 홀라당 넘어가서 약속 같은걸 죄다 저버릴 생각은 없었다. 아니, 약속이야 둘째치더라도, 그 이후에 있을 후환이 두려웠다.


1년 안에 그녀들을 반하게 하겠다.

1년 안에 그녀들에게 반하겠다.

그리고  전까지는 절대로, 누구와도 관계는 맺지 않겠다. 그렇게 그녀들과 맺은 계약은 어찌 보면 나를 보호하고 있는 유일하고 무이한 방패이기도 했다.

이게 없었더라면 그 전에 왠지 홀라당 벗겨져 먹혔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당장에라도 호시탐탐 내 정조를 노리는 존재도 있고 말이다. 다름이 아니라 에루나가 그랬다. 그 증거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항상 침실이나 욕탕으로 쳐들어오던 에루나를 댈  있었다.


왜 내가  시녀라고 주장하는 녀석한테 정조의 위기를 느껴야 되는 거지 모르겠다. 아니, 정조라고 부를만한 것도 없긴 하지만...

아니 생각해보니까 내가 왜 이런 걱정을 해야 하는지도 이해가 가질 않는데.

제발 다시 한 번 부탁하는데 제발 스스로 좀 소중히 여겨줬으면 좋겠다. 그럼 이런 걱정할 일도 조금은 적어지겠지...


어째 그럴 날이 올  같지 않은 건 왜지.


“들어줄 것 같지는 않지만 말이나  번 해볼까...”

“뭘 말인가요?”

“제발 덮치지만 말아달라고 부탁이라도 해볼까 싶어서 말이지 이대로 가다가 어떻게  것 같기도 하... 루시아?”

“네, 저랍니다. 그나저나 어떻게 되다니요?”

별 생각 없이 들려온 목소리에 대답했다가, 뭔가 이상하다 싶어 고개를 돌려보니 어느새 나타난 건지 루시아가 침대 맡에 걸터앉은 채 나를 보고 있었다.


그런 루시아를 보고 눈을 둥그렇게 뜨고 있었더니 루시아가 입가를 가리며 말했다.

“뭘 그렇게 놀라시나요? 제가 여기에 있는 게 이상한가요?”


느닷없이 나 혼자 있던 방에 나타났는데 놀라지 않는  이상했다. 하물며 저녁쯤에 올  있다던 루시아가 뜬금없이 내 방에 있는 것도 이해할  없었다. 그런 나를 보고서 루시아가 입가를 가리며 말했다.

“아차... 그러고 보니 노크를 하지 않았었죠. 죄송해요. 이지경님.”

“아니... 그런건 됐고. 여기엔 어떻게?”


문이 열리는 소리도 듣지 못했는데. 내가 머리를 쥐어뜯느라 못들을 수도 있었지만, 에네스타와의 수련에 의해 감각이 여러모로 예민해진 덕분에 지금은 의식하고 있는 동안은 수십 걸음 밖에서 들려오는 인기척이 누구의 것인지도 대충 어림짐작이 가능한 수준이라 그건 아닐 거다.

그런 내 물음에 루시아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그거라면 이지경님에게 드렸던 보석을 통해서 온 거에요. 그 보석에는 전이마법이 걸려있으니까요. 이지경님이 위급한 상황에 사용하기 위한 물건이기는 하지만, 평소라면 이렇게 사용해도 된답니다. 마침 예상했던 것보다 일이 빨리 마쳐져서, 시험을 겸해서 와본거에요. 혹시 이지경님께 실례가 됐을까요?”


“실례랄  없지만...”


딱히 이상한 짓을 하고 있던 것도 아니고 말이다. 그래도 갑작스레 옆에 나타나면 놀라기는  테지만.

그보다 루시아의 말대로라면 내가 어디에 있던 간에  보석을 가지고 있는 한은 누가 들이닥쳐도 이상할 게 없다는 소리구나.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사생활의 영역이 점점 좁혀져가고 있었다...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그나저나... 그건 뭔가요?”


“그거라니?”


“이지경님이 방금까지 읽고 계시던 책이요.”

그렇게 말하고서는 빤히, 이쪽을 바라보는 루시아의 시선을 따라 시선을 옮기다가 막 덮어두었던 책에 닿았다. 나도 모르게 책을 루시아와 반대방향으로 던져버렸다. 정말로 나도 모르게 그런 거다. 별 의미는 없었다.


루시아의 눈이 그런 나를 보고서 가늘게 바뀌었다.


잘못한건 없는데 왜 이렇게 심장이 뛰냐. 엄마한테 즐겨보던 야동 품번을 걸린 아버지의 심정이 새삼 이해되는 건 또 뭐고?

“왜 그러시나요? 딱히 이지경님을 탓할 생각은 없지만 책이란 소중하게 다뤄야하는 물건이에요. 산처럼 쌓아둔 금은보화보다도 한 권의 책이 더 소중한 경우도 있는 법이니까요.”


그렇게 말하고서 손짓한 루시아에게 스윽, 하고 내다던졌던 책이 날아갔다. 눈앞에서 둥실하고 날아가서 그대로 루시아의 손에 들어가는 걸 보고서 차라리 내가 붙잡고 있을 걸하고 후회했다. 아니, 딱히 내가 뭘 잘 못한 것도 아니니까 후회할 것도 없기는 한데...  이렇게 불안한 건지 모르겠다.


“...흐응”


사락, 사락... 루시아가 책을 펼쳐, 한 장 한  넘기며 말했다. 한  한 장 페이지가 넘어갈때마다 살이 저며지는 기분이 들었다. 살짝살짝, 아까 책을 읽었을 때 봤던 삽화부분이 스쳐지나갈때마다 루시아의 손이 잠깐 멈칫할때마다 누군가 뒤통수를 꽉 부여잡고 누르는 기분까지 들었다.

그렇게 몇 분 남짓, 책을 훑어본 루시아가 입을 열었다.

“이런걸 보고 계셨군요.”

“그게, 에네스타에게 배울 검술을 조금이라도 알아둘까 싶어서...”

루시아의 입이 열리자마자 즉각적으로 튀어나온 말이 왜인지 몰라도 엄청나게 변명하는 투로 들렸다. 딱히 변명은 아닌데. 진짜로 그런 이유로 찾아봤던 건데.

“그렇군요... 전부터 생각해왔던 거지만 이지경님은 정말로 책을 좋아하시는 모양이네요...”


“아, 그게 생각보다 재밌는 것들이 많아서 말이지. 세계가 다르다보니까 모르는 것도 잔뜩이고...”

“새로운걸 알게 된다는  분명 즐거운 일이죠. 저희들은 대부분의 지식을 부모로부터 얻은 터라, 그런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것이 얼마 되지 않지만요. 안타까운 일이네요.”

“그것도... 그렇겠네.”

공부라고하면 머리가 아프다고 싫어하는 사람이 대부분이겠지만, 그런 사람들도  번쯤은 경험해본 적이 있을 거다. 자신이 모르던 것을, 못하던 것을 해냈을 때의 기쁨이란, 상상이상으로 많은 즐거움을 준다.


하지만 루시아를 비롯한 드래곤들은 그런 것을 거의 느낄 수 없으리라. 애당초 그녀들은 세계의 보존을 위해서, 부모로부터 이미 준비되어있던 모든 유산을, 힘과, 지식을 모두 물려받으면서 태어났으니 말이다.

어떤 것을 먹더라도, 어떤 것을 하더라도, 심지어, 자신이 전혀 모르는 누군가를 보더라도. 이미 알고 있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대체 그건 무슨 기분일까.


자신이 경험한 적이 없는 것, 자신이 모르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는 건 무슨 기분일지 모르겠다. 확실한건, 내가 당연하게 느낄 수 있었던 것의 일부를, 그녀들은 전혀 느낄 수 없었을 거란 정도였다.

“하지만 이지경님과 대화하는 건 즐거운 편에 속해요. 적어도  부모들조차, 다른 차원에서 온 이와 대화를 한 적은 없었으니까요.”

“그건 다행인걸.”

딱히 뭔가 한 것도 없지만 나와 대화하는 것만으로도 즐겁다고 말해주면 몸둘바를 모르겠지만요.

괜시리 가슴 한편이 간지러운 기분에 어색하게 머리를 긁적이고 있자니, 루시아가 나를 바라봤다.


“그래서, 저와  엘프, 둘 중 누가 더 아름답다고 생각하시나요?”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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