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77화 〉77화 (77/370)



〈 77화 〉77화
끼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그 문을 넘어서 커다란 자루가 낑낑거리며 들어왔다.


아니, 자루가 아니라 자루를 가득 팔에 끌어안고 있는 소녀가 들어왔다. 단지 자루가 저절로 걸어왔다고 착각할만큼 자루가 차지하는 비중이 많았을 뿐.

그리고 자루, 아니 자루를 든 소녀가 말했다.

“에루나님. 이건 어디에 두면 좋을까요?”

영차, 하고 양팔 가득 설탕과 밀가루를 들고 온 마야가 그렇게 묻자, 크림을 만들고 있던 에루나가 흘끗, 그런 마야를 보며 말했다.

“마야. 저를 부를 때는 뭐라고 부르라고 했었습니까?”


“아...! 죄, 죄송합니다! 시녀장님!”


그런 에루나의 말에 흠칫 놀라서, 고개를 푹 숙이며 말하는 마야를 보고서 에루나는 말했다.

“아뇨, 다음부터 조심하면 됩니다. 밀가루는 그쪽의 탁자 위로, 설탕은 제 옆으로 가져와주십시오.”

“네, 넵!”

에루나의 말에 종종 걸음으로 밀가루를 탁자 위에 올려놓은 마야가, 설탕이 가득 든 자루를 품에 안고서 이번에는 에루나의 옆으로 다가왔다. 흘끗, 하고 자신의 휘하로 들어온 신입 시녀의 모습을 지켜보던 에루나는 앞으로 가르칠 것 중에서 주인님의 시녀로써 갖춰야할 몸가짐에 대한 것도 포함하기로 하면서 말했다.


“마야, 니아는 잘하고 있었습니까?”


에루나가 마야에게 밀가루와 설탕을 가져오는 일을 시키는 것을 겸해서, 다른 일을 맡겨둔 니아가 잘하고 있는지 확인하게 시켰던 것을 묻자, 마야가 대답했다.

“아, 네. 시녀장님께서 명령하신대로, 오븐에 불을 피우고 있었습니다.”


“그렇습니까.”

처음의 실수를 만회라도 하려는 것처럼, 씩씩하게 대답하는 마야를 보고서 에루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입을 열었다.

“...당신들은 마력을 사용할 수 없으니, 이곳의 생활이 불편하거나 하지는 않습니까?”

당장 에루나였더라면 굳이 오븐에 불을 피우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이 손가락 한번 휘젓는 것으로 끝낼 수 있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불꽃을 피우는 마법도구를 사용하면 그만이었다. 또 설탕이나 밀가루를 가져오기 위해서 굳이 창고까지  필요도 없이, 그저 자신의 앞에 소환하는 것도 가능했다. 이번에 그녀들에게 일을 시킨 것은 어디까지나 교육을 겸하고 있는 일이지. 사실 일의 효율만을 생각하면 에루나 혼자서 하는 쪽이 훨씬 쉽고 간단한 것이다. 이제까지 그래왔듯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온갖 마법에 능통하고, 천공성에 있는 모든 도구의 사용법을 숙지하고 있는 에루나에게만 해당되는 일이지 낙시안들인 마야와 니아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일이었다. 오히려 소환은커녕 그나마 마력을 적게 사용하는 편인 목욕탕의 온수를 조절하는 것도 힘든 것이다. 낙시안은 강인한 육체를 타고 태어나지만  반대급부로 선천적으로 턱없이 부족한 마력을 지니고 있는 탓이었다.


인간을 1이라고 한다면 낙시안은 한없이 0에 가까운 마력을 지니고 태어난다. 인간이 단련과 선택을 통해 10까지 성장할 수 있다면, 낙시안은 간신히 2, 3정도의 마력을 품을 수 있었다. 타종족에 비해서 마력이 적은 편으로 알려진 인간과도 이정도의 차이가 난다는 것은, 그만큼 낙시안들이 일반적으로 지니고 있는 마력이 터무니없이 적다는 것을 의미했다.

아무튼 덕분에 마력을 사용해서 열을 내는 오븐이라던가, 마찬가지로 마력을 사용해서 도구들의 태반은 낙스 출신인 그녀들에게 있어서 죄다 사용할 수 없는 것들뿐이었다.


마력이 있어야만 사용할  있는 마법도구로 가득한 천공성에서는 사실상 무능력자인 주인님과 별다를 바가 없는 것이었다.


그것이 떠올라서 물었던 에루나였지만, 그런 에루나를 보며 마야가 해맑은 얼굴로 대답했다.

“아, 아뇨. 저나 니아나 불을 붙이거나, 짐을 나르는 일을 하는 건 익숙하니까 괜찮아요. 오히려 아침에도 뜨거운 물이 나오고, 침대라는 건 푹신푹신하고, 음식도 엄~청나게 맛있어서 정말로 좋은걸요!”

무언가를 떠올렸는지 헤~ 하는 얼굴로 그렇게 대답해온 마야를 보며 에루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마야의 대답에 긍정하기 위해서 끄덕인 건 아니었다. 그저 오늘 밤에 있을 교육에 시녀로써 취해야할 언동 역시 교육하기로 마음먹었을 뿐이었다. 아주 조금은, 괜한 걱정을 했구나 하는 마음도 없잖아 있기는 했지만 말이다.


애초에 이쪽은 그런 마법 따위는 필요하지도 않고, 없이도 턱없이 험난한 낙스에서 살아온 낙시안들이었으니 말이다. 눈앞의 소녀, 마야만해도 인간으로 치면 이제  열 살 남짓을 넘었을까 하는 외모였지만 낙스에서 생존에 필수적인 요소인 불을 피우는 것 정도는 간단히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성인인 인간들도 힘들어할 일들도, 단지 근력과 체력만으로도 척척 해냈다.  또래인 니아 역시 불을 지필 나뭇가지만 있으면, 맨손으로도 불을 피워내는 것 정도는 간단한 일이기도 하고.

그리고 스스로 잠깐이나마 생각했던 불경한 생각에 반성했다.


무능력한 주인님이라니. 불경하디 불경한 생각이었다. 오히려 주인님이 직접 불을 피우거나 할 필요는 없으니, 불을 피우지 못하더라도 상관없는 일이기도 했다. 주인님이 불을 원한다면 자신이 얼마든지 마련해오면 그만이었으니까. 무능한 게 아니라 필요 없는 일인 것이다.

반성의 의미로 오늘 밤에야 말로 주인님에게 밤시중... 아니, 밤시중은 오늘은 안될 테니 내일이라도 밤시중을 들기로 다짐하면서 에루나는 입을 열었다.

“적응이 빠르다는 건 좋은 법입니다. 단지, 지나치게 좋아진 환경에 빠져 나태해지지만 마시길. 당신들은 어디까지나 주인님을 모시는 시녀들이니까요. 당신들에게 주어지는 옷, 음식, 그 모든 것들은 결국 주인님께서 내린 것이나 다름없다고 여기며 감사히 생각하십시오.”

“아, 알겠습니다. 시녀장님…”


꾸중을 들었다고 생각한 걸까, 살짝 주눅이 든 얼굴로 그렇게 말하는 마야를 보고서 에루나는 생각했다.


주인님이 여태까지 자신을 거부했던 전적으로 보아하나, 평소 주인님이 마야나 니아, 로로들에게 대하던 태도를 보아하나, 내일 있을 밤시중에는 셋 중 하나, 아니 셋 모두 포함시킨다면 성공률이 높아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말이다.


시녀로써 갖춰야할 필수적인 덕목인 밤시중에 대한 교육도 겸할 수 있는 것이니 좋은 생각인 것 같았다.


어떻게 하면 주인님의 밤시중을 성공시킬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에루나는 마야에게 말했다.

“그리고, 곧 있으면 당신들을 위한... 마력이 없더라도 사용할  있는 도구들을 드워프들에게 만들도록 시켜놓았으니 그것들을 사용하는 법도 익힐 준비도 해주시길 바랍니다.”


다시는 그럴 생각은 없었지만, 만에 하나라도 자신에게 무슨 일이 있어 천공성을 떠나 주인님 곁에 없더라면 자신이 해야  일을 그녀들이 해야만 했으니까 그녀들이 사용할  있는 도구를 마련하는 것은 당연했다.


지금처럼 매번 필요한 것들을 나르고, 불을 지피기 위해 시간을 들이다보면 해야할 일들이 잔뜩 쌓일 테니까.


딱히 배려하는 차원에서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그런 에루나의 말에 눈에 띄게 밝아진 얼굴이 된 마야가 말했다.


“넵! 알겠습니다!”


활기차게 대답하는 마야를 보고서, 에루나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크림을 만드는 것에 몰두했다. 밤시중은 밤시중이고, 일은 일이었다. 거기에 오늘은 루시아 아가씨의 차례니, 지금은 지금 해야 할 일을 하기로 한 것이다.

빼꼼, 하고 그런 에루나를 보고 있던 마야가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시녀장님. 대체 뭘 만드는 건가요?”

“이거 말입니까?”

순진한 눈으로, 그렇게 묻는 마야를 보며 에루나는 열심히 만들고 있던 크림을 살펴봤다. 거품도 어느 정도 가라앉았고, 조금 부족하지만 당장 사용해도 상관없을 만큼 완성된 크림이었다.

언제나 완벽하게 일을 처리하는 에루나로써는 딱히 필요 없는 과정이었지만, 자신과는 달리 이런저런 시녀의 일을 배우는 입장인 마야를 위해 옅은 황금빛을 띄고 있는 크림을 살짝 손가락으로 덜어낸 에루나는 마야에게 내밀었다.


“?”


눈앞에 내밀어진 크림이 묻은 에루나의 손가락을 보며 고개를 갸웃하는 마야를 보면서 에루나가 말했다.

“맛을 보셔도 됩니다.”

“아, 먹어보라는 거군요. 네! 알겠습니다!”

에루나의 말에 마치 기대하고 있던 것을 선물받은 아이처럼 환희하며 덥썩, 에루나의 손가락을 물은 마야는 그대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랐다가, 이내 흐물흐물 녹아내린 슬라임처럼,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맛이 어떻습니까?”

“마, 마시써요... 달고, 촉촉하고, 그리고... 후에...”

“아무래도 자제심에 대한 교육도 필요하겠군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에루나는 이미 다 핥아먹은 크림을 맛보려고 혀를 움직이는 마야를 손가락으로부터 떼어내고서 크림을 바라봤다.

그리고 에루나 역시, 크림을 조금 덜어 입에 넣어봤다.


풍부한 우유의 풍미와 함께, 너무 달지도 않은 은은하고 고급스러운 단맛이 입 안 가득 퍼졌다.


“...아무래도 설탕은 필요 없겠군요.”

이 크림에 뭔가 더 넣거나 하는 건 이 크림에 대한 모독이었다. 이미 충분히 완성된 존재였으니 말이다.

하긴 그럴 수밖에 없을지도 모르겠다.  크림은 흔하디흔한 크림이 아니었으니까. 인간들이 흔히 사용하는 우유로 만든 크림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최고급의 크림인 것이다. 다름 아니라,  악명 높은 미노타우로스의 젖으로 만들어낸 크림이었으니까.

사실 악명이 높은 건 오크나 고블린과 마찬가지로 사시사철 발정기나 마찬가지인 수컷 미노타우로스고 그런 미노타우로스의 성질 탓에 이런저런 종족들이 마구잡이로 섞인 끝에 수컷 미노타우로스와는 생판 다른 종으로만 보이는 암컷 미노타우로스는 인간들의 세상에서도 성노로써나, 이 크림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미식의 재료로 사용하는 젖을 만들어내는 소중한 도구로써 인기인 모양이었지만 말이다.


 암컷 미노타우로스도 일단은 몬스터라서 쉽게 잡히지는 않는 모양이이라 그 젖은 돈이 엄청나게 많더라도 쉽게 구할 수 없는 물건이였다. 아무튼 에루나가 만들어낸 크림은 그 미노타우로스의 젖으로 만든 것이었다.

미노타우로스의 젖을 공급한 곳은 아르카네스의 영지인 브란시아.

아가씨들의 영지중에서도 특히나 몬스터들이 많은 땅. 물론 몬스터 말고도 인간과 드워프들을 제외한 아인들의 천국인 곳이기도 했다. 그곳에서 오늘 아침에 막 공수해온 미노타우로스의 젖으로 만든 크림은 스스로가 만들었지만 특상품 중에서도 특상의 물건이었다.


신선한 건 물론이거니와 아르카네스 아가씨의 간식을 위해 엄선된 미노타우로스들의 젖으로 만든 것이니, 질도 차원이 달랐다. 당연히 좋은 품질의 젖으로 만든 만큼 크림 역시 훌륭한 것이다.

크림에 아무런 하자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에루나는 마무리를 하며 말했다.

“이걸로 크림은 완성됐으니, 다음 준비를 해야겠군요. 아, 그리고 마야.”

“네, 네에...”


아직도 흐물흐물, 녹아내린 얼굴로 멍하니 자신의 손에 들려있는 크림이 든 볼을 바라보는 마야를 보며 에루나가 말했다.


“지금 만드는 것이 뭐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입니다만. 저희가 지금 만드는 건, 케이크입니다.”


“케이...크?”

“네, 무척이나 달고, 무척이나 맛이 좋은 케이크. 낙스에서는 어떤지 모르겠습니다만, 이곳에서는 기념적인 날이 있을 때면 케이크를 만드는 풍습이 있어서 말입니다.”


“기념... 인가요오...?”

대답을 하는 건지, 아니면 자신의 말의 일부를 그저 따라 할뿐인지 모를 마야의 대답을 들으면서 에루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저희들의 주인님께서 마침내 아가씨와 합방을 한 날이니 기념이 아니면 대체 어느 날이 기념이겠습니까?”

...아직은 어디까지나 반반이기는 했지만. 에루나는 그렇게 말했다. 루시아 아가씨에게 주었던 그것은, 독물이나 약물에 대하여 강한 내성을 지니고 있는 드래곤에게는 조금 솔직하게 되어질 뿐인 약이었지만 인간인 주인님께는 어떻게 작용할지는, 그걸 준 당사자인 에루나가 더욱 잘 알고 있었다.


‘솔직하게’ 되는 약이라고 말했지만, 사실 솔직해지는건 본능에 관한 이야기니까.

만약 주인님이 갖고 있는 그 능력이 약물에 발동되지 않는다면 이미 끝난 이야기였다. 만약 통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조금 ‘솔직하게’ 되어버린 루시아 아가씨가 어련히 알아서 했겠지 생각하면서, 에루나는 여전히 몽롱한 눈을  채 주저앉아있는 마야를 일으켜 세웠다.


“합바아앙~? 헤헤...”


“...역시, 내일은 저 혼자 밤시중을 드는  좋을지도 모르겠군요.”

어쩌면 크림을 만들 때 넣었던 미약 때문에 이러는 걸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에루나는 케이크의 시트를 구울 준비를 하기 위해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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