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4화 〉84화
콰앙!
연무장에 막 도착했을 때였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굉음과 함께 무언가가 내게 날아들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 다만 반응을 못한 건 나였을 뿐이지, 내 몸은 얘기가 달랐다. 띠링하고 귓가에 들려오는 ‘즉각 반응’을 발동한다는 소리와 함께 몸이 저절로 날아오는 무언가를 피하기 위해 움직였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움직이기는 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늦어서 결국 날아오던 그 무언가와 충돌하려고 했다. 아니, 너무 크잖아. 뒤늦게 날아오는 무언가를 본 내가 그렇게 생각했다. 솔직히 좀 더 빨리 반응 하더라도 저렇게 커다란 게 날아오면 피하기 힘들었다.
보통 날아오는 물체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작고 앙증맞은 거였다. 탄환이라던가, 돌멩이라던가. 하지만 지금 날아오는 것은 그런 거랑은 차원을 달리했다.
일단 컸다. 엄청나게 컸다. 대포알 수준이 아니었다. 그리고 시꺼멓고, 반들거렸다. 물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액체 같은 게 덕지덕지 묻어있어서 엄청 반들거리는 게 날아오고 있었던 거였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날아오는 물체는 인간의 형체를 하고 있었다.
뭔데.
이거 뭔데.
그렇게 느닷없이 날아온 괴물체와 부딪힌다고 생각했을 때였다.
내 옆에서 검은 것이 팟! 하고 튀어나왔다.
검은 시녀복이 눈앞에서 나풀거렸다. 그리고 나풀거리는 치맛자락 사이로 뻗어진 다리가 내게 날아오던 괴물체를 사정없이 걷어찼다.
쾅!
"꾸억!"
연무장을 막 들어왔을 때 들려온 소리와 비교하면 작은 소리와 함께, 로로에게 걷어차인 괴물체가 그대로 땅에 꽂혔다가 튕겨 올랐다.
그리고 펄럭거리는 치맛자락 사이로 뽀얀, 연갈색 빛의 속살이 보였다.
콰드드득!
그렇게 잠깐 시선을 강탈당하던 사이에 튕겨 올랐던 괴물체에게 다시 한 번, 로로의 발차기가 작렬하는 게 보였다. 괴물체가 바닥을 긁어내는 소리와 함께 내 옆을 스치고 지나가 벽에 처박혔다.
그제야 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서 날아왔던 것을 확인해봤다.
“왜 저 녀석이...”
처음에는 누군지 알아볼 수 없었다. 그만큼 엉망인 얼굴이었다. 굳어서 딱지가 된 피라던가, 반들거린다고 생각했던 이유로 보이는 땀이라던가가 그 엉망인 얼굴을 잔뜩 더럽히고 있었다. 하지만 얼굴 외에도 사람을 알아보는 법은 여럿 있었다. 예를 들면 옷차림이라던가, 피부색이라던가, 덩치라던가. 그렇게 여러 가지 조건을 따져본 결과, 내게 날아왔던 괴물체의 정체가 바쿠라는 결과가 나왔다.
반쯤 거적 데기가 된, 바록과 바쿠에게 에루나가 지급해줬던 시종복이 첫 번째 증거였다. 여기까지는 바쿠 말고도 바록일 가능성도 있었지만 바록과는 달리 바쿠의 뿔은 조금 길쭉했다. 그리고 떡처럼 부풀어 오른 녀석의 이마에는 그 길쭉한 뿔이 있었다. 이게 바쿠라는 결정적인 증거였다.
이 두 개 외에는 저게 뭔지 알 수가 없었지만. 아무것도 모르고 봤으면 몬스턴줄 알았을 거다.
어쨌거나 저 녀석은 어쩌다 하늘을 날고, 또 로로에게 걷어차인 건지 도통 모르겠다. 얼굴은 또 왜 저렇고? 로로한테 차인 곳이 얼굴이라도 됐던 걸까.
전혀 모르겠다.
그리고 사뿐하게, 상황파악도 제대로 되지 않는 내 옆에 로로가 시녀복을 나풀거리며 내려왔다.
덕분에 문제는 바쿠가 날아온 것만 있는 게 아니란 걸 떠올릴 수 있었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얼굴로 내게 다가온 로로를 바라봤다.
그런 나를 보고서 로로가 태연하게 물었다.
“왜?”
왜긴 왜야.
몰라서 묻는 거니? 그런 마음을 듬뿍 담아서 로로를 바라보자 이번에는 고개를 갸욱였다.
정말로 모르는 것 같다... 하는 수 없었다. 나는 헛기침을 한 번 하고서 입을 열었다.
“로로야. 너... 그, 옷 밑에 입는 건 어쨌니?”
“?”
“그러니까...”
팬티를 팬티라고 말도 못하고 서럽다 정말. 거기에 대체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전혀 이해 못한다는 얼굴을 하고 있는 로로를 보아하니 뭐라고 설명할 길이 없이 막막하기만 했다.
됐다. 그냥 나중에 에루나에게 한 소리 해야겠다.
대체 로로의 속옷은 언제 마련할 건데. 언제까지 발가벗고 다니게 할 거냐고 제대로 말해둬야겠다.
“주인님, 괜찮아? 머리, 다쳤어?”
“괜찮아. 그리고 안 다쳤어.”
정작 당사자인 로로는 아무렇지도 않은지, 태연한 얼굴로 그렇게 물어왔다. 괜찮지 않은건 내가 아니라 너였다. 내가 왜 니가 팬티를 입었는지 안 입었는지 신경써야하는 건데. 그리고 지금 돌려서 나보고 이상하다고 말한 건 아니지?
“...그래? 그럼 다행이다.”
내 대답에 그렇게 중얼거리던 로로가 이번에는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뭐가 잘못 됐어?”
잘못되긴 했지. 뭘 잘못 했는지 전혀 모르는 게 엄청 잘못됐지...
이 녀석도 이 녀석이었다. 속옷도 입지 않고 있는 주제에 휙휙 치맛자락을 펄럭거리며 움직이는 게 조심성이란 건 전혀 없어 보였다.
아니, 조심성이 없다기보다는 아예 그래야할 필요성을 못 느끼는 걸지도 모르겠다. 처음에 내게 알몸을 있는 그대로 보여줬던 낙시안들도 딱히 알몸을 보여서 수치를 느낀다기보다는 그냥 에루나가 무서워서 벌벌 떨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낙시안들은 그런 쪽의 개념이 없는 걸까. 일단은 옷을 입고는 있으니까 아주 없는 건 아닐 텐데... 낙시안들이 옷을 입는 이유가 다른 걸지도 모르겠지만. 확실히, 옛날에는 옷은 단지 체온을 유지하기 위해서 입었을 뿐이라고 들었으니까.
하지만 그때는 그랬더라도 지금은 그러면 안 되잖아. 지금이야 아직 어린 아이니까 봐도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말이지. 내가 그쪽 취향을 가지고 있었으면 큰일 났을 거다. 아니, 어린이고 자시고 안 되는 건 안 되는 건가. 취향이 아니고 자시고 이미 본 시점에서 난 아웃일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아직 어릴 때 제대로 고쳐놔야지 나중에 커서도 이러면 큰일이 날지도 모르겠다.
자랑은 아니지만 로로도 그렇고, 마야나 니아도 그렇고, 그리고... 조금 경우가 다르지만 슈슈도 그렇고, 바록이나 바쿠를 제외하면 낙시안 출신인 녀석들은 죄다 미인들이니까. 나중에 커서도 이 모양이면 그냥 큰일이 아니라 엄청난 게 일어날 거다.
역시 교육이 필요해 보였다. 그리고 속옷도.
아무튼 로로의 속옷이니 낙시안들의 교육이라던지의 문제는 내일의 나에게 떠넘겨버리기로 하고서, 보호 같은 건 필요 없다고 생각했던 직후에 보호받은 지금을 생각하기로 했다. 뭐가 불만인지 아까부터 빤히, 무언가를 바라는 듯이 나를 바라보는 로로를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하기로 했다.
로로가 계속 쳐다보는 게 심히 부담스럽다.
혹시 아까 내가 생각했던 걸 들켰던 걸까? 로로가 했던 걱정을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겼던 걸 들켰던 걸까? 에루나도 아니니까 그럴 일은 없겠지만, 하루가 갈수록 에루나를 닮아가는 로로를 보면 안심할 수도 없었다.
결과적으로, 로로가 말했던 약하니까 지켜주고 있다는 말을 내심 무시하고 있던 나를 전면으로 부정하는 일이 실제로 일어나기도 했고 말이다. 나는 꼼짝도 못했던 걸, 로로가 해결했으니까... 로로의 두 배는 더 산 주제에, 로로의 절반만도 못한 나는 입이 있어도 할 말이 없었다.
능력치가 조금 올라갔다고 까불어서 죄송합니다. 아니, 딱히 능력치가 조금 오른 것 정도로 자만하지는 않았는데 말이죠. 아무리 갑작스럽게 일어났다고 해도 반응도 못할지는 몰랐습니다. 패시브나 마찬가지인 기능, 즉각 반응이 없었더라면 움찔도 못했을 거고...
혹시나 싶어서 속으로 사과해보고 빌어봤지만 변하는 건 없었다. 하긴, 에루나 같은 녀석이 한 명 더 생긴다는 건 말이 안 되기는 했다...
그건 그거고, 전혀 상황이 바뀌지 않아서 곤란한건 매한가지지만...
응, 진짜로 뭐라고 말해야할지 모르겠다. 로로 녀석이 왜 이렇게 쳐다보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럴 때야말로 대충 넘어가는 방법은 알고 있었다.
"응, 잘했다! 대단한걸, 정말로 잘했어 로로."
그건 로로를 마구 칭찬해주는 거였다. 나는 부드러운 로로의 머리카락을 마구 쓰다듬으면서 마구 칭찬해줬다.
“......”
그러자 눈을 지그시 감고서, 예의 쳐다보기를 그만둬줬다. 결국, 뭐가 문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일이 해결된 나는 다시 한 번 정성을 다해서 로로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칭찬해줬다.
“끄어어...”
벽에 처박힌 채 신음하는 바쿠는 무시했다.
그렇게 로로를 칭찬하고 있자 에네스타가 허겁지겁 달려와서 말했다.
"괘, 괜찮으십니까? 나의 주!"
"아, 에네스..."
그런 에네스타에게 괜찮다고 말하려다 말고 입을 닫았다. 그러고선 에네스타의 손에 붙잡혀 있는 것을 봤다.
나는 괜찮은데, 네 손에 들려있는 그 녀석은 괜찮아 보이지 않는구나.
저걸 뭐라고 불렀더라. 에네스타에게 관자놀이를 꽉 붙들린 채 질질 끌려온 바록을 보며 떠올락말락하는 기술 이름을 생각하고 있자니 내 시선을 눈치챈 에네스타가 허겁지겁 바록을 집어던지고는 말했다.
"이, 이건... 대, 대련 부탁받아서..."
쿵!
"억!"
그대로 날아간 바록이 앞서 벽에 처박혔던 바쿠의 위로 떨어져 신음을 내뱉는 광경을 지켜봤다. 일부러 노린 것인지 아니면 우연인지는 몰라도 막 몸을 일으키던 바쿠와 그런 바쿠의 위로 떨어진 바록이 서로 박치기를 나누고서 그대로 뻗어버렸다.
이번 건 제대로 들어갔는지 쓰러진 둘은 더 이상 미동도 하지 않았다.
“......”
대련 한 번만 더했다가 애 잡겠다. 아니, 애라고 부르기엔 덩치가 너무 크긴 하지만... 그래도 바록과 바쿠는 일단 저래보여도 10대의 소년이었다.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 외관을 하고 있지만 일단은 10대였다. 수염만 붙이면 어디 전쟁터에서 십 수 년은 굴러먹어 보이는 험악한 상판이었지만 일단은 10대였다.
그렇다.
아직 어린 애였다.
아니, 아무리 봐도 애는 아니지만...
이세계의 기준으로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 기준에서는 아직 어린 나이인 것이다. 저래서야 트라우마가 생기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내게 보였다.
어쩐지 황홀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는 바록과 바쿠의 모습이 말이다. 기절한 주제에, 얼굴은 뭔가 약이라도 한 것 같은 얼굴이다.
기분이 나빠졌다.
"쟤네는 또 왜 저래? 뭐 잘 못 먹었어?"
"그것이..."
내 물음에 에네스타가 우물쭈물 입을 열었다.
"낙시안들의 습성이라고 합니다. 자신보다 강자에게 도전하는 것을 명예로 생각한다고... 또, 강자와 싸우는 걸 좋아한다고도 들었습니다."
"전혀 그런 얼굴로 안 보이는데...?"
좋아하는 얼굴치고는 너무 좋아하는 얼굴인데? 한바탕 즐긴 얼굴인데 저거. 그런 내 말에 공감하는지 고개를 주억이던 에네스타가 말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하던 참이었습니다. 아무리 때려도 저런 얼굴을 해오면 아무리 저라도 조금...”
나만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 아닌지 에네스타도 조금 기분 나쁘다는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그 모습을 본 나는 생각했다. 바록과 바쿠에게는 다행일지도 모르겠다.
지금 에네스타의 표정을 봤더라면 저 녀석들도 상처 입었을 거다. 아무리 싸우는 게 좋아서, 두들겨 맞아도 저런 얼굴을 지을 수 있는 강인한 육체의 소유자라도 마음의 상처는 어쩔 수 없는 법이었다.
나라면 한동안 방에 틀어박혔을 거다. 그런 얼굴을, 에네스타가 하고 있었다.
차라리 기절해서 아무것도 못 듣고 못 본 지금이 둘에게 행복한 걸 거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나에게 여태 맺힌 게 많았는지 에네스타가 말을 이어왔다.
“그리고, 대련하는 것은 저도 좋아하고, 주께서는 일이 바쁜 나머지 어울려주지 못하시니 저 역시 대련을 받아주고는 있었습니다만, 저 둘은 조금 정도가 과합니다! 시도 때도 없이 대련해달라고 졸라오는데다가, 쓸데없이 맷집은 좋아서 적당히 해서는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끝나지 않고...! 게다가 둘이 교대로 쉬어가면서 대련을 부탁해오는 통에 제가 사용해야할 자유 시간까지 빼앗겨서... 그래서, 차라리 진심으로 상대하면 조금은 적어지지 않을까 생각해서, 저도 모르, 게... 그만...”
그렇게 말을 잇던 에네스타가 내 눈치를 보며 말했다.
"조, 조금 어른스럽지 못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나의 주.“
조금이 아니지. 저 둘이랑 비교하면 에네스타가 많이 어른이기는 하지. 연령적인 면에서. 입 밖으로 내면 사단이 날 테니까 내지는 않겠지만.
아무튼, 덕분에 대충 상황은 알겠다. 바록과 바쿠가 시도 때도 없이 에네스타에게 대련을 부탁해오다가 결국 날을 잡은 에네스타에게 두들겨 맞은 거였다. 그 결과가, 지금의 바록과 바쿠의 얼굴 상태인거고.
둘의 얼굴을 보면 맞기는 엄청 두들겨 맞은 모양이었다.
이래봬도 나름 인격자인 에네스타가 일주일도 안 된 시간 만에 한계를 느꼈을 정도니 둘이 얼마나 극성이었는지는 잘 알겠다.
그나저나 나도 에네스타에게 항상 두들겨 맞던 입장이라서 잘 알았지만, 에네스타의 주먹은 엄청나게 매웠다. 나야 특성 덕분에 맞아서 아파본적은 없었지만, 아픔만 없었지 맞는 족족 펑펑 소리를 내며 날아다니는데 에네스타의 주먹이 매운지 달달한 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그런 에네스타에게 시도 때도 없이 대련을 부탁해오다가 결국 실컷 두들겨 맞은 끝에 기절해서 짓고 있는 표정이 저거라는 거지?
엄청 기분 나쁜데... 그거.
나는 시선을 돌려, 기절해있는 바록과 바쿠를 바라봤다.
움찔움찔, 쓰러진 채로도 꿈틀거리는 두 근육덩이들을 보자 눈이 썩어 들어가는 것 같았다. 나는 심상을 안정시키기 위해 어젯밤의 루시아를 떠올리면서, 다시 에네스타를 바라봤다. 눈이 한결 편해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에네스타가 겪은 고초가 무엇인지도 덕분에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