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화 〉86화
“끄응... 살살 좀 때리지.”
에네스타의 주먹은, 정말로 매웠다. 이걸 단순히 맵다고만 하기에는 다소 무리한 부분이 있을 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뭐 어떤가, 어차피 에네스타의 주먹이 얼마나 매운지 달달한지는 사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단지.
“옷이 엉망이 됐잖아.”
루시아가 선물해준 옷 중에서도, 핑크발랄하지 않은 디자인 덕분에 내 평상복이나 다를 바 없던 옷이 걸레짝처럼 너덜너덜해진 것을 보자 우울해졌다. 나름 아끼는 옷이었는데. 루시아가 처음 선물해줬던 옷들 중 하나였다는 것도 이유였지만, 루시아가 선물해준 옷 중에서도 그나마 입을만하다는 것도 큰 이유였다.
그런 것이 걸레짝처럼 되어 버렸으니 우울해지는 건 당연했다.
그야 뭐, 에루나에게 부탁하면 금세 말짱하게 되겠지만 말이다. 내게는 푸른 고양이 버금가는 에루에몽이 있으니. 크리샤에 의해 무너졌던 벽도 한 시간도 채 안 걸려서 원상 복구시킨 에루나니까 옷 한 벌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게 고쳐줄게 분명했다.
문제는 에루나가 곱게 내 말을 들어줄지는 모르겠다는 거다. 물론 들어주긴 할 거다. 에루나가 내 부탁을 들어주지 않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단지, 이걸로 또 무슨 수작을 부릴지 몰라서 걱정인거지.
또 골머리를 앓겠구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주인님. 도와줘?”
“그래준다면야 고맙지.”
그런 내게 다가온 로로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자 로로가 손을 뻗었다. 나도 마냥 이러고만 있을 생각은 없었기에 그런 로로의 손을 붙잡았다. 쭈욱, 하고 자그마한 로로의 손을 붙잡는 순간이었다.
작고 가녀려 보이기만 한 팔과는 달리 엄청난 힘과 몸이 당겨졌다.
후두둑!
반쯤 벽에 박혀있던 몸이 로로가 당기는 것과 동시에 빠져나왔다. 역시나라고 해야 할까, 벽에 처박혔던 몸도 아무런 상처 없이 멀쩡했다. 그리고 예상대로 벽에 꽂혀있던 반신의 옷 쪽은 걸레짝을 넘어서는, 색다른 무언가라는 상태였다.
쉽게 말하자면 걸레짝이라도 걸치고 있는 반쪽과는 달리 이쪽은 알몸에 버금가는 상태였다. 다행인 것은 간신히 속옷은 제구실을 하고 있다는 거였다. 느닷없이 로로에게 노출쇼를 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이미 충분히 노출한 것 같기는 한데...
“로로야, 네가 보기엔 어떻게 보이니?”
혹시 몰라서 양 팔을 벌린 채 로로에게 묻자 그런 나를 빤히 바라보던 로로가 입을 열었다.
“변태?”
너무했다. 조금 에둘러서 말해줄 수도 있잖아. 이래뵈도 일단은 주인인데. 내 시녀라는 것들은 왜 하나같이 이 모양인지 모르겠다.
그야 뭐 로로의 말 그대로, 누가 보더라도 이 꼴을 하고 있으면 변태로밖에 보이지 않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정신병자라던가.
내가 보기에는 괴악하다싶을 정도로 이상한 미적 감각을 갖고 있는 이 세계였지만 아무리 그런 곳이라도 지금 이 꼴은 이상해 보이는 것 같았다. 아니면, 그런 미적감각을 지니고 있는 인간과는 달리 로로가 낙시안이기 때문에 보는 눈이 달라서 그런걸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보기에도 변태 같으니까 아마 로로의 눈은 정상이겠지.
그렇다면 이 꼴을 하고서 에오시스 자매를 만나러 갔다간 어떻게 될지도 뻔했다.
“이대로 에오시스 자매들을 만나러 갔다간...”
큰일 나겠지.
정말로 큰일이 날 거다.
어젯밤 이후로 호감도가 70. 즉 애정으로 넘어선 루시아에 의해서든,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에루나에 의해서든, 어떤 식으로든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무슨 일이 일어날 거란건 확실했다.
그렇다면 내가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로로, 내 방으로 가서 옷 좀 가져다주라.”
“응.”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인 로로가 옷을 가지고 오기 위해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그런 로로에게 말했다.
“가급적이면 얌전한 걸로 가져와”
“...얌전한 게 뭔데?”
내가 덧댄 말에 고개를 돌린 로로가 그렇게 물었다.
뭐긴, 핑크발랄한거라던가, 타이즈하지 않은 걸로 가져다 달라는 뜻이지.
걸레짝이 된 이 옷 말고도 두세 벌 정도가 더 있으니까 찾기는 쉬울 거였다. 다르게 말하면 그 두세 벌 말고는 죄다 그렇고 그런 것뿐이란 뜻이지만. 내 옷장을 열면 정말이지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옷에 잔뜩 붙어있는 반짝이 때문에. 아주 조금이라도 옷장의 안으로 빛이 들어온다면... 그 날은 내가 눈 뽕을 당하는 날이었다.
평소에는 에루나가 직접 꺼내다주니 상관없었지만, 에루나가 없을 때 혼자 옷을 챙겨 입다가 그렇게 몇 번인가 눈 뽕을 당한 적이 있었다.
로로에게 주의사항으로 눈을 조심하라는 말도 덧붙이자, 고개를 끄덕인 로로가 말했다.
“그럼 얌전한 옷 가져오면 되는 거지?”
“그래, 얌전한 걸로 가져와라.”
내 말을 제대로 이해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말을 들은 로로가 고개를 끄덕이고서는 연무장 밖으로 나섰다.
자, 이걸로... 결국 연무장에는 나 혼자만이 남게 되었다.
“끄윽...”
“으어어...”
아, 미안. 깜빡했다.
정확히는 나랑, 기절한 두 변태. 바록과 바쿠만 남게 되었다. 이 녀석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기절해있으니 상관은 없을지도 모르겠다. 솔직히 말해서, 아직도 예의 기분 나쁜 얼굴을 하고 있는데다가 땀투성이인 녀석들을 만지고 싶지 않다는 것도 이유였지만.
아무튼, 어차피 옆에 있더라도 별 문제도 없을 만큼 튼튼해 보이는 두 녀석은 그냥 내버려두기로 했다.
“자, 그러면...”
뿌득, 뿌드득.
가볍게 몸을 풀어봤다. 벽이 무너질 정도의 주먹. 그걸 맞고도 내 몸은 무척이나 멀쩡했다. 아니, 오히려 여느 때와 비교해서 지금이 훨씬 좋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어제의 나와 비교해서, 지금의 나는 단순히 수치상으로만, 평균적으로 20을 훌쩍 넘는 능력치가 상승해있는 몸이었다.
당연히 여태까지와 비교를 불허하는 게 맞았다.
거기에 딱히 에네스타의 주먹에 얻어맞는 것 정도로 내 몸 상태가 변할 리도 없었다. 그야 벽이 무너졌을 뿐이지, 내 몸 자체는 고유 특성 차원을 넘는 자에 의해 보호받기 때문이었다. 칼을 직접 맞아도 멀쩡했던 몸인데 주먹정도야 어련할까.
옷은 전혀 보호받지 못했지만.
뭐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였다.
중요한건, 지금의 내 컨디션이 만전이라는 거였다.
대충 몸 상태를 확인해본 나는 이내 상태창, 하고 작게 중얼거렸다. 그러자 눈앞에 푸른 창과 함께... 익숙한 것이 떠올랐다.
“어디보자...”
「상태창」
「이름 : 이지경(베헤노스)」
「칭호 : 차원을 넘은 자, 단죄하는 자, 벌레만도 못한 자, 부덕의 군주, 드래곤의 처녀를 빼앗은 자」
「성별 : 남성」
「나이 : 27세」
「직업 : - (보류 : 드래곤 나이트, 부덕의 왕, 배덕의 왕)」
「종족 : 인간」
「근력 : 81(B)」
「민첩 : 75(B)」
「체력 : 88(B)」
「지력 : 85(B)」
「마력 : 0(F)」
「매력 : 49(C)」
「행운 : 67(B)」
「생명력 : 880/880」
「마나력 : 0/0」
「지구력 : 87%」
「고유 특성 : 차원을 넘은 자(SS), 개변자(S), 만인지상(S)」
「보유 특성 : 황금률(A), 예속 각인 : 에루나 투아레(A), 독서가(B), 소환사(B), 검사(B), 요리사(B), 약초사(B), 징벌자(B), 권선징악(B), 귀축(B)」
「보유 기능 : 주시자의 눈(EX), ※흡정(B), 투귀화(B), 사자후(B), 조화(C), 단죄(C), 소환 : 에루나 투아레(E), 라이어스 제국 검술(C), 요리(F), 물약 제조(F), 골렘 작성(F), 함정 설치(F), 조련술(F), 사격술(F), 천문학(F), 마법 이론(F), 야금술(F), 연금술(F), 마비내성(F), 기초 방패술(F), 전투감각(F), 즉각반응(F), 통증완화(F), 발기조절(F), 발기유지(F), 약물내성(F)」
「상태 : 매우 건강 (건강한 이유는 떠올리고 싶지 않지만)」
무심코 그렇게 능력치가 상승한 이유를 떠올려버린 나는 휙휙 고개를 내젓고서는 다시 상태창을 보며 이전과 비교해서 바뀐 것들을 확인했다.
제일 눈에 띄는 것은 당연하게도, 새로 추가된 칭호였다.
드래곤의 처녀를 빼앗은 자.
정말이지, 정말이지 엄청나게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이름의 칭호였다. 그리고 이 칭호를 내가 얻게 된 이유는,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당연하게도, 그 이름만큼이나 단순명료했다.
이 칭호야말로 내가 드래곤의, 루시아의 처녀를 내가 빼앗았다는 증거였다.
워낙 정신없던 와중에 얻어버린 칭호라서 사실 제대로 확인해보는 것은 지금이 처음이었다. 아직 제대로 된 설명도 구경하지 못한 녀석인 것이다.
다만, 이 칭호가 어떤 칭호인지는 어쩐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여태까지 새로운 특성이나 기능, 그리고 칭호를 얻었을 때랑은 달랐다.
그나마, 이 칭호를 얻었을 때랑 가장 비슷했던 경험은... 오직 그때뿐이었다.
주시자의 눈.
나도 아직 제대로 된 능력이 뭔지 파악조차 못한, 번외랭크의 기능을 습득했을 때뿐이었다. 단지, 비슷하다고만 한 이유는 어디까지나 비슷할 뿐이지, 그 둘 사이에는 명확한 차이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주시자의 눈을 습득했을 때는 그 기능이 대체 어떤 기능인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사용’할 수 있었다. 사용하는 방법이 어떤 건지,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그 힘을 사용해서, 로로의 운명을 내 안으로 거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사용조차 못했더라면 그런 짓은 할 수 없었을 테니까. 무슨 원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로로의 과거를 눈을 통해 보고서... 그 운명을 개변시켰다.
본래 지나가버린 역사를 어떻게 바꾼 것은 아니었다.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를 고치는 것은 불가능한 것 같았으니까. 단지, 그건 어디까지나 과거의 일만 그런 것이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은 이야기가 달랐다.
그래서, 그 운명을 개변시켰다. 로로가 앞으로 겪었어야할 운명을 내가 대신해서 거뒀다. 컴퓨터로 치면, 그냥 파일을 저쪽에서 이쪽으로 옮긴 것에 불과한 일을 했을 뿐이었다.
그 대가로 한쪽 눈이 멀긴 했다만.
아니, 멀었다기보다는 보는 관점이 달라진 걸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와 달리 ‘드래곤의 처녀를 빼앗은 자’라는 칭호를 얻었을 때는 조금 달랐다.
어떻게 다르냐면, 대충 이랬다.
나는 이미 이 칭호로 비롯되는 능력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었다. 단지, 주시자의 눈 때랑은 달리 그 능력을 사용할 수는 없었다. 이해할 수 없지만 사용하는 것이 가능했던 주시자의 눈과는 달리 이쪽은 무슨 능력인지는 알 수 있었지만 정작 사용할 수는 없다는 느낌인 것이다.
정확히는 조건이 부족하다는 느낌, 때가 아니라는 느낌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단지 예감일 뿐일지도 모르겠지만, 요즘 그런 내 예감은 이상할 정도로 잘 들어맞고는 했으니 아마 확실할거다. 그래서 더욱 불안해진 거지만.
“뭐... 까보면 그만이지만.”
그러니까, 까보기로 했다.
「이름 : 드래곤의 처녀를 빼앗은 자」
「등급 : 칭호」
「효과 : 인연을 맺은 드래곤의 힘을 일부 사용할 수 있다. 수명이 대폭 증가한다. 인연을 맺은 드래곤이 죽지 않는 한 불로한다.」
「설명 : 반신의 존재 드래곤과 깊은 인연을 갖고 있는 존재가, 그 드래곤과 맺어졌을 경우 얻을 수 있는 칭호 중의 하나이다.」
...
오우.
“...내가 생각했던 거랑은 조금 다른 게 튀어나왔는데.”
부덕의 군주니 뭐니하며 너무한 소리만 쓰여 있었을 뿐인 칭호를 얻었을 때도 느끼지 못했던 불안감에 또 흡정 때 같은 일이라도 터질까봐 있는 준비 없는 준비 다 해봤는데 맥이 다 빠졌다.
딱히 내가 불안해야할 요소가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이었다.
수명이 늘어난다는 거나, 불로한다는 거나 해석하기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일단 좋아 보이는 능력이기 때문이었다.
대체 수명이 얼마나 늘어나기에 대폭이라는 말이 떡하니 붙어있는지는 모르겠다만...
“...‘라이프’ 게임에서는 200%이상이 대폭이었던가.”
인간의 평균 수명을 대충 100이라고 쳤을 때, 거기에 200%을 증가시키면...
“와우. 벽에 똥칠할 때까지는 살겠네.”
딱히 그렇게 오래 살아서 좋을 것도 없는 몸인데.
아...
한 가지 좋은 점은 있을지도 모르겠다. 딱히 말로 하기엔 부끄러우니 안하겠지만.
“그나저나... 드래곤의 힘을 일부 사용할 수 있다는게 대체 뭔데?”
뭐, 브레스라도 뿜을 수 있게 됐나.
“아.”
실수했다고 생각한 것은, 그 순간이었다. 입 조심, 아니 생각 조심이란 걸 해야 했었다. 기능이란 것이 딱히 내가 원하지 않은 상황에서도 지가 알아서 발동해버린다는 것을 잠시 까먹은 것이 실수였다.
뿌드득!
무언가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통증은 없었다. 당연하다는 듯이, 단지 그것이 당연하다는 듯이 일어났다. 아마, 부러진 것도 아닐 것이다. 그런 소리가 났을 뿐이니까. 부러지는 것이 아니라, 위치라던가가 바뀐 것이리라.
그런 내 귓가에 알림 소리가 들려왔다.
띠링~
[플레이어 ‘이지경’님이 특수 기능 ‘용화’를 사용하기를 요청합니다.]
그런거 안했는데. 진짜로 안했는데.
띠링~
[경고! 플레이어 ‘이지경’님에게 사용 가능한 마력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띠링~
[임시조치로 마력을 조건에 맞는 대상을 탐색합니다.]
띠링~
[조건에 부합한 존재를 발견했습니다!]
띠링~
[플레이어 '이지경'님에게 예속된 '에루나 투아레'로부터 부족한 마력을 충당합니다.]
연속해서 들려오는 알림음과 함께, 멈춰있던 나머지 변화가 일어났다.
스스슥, 황금빛으로 반짝이는 비늘이 돋기 시작했다. 몇 초, 단 몇 초 만에 뒤틀리고, 비늘까지 돋아난 오른팔은 이질적인 형태로 변해버렸다. 나는 황금빛으로 반짝거리는 비늘로 둘러싸인, 날카로운 손톱이 돋아난 손을 보며 입을 열었다.
“아, 젠장할”
머릿속에서 계속해서 경고하던 이유를 그제야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