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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7화 〉87화 (87/370)



〈 87화 〉87화

뒤늦게 머릿속에서 울려대던 경고의 이유를 알아차린 내 앞에 비틀림이 보였다.


공간의 비틀림이었다.


공간의 비틀림이라고 거창하게 말했지만, 사실 별거 없었다.

그저 아지랑이처럼. 흐릿하게, 흐릿하게 흔들릴 뿐이었다.


그것이 공간의 비틀림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본 것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공간의 비틀림이라는 것은, 왠지 모르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어째서 그런 것을 알 수 있는지도 알 수 있었다.


우우웅!

빛을 보는 능력, 일반적으로 시력이라고 부르는 능력을 상실한 눈으로부터, 주시자의 눈에 의해 빛을 잃는 대신에 다른 것을  수 있게 된 눈으로부터 그런 비틀림이 보였다. 그리고 주시자의 눈을 통해서, 그것이 공간의 비틀림이란 것도, 그런 현상이 어째서 일어나는 것인지도 알  있었다.


넘어오려고 하고 있었다.

누군가가.


동시에.


비틀린 공간 너머로 피어오르는 연보랏빛의 마력이 보였다.

이정도의 마력, 거기에 연보랏빛의 익숙하기 그지없는 마력을 가지고 있는 존재는 천공성에서 단 한명이었다.

저 마력을, 나는 알고 있었다.


아니, 알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저 마력을 사용해본 적도 있었다.

나는 내 팔목에 걸려있는, 에네스타가 끊어먹은 줄이 아닌, 새로운 줄로 바뀌어있는 호신의 팔찌를 흘끔 바라봤다.

그래, 사용한 적도 있었다.

덕분에, 저 마력의 주인이 누구인지, 그리고 누가 공간을 비틀어 이곳으로 오고 있는지도 알 수 있었다.

애당초, 루시아가 없는 지금 마법을 다룰 수 있는 존재도  한 명뿐이기도 했다. 엘프인 주제에 마법의 마도 모르는 에네스타나, 핏줄이라 그런 것인지 정령술은 몰라도 역시나 마법과는 인연이 없는 에오시스 자매들이나, 나만큼은 아니더라도 마법을 사용할 정도의 마력이 있지도 않은 낙시안들이 이 천공성에 있는 전부였으니 말이다.


“그래도 그렇지 너무 빠른 거 아냐?”


알림으로부터 들려온, 에루나의 마력을 사용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대충 이러지 않을까 예상했지만 너무 빨랐다. 일처리 하나는 똑 부러지게 잘하는 에루나다웠다. 그  부러지게 하는 일 중에서 틈틈이 내 하반신을 노려대는 일만 없었으면 정말 좋은 시녀였을 텐데 말이다.

에루나의 심정이 이해할  없는건 아니었다. 그야, 갑작스레 마력이 빠져나간 것이니까 의아스러운게 당연했다.


딱히 내가 연무장에 간다고 얘기한 것도  것도 아니고...


응? 생각해보니까  지금 위험한  아닐까.


내 옷차림을 살펴봤다. 거진 나신이나 다를 바 없었다. 다행히 속옷은 멀쩡했지만 다르게 말하자면 속옷만 멀쩡한 거였다. 그리고 여기에는 아무도 없었다. 바록과 바쿠가 있기는 했지만, 둘은 어차피 기절해있는데다가 눈을 뜬다 쳐도 에루나를 막을 수 있는 녀석들이 아니었다.

벌벌 떨고만 있으면 다행이지. 줄행랑을 쳐도 모를 녀석들이다.


어? 정말로 위험한  아닌가.

물론, 내가 거부한다면 에루나는  의사를 따를게 분명하지만, 그래도  꼴로 있는걸 보고서 에루나가 내뱉을 말부터 두려웠다. 당장부터 무슨 말을 내뱉을지 떠올라서 더더욱 그랬다.


안그래도 에오시스 자매 건으로 복잡한 머리가 한층  복잡해질게 뻔했다.

투두둑!

급한 대로 반쯤 거적데기나 다를 바 없는 옷으로 최대한 드러난 살갗을 가리려고 해봤지만, 무리였다.

부욱, 하는 소리와 함께 옷가지를 잡았던 오른손의 날카로운 손톱에 의해 갈기갈기 찢겨나갔기 때문이었다.


이게 이렇게 쉽게 찢어지는 녀석이었나? 아니, 그보다 이렇게 쉽게 찢어낼 정도로 날카로운 손톱이 있을 수가 있는 건가?

황망하게, 찢겨진 옷 조각이 걸린 손톱을 보고 있자니, 이내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인님.”

목소리의 주인은 당연히 에루나였다.

연보랏빛 마력이 피어오르던 곳에는 어느새 에루나가 있었다. 그것이 당연하다는 것처럼. 원래부터 거기에 서있었다는 것처럼. 그저 그렇게 있었다.

한 가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거기에 있는 에루나의 얼굴이었다.

평소와 마찬가지인 얼굴로, 나를 놀릴 거라고만 생각했던 에루나는  수 없는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화가 난 것 같기도, 슬퍼하는 것 같기도, 그것도 아니면.

자책하는 것 같기도 한 얼굴로.

그런 에루나의 모습이 낯설었다. 정말로 내가 알고 있는 그 변태 시녀가 맞나 싶을 정도였다.

“에루나?”

“실례하겠습니다.”

하지만 그런 얼굴은 아주 잠깐이었다. 그저 잘못 본 것뿐이라고, 착각이라고 여길 수 있을 만큼, 에루나의 얼굴은 여느 때와 같은 얼굴이 되어있었다. 그리고 휙하고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둘러봤다.

 모습이 무척이나 낯설었다.

마치 내게서 표정을 숨기기 위해, 고개를 돌린 것 같았다.

그렇게 주변을 둘러본 에루나가 기절해있는 바록과 바쿠에게 보더니 그들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무엇인가 확인하듯이, 둘을 더듬어보고는 입을 열었다.

“주인님이 하신 일입니까?”

“아니... 그건 아닌데...”

내가 아니라 에네스타가 했지. 그리고 로로도.


어떻게 보면, 내가 한 일일지도 모르겠지만 일단 내가 저지른 일은 아니었다. 어느정도의 원인은 나에게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렇습니까?”


내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에루나가 후, 하고 작게 한숨을 내뱉고는 말했다.


“그럼, 우선 이곳부터 정리하겠습니다.”


짝, 하고 에루나가 가볍게 손뼉을 치자 무너져 내렸던 벽들이 순식간에 복구되기 시작했다. 무너져 내렸던 파편들이 도로 벽에 달라붙고, 바닥에 어지러이 흩어져있던 조각조각들이 그렇게 커다랗게 채워진 파편 사이를 메꿨다. 그렇게 파편 하나, 먼지 한 톨까지 도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절로 감탄이 흘러나왔다.

어딘가의 푸른 고양이처럼 손전등으로 빔을 쏘는 것도 없었다. 그냥 손뼉을 마주친 것만으로 난장판이던 연무장을 멀쩡하게 만든 것이다. 그리고 그런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한 에루나가 입을 열었다.


“다음은, 그 팔입니다.”


에루나의 말에 움찔하고, 용화라더니 내가 보기엔 드래곤은커녕 어디 큰 도마뱀의 다리라도 잘라다 붙인 것 같은 꼴을 하고 있는 오른팔을 감추려고 하자, 대뜸 그런 팔을 에루나가 붙잡으며 말했다.


아프다.

아프지는 않았지만, 어쩐지 아팠다.

“통증은 없으십니까?”


그렇게 묻는 에루나의 표정을 보았기 때문이리라. 무척이나 아파보이는 얼굴이었다. 찡그린 표정이, 고통을 참는 듯한 얼굴이었다.

 얼굴을 본 내가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아, 아니... 없는데.”

실제로 나는 아프지 않았으니까. 그저, 내 팔을 붙잡고서, 그런 표정을 지은 에루나를 보고서, 나조차도 아프다고 생각했을 뿐이니까.

그런 내 대답에 에루나가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팔은... 제대로 움직이십니까?”

팔목을 돌리는 게 비늘 때문에 엄청 귀찮은걸 빼면 잘만 움직였다. 그렇게 대답하자 에루나가 더듬거리며 내 팔을 만져 봤다. 그리고는 실제로 움직이는 것을 보여 달라고 말했다.

그래서 그렇게 했다.

나는 조금 과장스럽게 팔을 움직여보였다. 손으로 이런저런 모양을 만들어보이기도 했다. 왠지 그래야할  같았다.  모습을 지켜본 에루나가 입을 열었다.


“...이 정도라면 아직은... 주인님, 팔을 원래대로 돌려보시겠습니까?”


원래대로라니, 방법을 알면 진작 그렇게 했겠지.

좋아서 포크도 제대로 쥐지 못할 도마뱀 팔을 달고 있는 게 아니었다. 솔직히 황금빛 비늘로 둘러싸인데다가, 내 애검 뺨치게 날카로운 손톱이 뭔가 가슴을 울리는 게 없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대로 있는 건 사양이었다.

씻기도 엄청 귀찮을  같고. 비늘 사이사이로 솔질이라도 해야 될 것 같았다. 평소에 쓰던, 천같은 것으로 문댔다가는 천이 비늘에 갈기갈기 찢겨 나갈테니까.

나도 이대로 있고 싶은  아니란 거였다. 단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뿐이지. 난감하게 이걸 어떻게 돌리란 건지 생각하고 있던 나에게 에루나가 말했다.

“천천히, 심호흡을 하십시오.  팔은, 결국 주인님의 팔입니다. 아직까지는 모양이 조금 바뀌었을 뿐입니다. 천천히, 주인님이 바라는 형태를 떠올려보십시오. 괜찮습니다. 아직은 괜찮을 테니까.”

괜찮다니, 뭐가? 잘은 모르겠지만 하라니까 하기로 했다. 에루나는 언제나 나를 곤란하게 만드는 녀석이었지만, 그 행위에 악의가 있었던 적은 없었으니까.


아니, 조금 있었을지도...? 가끔 그냥 놀리는  재밌어서 놀리는 것 같을 때가 있기도 하긴 하다. 아닐 거라고 믿고 싶지만...

“주인님?”


나를 보는 에루나의 눈빛이, 어쩐지 무척이나 진지했기에 딴생각은 그만하기로 하고 에루나의 말대로 천천히 호흡을 골랐다.


그리고 에루나의 말대로 내가 원하는 형태, 본래 내 팔이었던 형태를 떠올렸다.


...음, 그래도 조금 멋지니까 비늘 한 두 개정도는 남겨도 되지 않을까?


“이상한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방해만 될 뿐입니다. 부탁드릴 테니 조금은 진지해주시겠습니까?”


바로 들켜버렸다. 거기에 어쩐지 조금 무서운 에루나의 말에 찔끔한 나는 곧이곧대로 원래 형태의 팔을 떠올렸다. 원래 형태라고 해봤자 별 거 없었다. 그냥 팔이니까. 내 팔에 손이 두 개가 달린 것도 아니고, 멀쩡한 왼팔을 보며 떠올리면 그만인 일이라 무척이나 간단했다.


그러자 뿌득, 뿌드득하고. 팔이 변하기 시작했을 때와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팔이 원래대로 돌아간 것은, 도마뱀 팔처럼 변했던 것처럼 순식간에 일어났다. 돋아났던 비늘도, 길어졌던 손톱들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스며들 듯이 사라져갔다.


이렇게 쉽게 돌아가는 거였으면 괜히 걱정했다.

“하아...”

그리고 내 팔이 원래대로 돌아가자, 한숨을 내뱉는 소리가 들렸다. 에루나였다. 내 팔이 완전히 원래대로 돌아간 것을 확인하듯, 더듬던 에루나가 이내 천천히 손을 떼어냈다.


“에루나?”


역시 이상했다. 아니, 역시랄 것도 없었다. 방금 에루나가 내게 보여준 모습은, 전부 처음 보는 것들이니까. 조금은 강압적으로, 나에게 무언가를 하라고 말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으니까. 그런 생각이 들어 대체 무슨 일이냐고 물으려고 했을 때였다.


“그나저나 주인님.”


“왜?”


내가 말을 꺼내기 전에, 입을 막으려는 것처럼 에루나가 말을 걸어왔다. 아마, 그럴 리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야, 에루나의 감정은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으니까.


평소와 같은 에루나였으니까. 언제나와 같은 에루나.

내가 알고 있는, 몹쓸 시녀인 에루나 그대로 였으니까.


그리고 그런 에루나가 입을 열었다.

“정말로 죄송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주인님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더 이상 참을 수가 없는데, 혹시 봉사가 필요하지는 않으십니까?”


주르륵...

그렇게 말하는 에루나의 코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붉은 피였다.


골렘도 피를 흘리나?


아니, 에루나라면 흘릴지도... 아니, 그것보다. 어째서 코피를 흘리는데. 그리고 참지 못하겠다니 또 뭐?

“...야, 피난다.”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불길함에 몸서리치며 그렇게 말했다. 일단 그건 그거고, 대뜸 피를 흘리기 시작한 에루나를 걱정해서.


그런 나에게 에루나가 말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리고 이건 피가 아니라 넘쳐나는 저의 충성심입니다.”


내가 아는 충성심은 그렇게 붉지 않았는데. 코를 통해 흘러나오는 충성심은 처음 봤다. 보고 싶지도 않았고.

덕분에 불길함이 배가 되었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아니죠, 충성심이라기보다는 흘러넘칠 정도로 주체할  없는 욕정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괜찮습니다. 어느 쪽이나, 제가 주인님을 생각하는 것은 마찬가지니까.”

충성심 쪽이 훨씬 좋았으니까, 충성심 쪽으로 다시 돌려줬으면 좋겠는데.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나에게, 에루나가 하아, 하고 달콤한 숨결을 내뱉었다.

루시아의 것과는 다른, 달콤하면서도 약간 피비린내가 나는 것 같은 숨결이었다.

“주인님은 움직이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


스으윽, 하고 하녀복을 벗으려드는 에루나를 보고서 나는 냅다 도망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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