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6화 〉96화
이럴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그림자의 수를 보고서 등골이 오싹했다.
아마도, 나한테는 통하지 않을 거라고는 생각하지만.
하지만 통하지 않을거라는 걸 안다고 하더라도, 마냥 맞아줄 생각은 없었다. 아프진 않더라도, 기분이 나쁜 건 나쁜 거니까.
그래서 말했다.
“에루나. 나를 지켜라.”
“알겠습니다.”
내 말에 고개를 숙인 에루나가 주문을 영창했다. 하지만 아무리 에루나가 영창을 단축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크리샤의 그림자가 내게 닿는 것보다 빨리 마법을 쓸 수 있다는 건 아니었다. 나는 에루나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에네스타에게 명했다.
“에네스타, 에루나가 마법을 완성시킬 때까지 그림자를 막아라.”
“나의 주의 뜻대로.”
스르릉, 검을 뽑아든 에네스타가 쇄도해오는 그림자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촤아아악!
한 뼘, 내거랑은 다르게 무려 한 뼘이나 되는 투기가 둘러진 에네스타의 검이 번쩍였다. 말이 한 뼘이지, 푸른 투기로 둘러싸인 에네스타의 검은 옆에서 보면 마치 푸른 대검을 휘두른 것처럼 보였다.
순식간에, 빠르게 날아오던 수십의 그림자 중 열이 베여 사라졌다.
“빛이여, 나의 주위를 둘러라. 퍼져라. 지켜라. 빛의 대결계.”
파앗!
동시에 마법을 완성시킨 에루나와 내 주위로 반짝반짝, 빛으로 빛나는 얇은 막이 펼쳐졌다.
콰드드득!
에네스타가 미처 베지 못한 그림자들이 그런 결계에 막혀 힘없이 흩어졌다.
아무리 드래곤이라고 하더라도, 상성이란게 있는 법이었다. 크리샤가 뻗어 보낸 그림자들은, 영창조차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같이 중급 마법에 준하는 파괴력을 지니고 있었지만, 에루나가 펼친 빛의 대결계는 빛속성의 상위 마법인 것이다.
상성도 상성이지만 급부터가 달랐다.
하지만, 급이 다른건 드래곤인 크리샤도 마찬가지였다.
쩌적!
“...에루나, 금방 깨질 것 같은데.”
“죄송합니다. 주인님, 아가씨의 마법은 저랑은 비교할 수 없기 때문에...”
“...뭐, 그건 그렇겠지만.”
드래곤과 그 드래곤이 만든 골렘. 마법의 종주와, 마법으로 태어난 골렘이다. 아무리 그래도 쉽게 막을 수는 없겠지. 그래도 빛의 결계가 펼쳐진지 몇 초도 안되서 금이 갈 줄은 몰랐다.
까마득하구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입을 열었다.
“나타, 에샤, 모네.”
내 부름에 세 자매, 에오시스 자매들이 고개를 숙이며 다가왔다. 그런 에오시스 자매들의 옷차림은, 평소랑은 판이하게 달라져있었다. 다른 엘프들과 마찬가지인 차림이었던 세 자매였지만, 여기 데리고 오기 전에 갈아입은 것이다.
의식을 치루기 위한 옷으로.
무녀들의 옷으로 말이다.
처음 봤을 때 조금 쇼크 먹었지만. 그도 그럴것이, 무녀라는 게 저런 옷을 입고 기도를 하고, 춤을 추는 일을 하는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거든.
나는 속이 훤히 비쳐 보이는, 얇은 천으로 된 옷차림의 세 자매에게 최대한 시선을 보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말했다.
“노래하라.”
“저희들의 주인의 뜻을 따르겠나이다.”
내 말에, 세 자매가 그렇게 읍을 하고서는, 두 손을 모아쥐었다.
“아ㅡ.”
“라ㅡ”
“아아ㅡ!”
띠링~
[‘무녀단’의 노래를 들었습니다. 현재 ‘무녀단’의 종합 능력치에 따라 다음과 같은 효과를 얻습니다. 최대 생명력이 12%만큼 증가합니다. 생명력의 회복 속도가 34%만큼 증가합니다. 또한 10초마다 잃은 생명력과 소모된 지구력이 3%만큼 회복합니다.]
“아아, 크흠!”
아름다운 화음을 이루며 퍼지기 시작하는 에오시스 자매들의 노래를 들으며, 나는 목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그런 내 귓가에, 콰르르릉, 하고. 동굴에서 울리는 것처럼 거대한 포효가 들려왔다.
드래곤 피어.
갑작스런 내 난입, 거기에 대놓고 저항까지 하는 것에 크리샤가 제대로 빡이 친 모양이었다. 나는 특성 ‘차원을 넘은 자’ 덕분에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노래를 부르고 있던 에오시스 자매들이나, 결계의 밖에 있던 에네스타가 휘청하는 것이 보였다.
그 모습을 보고서, 나도 외쳤다.
“크리샤!”
쩌렁쩌렁, 내 목소리가 확성기에 대고 말하기라도 한 것처럼, 크게 울렸다.
띠링~
[플레이어 ‘이지경’님이 기능 ‘사자후’를 사용하셨습니다. 사자후의 효과가 미치는 모든 범위에 존재하는 적대대상에게 상태이상을 부여합니다. 또한 아군에게는 ‘고양’ 효과를 부여하며, 낮은 아군에게 걸려있는 정신계 상태이상을 해제합니다.]
띠링~
[황금률! 강한 의지로, 기울어진 천칭을 고쳐 세웁니다. 기능 ‘사자후’가 기적적으로 ‘크리샤네아 슈페리아’의 기능 ‘드래곤 피어’에 대항합니다. 플레이어 ‘이지경’님의 기능 ‘사자후’의 효과가 극대화됩니다.]
띠링~
[가신 ‘에네스타 시오니스’에게 걸려있던 상태이상 ‘공포’가 해제됩니다.]
띠링~
[가신 ‘나타 에오시스’에게 걸려있던 상태이상 ‘위압’이 해제됩니다.]
띠링~
.
[가신 ‘에샤 에오시스’...]
띠링~
[기능 ‘사자후’의 효과에 미치는 모든 아군에게 ‘고양’효과가 부여됩니다. ‘고양’의 효과를 받는 모든 대상의 이동속도, 공격속도, 생명력 회복속도, 지구력 회복속도가 10%만큼 상승합니다.]
드래곤 피어 한 방으로, 에오시스 자매는 물론이거니와 검주인 에네스타마저 상태이상에 걸려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사자후 한방에 해결됐다. 나도 아직 잘 모르는 특성 중 하나인, 황금률 덕분이었다.
행운이기는 했지만 순식간에 가신들의 상태를 회복시킨 내가 이어서 말했다.
“지금부터 그쪽으로 갈 생각인데! 싫으면 어디 한 번 막아보셔!”
내 외침과 함께, 콰작!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와우.”
막아보라고는 했지만, 이렇게까지 한 적은 없었는데.
거대한 드래곤... 의 형상을 한 흙과 바위로 이루어진 거대한 무언가가 일어서는 것이 보였다. 거대한 흙으로 이루어진 드래곤은, 그런 내 앞을 가로막듯이 서서는, 다가오면 물어뜯겠다는 듯이 아가리를 쩌억, 하고 벌렸다.
“저게 뭐냐 대체...”
하도 어이없어서 중얼거린 내 말에 에루나가 태연히 대답했다.
“상위 마법인 토룡 소환입니다. 대지 속성의 상위 마법인만큼, 흑색용이신 크리샤 아가씨의 특기 중 하나기도 합니다. 그래도, 저 크기는 좀 큽니다만... 아마, 보옥의 힘을 사용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
내가 가는 게 얼마나 싫은 거야.
아니, 하긴.
혼자서 느긋하게 온천욕을 즐기는 와중에, 그 온천에 대놓고 쳐들어갈 테니까 막을 테면 막아보라고 한 거니까 그럴 만도 하긴 했다.
그나저나 보옥이라...
안 그래도 마법의 종주, 드래곤인 크리샤네아가 사용한 상위마법은, 다른 종족들이 사용한 상위마법과는 취급을 달리하는 별개의 마법이다. 거기에 보옥의 힘까지 사용했다면...
응, 아무리 영창도 없이 만들어낸 거라고 해도 위력만큼은 어지간한 상위마법 서너 개와 준하는 녀석일 거다. 영창까지 제대로 끝냈다면, 고위마법의 뺨을 왕복으로 후려칠 정도의 위력까지 갖췄겠지.
그리고 저게, 자신이 지배하는 영지 안에 있는 드래곤의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할 수 있는 마법 중에서도 가장 강한 마법 중 하나였다. 아무리 드래곤이라고 하더라도, 아무리 보옥의 힘이 있다고 하더라도, 무영창으로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은 상위정도까지니 말이다.
즉, 평타긴 평탄데 좀 쎈 평타라고 해야 되나. 저걸 평타라고 하기엔 애매하긴 하지만.
저걸 넘지 못하면, 아마 나는 한 달 내내 크리샤의 얼굴도 보지 못할게 분명했다. 지금 내가 한 짓을 핑계로, 이리저리 피하고 다녀도 할 말 없기도 하고 말이다.
“응, 그건 안되지...”
그래서야 내 목적을 이룰 수 없었다.
“에루나. 저걸 뚫어야겠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
“토룡소환은 주변에 있는 흙과 바위들로 용의 형상을 한 거대한, 일종의 골렘을 만들어내는 마법입니다. 사용된 소재나, 마법을 사용한 자의 마력에 따라서 그 강함이 달라지고는 하죠. 저 정도 크기의 토룡이라면 오우거가 때려도 금도 안 갈게 분명합니다.”
그러니까, 하고 에루나가 말했다.
“오우거보다 더 강하게 때리면 부숴지긴 한다는 이야깁니다. 주인님, 고위마법을 사용하는 것을 허락해주십시오.”
“아니, 허락할 필요도 없잖아.”
에루나의 말에 내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내가 저걸 뚫고 싶다고 말했으니까. 네가 내 시녀라면 뚫어라. 내 허락 같은 건 필요 없으니까.”
내 말에 고개를 숙여보였던 에루나가 말했다.
“기사장, 에네스타. 앞으로. 고위 마법을 영창하겠습니다. 그동안 시간을 벌어주십시오.”
“알겠... 습니다!”
에루나의 말에 에네스타가 토룡을 향해 돌진했다. 그런 에네스타를 향해 아가리를 돌리는 토룡을 보며, 에루나가 내 주위에 펼쳐져있던 빛의 대결계를 해제하고는 영창하기 시작했다.
“나 여기에 마력을 바쳐 바라노니.”
내 곁에서 노래를 계속하는 에오시스 자매의 목소리와 화음을 이루며, 에루나의 영창이 이어졌다.
“이르기를, 손의 끝에서 끝으로 이르기를.”
우웅, 보랏빛의 마력이 에루나의 주변을 두르며, 불길하게 흔들거린다.
고위마법.
마법으로써는 가장 강력하다는 대마법, 이 세계에 이르고 있는 법칙마저 고쳐 쓰는 그 대마법의 바로 밑에 있는 마법.
하위 마법이 나무를 불태우고, 바위를 부순다면.
중위 마법은 나무들을 불태우고 산을 깎아낸다.
상위의 마법은 숲을 태우고, 산을 부숴 천지를 울리며.
마침내 고위의 마법이 이른다면.
마법의 진정한 힘이 펼쳐진다.
일개의 마법으로 군대를 지워 없애고, 지도를 바꿔 그리게 하는, 마법. 그것이 고위 마법이었다.
“그곳에 남아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나니. 오라. 분쇄하라. 파괴하라. 나의 손끝에서. 닿는 모든 것을 지워 없애라. 극소 소멸.”
쩌엉, 하고.
에네스타가 휘두른 검과 함께 영창을 마친 에루나의 모습이 사라졌다. 내 옆에 있었던 에루나가 어느 샌가, 그 에네스타의 옆에 있었다.
내 옆에는 에루나를 대신해서, 보랏빛의 마력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에네스타의 옆에 나타난 에루나가 에네스타의 검과 함께 손을 뻗었다. 이윽고, 마법이 발했다.
콰직, 하고.
에네스타의 검이 토룡의 머리를 가르고, 뒤이어 꽂힌 에루나의 마법이 토룡을 지워없앴다. 아니, 공간을. 거기에 있는 모든 것을 지웠다.
파스스슥. 불타고 남은 재가 날아가듯이.
입자가 되어 흩어져가는 토룡을 보며 나는 박수를 쳤다. 그리고는 에루나에게 다가가 말했다.
“수고했어, 에루나. 이 다음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조금 쉬고 있어도 돼.”
“감사합니다.”
꾸벅, 하고 고개를 숙인 에루나가 그렇게 말했다.
상위마법인 빛의 대결계로, 크리샤의 공격을 연이어서 막은데다가 고위마법과 함께, 공간이동까지 사용한 에루나의 마력은, 내 눈에도 확연히 줄어들은 게 보일 정도였다.
아마, 한두 번 정도는 상위 마법인 빛의 대결계정도는 더 펼칠 수 있겠지만. 소모된 건 소모된 거였다. 나중을 위해서라도 쉬게 두는 게 좋았다.
“자, 에네스타.
“부르셨습니까, 나의 주.”
토룡이 쓰러지기 무섭게 넘실거리며 피어오르는 수많은 그림자로 된 창들을 보며 내가 말했다.
“전부 쳐내라.”
“알겠습니다.”
꾸욱, 하고 에네스타가 검을 쥐고서, 투기를 피어 올렸다. 그런 에네스타를 향해, 아니 나를 향해 그림자들이 쇄도해왔다.
나는 그런 그림자 사이로 걸음을 옮겼다.
파앗, 하고 내게 날아들었던 그림자가 에네스타의 검에 베여 사라진다. 또 한걸음을 옮기면, 또 다른 방향에서 날아든 그림자가 다시 베여 사라진다. 또 한걸음, 한걸음... 수십의 그림자들이 동시에 날아와도, 전부 에네스타의 검에 베여 사라져갔다.
그렇게 몇 걸음을 걸었을까.
“읏?!”
콱!
또 다시, 내게 날아들던 그림자를 베어넘기던 에네스타를 향해, 그림자들이 움직였다. 그림자를 조종하는 크리샤가 내가 아니라, 에네스타부터 치워버리는 쪽이 낫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 역시 내버려둘 생각은 없었는지 동시에 내게 날아들은 그림자가 있었다. 나와 에네스타, 둘 모두에게 그림자가 뻗어온 것이다.
“크읏!”
훅, 하고 내게 뻗어오던 그림자를 쳐낸 에네스타가 정작 자신에게 날아든 그림자에 맞고서 튕겨나갔다.
“나의 주!”
순식간에, 튕겨나갔던 몸을 바로잡고서 내게 달려오는 에네스타가 보였지만, 그보다 먼저 또 다른 그림자가 내게 휘둘러져왔다.
에네스타가 아무리 빠르더라도, 저 그림자보다 먼저 내게 오는 것은 무리였다.
그래서 검을 쥐었다.
허리춤에, 장식마냥 덜렁덜렁 매달려있던 나의 검을.
루시아가 내게 선물로, 애정의 증거로 만들어준... 자신의 이빨로 만들어준 ‘광휘’를 쥐었다.
그리고 휘둘렀다.
후욱!
광휘의 끝에, 에네스타에 비하면 한없이 조촐한 투기가 피어올랐다. 하지만 그걸로 끝나지 않았다. 그 푸른 투기를 뒤덮듯이, 칠흑처럼 검은 것이 내 검 끝을 덮었다. 광휘를, 불길하기 짝이 없는, 검푸른 투기가 둘러졌다.
띠링~
[플레이어 ‘이지경’님의 의사에 따라 특성 ‘개변자’가 현 상황에 대응합니다.]
띠링~
[플레이어 ‘이지경’님의 다음과 같은 기능의 효과가 일부 개변됩니다. 기능 ‘단죄’의 효과가 임시로 변경되었습니다.]
띠링~
[플레이어 ‘이지경’님의 칭호 ‘단죄하는 자’가 개변된 기능 ‘단죄’에 동조합니다.]
후우우욱!
검푸른 투기가, 에네스타의 것과 같은 크기로 피어올랐다.
휘두른 검 끝을 덮고서, 그걸 넘어서 검 전체를 덮어가며, 내 주위로 피어오른다.
그 모습을 보고서, 나는 머릿속에 떠오른, 정말로 유치한 이름을 입에 담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런걸 보면, 누구라도 이런 것쯤 한 번 해보고 싶었을 거다.
“단죄자의 검.”
나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써걱!
그림자가 베였다.